“좋아요. 저도 지한이도 촬영하는 거 좋아하거든요.”
“응!”
의자에 앉아서 발을 까딱이며 지한이가 대답했다.
정말 좋은지 두 뺨을 붉히며 엉덩이를 들썩이는 모습에 분장팀 막내인 수영이 지한의 피부 결을 정리하면서 말했다.
“좋은 건 알겠는데 그래도 지한아 입은 열지 말자.”
수영의 말에 입을 합 다문 지한을 보고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내 동생이지만 너무 귀엽다.
“지한이 어제 늦게 잤니? 조금 피곤해 보이는데?”
“어제 이신성 배우랑 촬영하는 건 처음이라고 늦게까지 대본 보느라 잠을 얼마 못 잤어요.”
“어이고. 우리 지한이 그래쪄요? 이신성 배우님이랑 촬영한다고 밤늦게까지 연습했쪄요?”
“우으응.”
화장하느라 차마 입을 열지는 못해서 입술을 앙 다물고 지한이 불만 섞인 음성을 흘렸다.
너무 놀렸나 보다.
하지만 지한이는 놀리는 재미가 있었다.
저렇게 볼이 퉁퉁 부은 얼굴도 귀여웠고 놀릴 때마다 바로 반응을 보이는 것도 재밌었다.
여기 있는 이들은 모두 그걸 알고 있기에 이렇게 건수를 잡으면 지한이를 놀리려고 들었다.
“알았어. 그만할게. 자자. 얼른 화장합시다.”
능청스러운 소영의 말에 지한이 눈에 힘을 줬지만 지연이 빠르게 소영의 손에 브러쉬를 건네주며 지한의 불만을 봉쇄했다.
언제나 화기애애한 분장실이었다.
* * *
“이신성 배우 도착하셨습니다.”
촬영장 한 편에서 핫팩을 쥐고 대기하고 있던 남매는 스태프의 말에 멀리서 올라오는 머리통을 보았다.
오늘 촬영은 성아네의 집 앞 골목. 시간은 저녁.
퇴근 후라는 설정 때문에 해가 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밤에 야외 촬영 하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그때는 지금보다 날이 따뜻했는데 추운 겨울밤 촬영이라니 핫팩을 더 넉넉하게 챙겨왔어야 했다며 지연은 후회했다.
지퍼를 내려 지한을 품에 안고 있던 지연이 이신성 배우의 도착에 몸을 일으켰다.
“얼른 인사하고 오자.”
“응.”
누나의 품에서 나오자마자 몸을 부르르 떤 지한이 지연의 말에 이신성 앞으로 향했다.
자신의 몸보다 큰 패딩을 입고 제 앞에 선 아이를 보고 신성이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오지한입니다.”
“아, 네가.”
신성이 지한의 인사를 듣고 몸을 숙여 지한이와 눈을 맞췄다.
“네가 그 집집마다 둘째 갖자는 난리를 만든 지한이구나? 반갑다. 난 이신성이라고 해.”
“알아요. 이신성 선배님.”
“편하게 형이라고 불러도 돼.”
“하지만 영훈이 형이 모두 선배님이라고 부르라고 했는데.”
“괜찮아, 괜찮아.”
신성의 말에 눈치를 보던 지한이 그의 귓가에 손을 모았다.
“그럼 우리끼리 있을 때만 형이라고 하면 안 돼요?”
작게 속삭이며 내놓은 타협안에 신성이 피식 웃었다.
요 귀여운 꼬마 녀석 좀 봐라?
둘만 있을 때만 형이라고 해도 되냐고 되묻는 걸 보니 연예계에서 주의해야 할 점을 들은 모양이다. 그리고 그 이유도.
아직 어려 보이는데 꽤 눈치가 좋은 아이네.
“좋아.”
신성이 지한의 어깨를 토닥이고 몸을 일으켜 분장실로 향했다.
“지한아 귓속말은 왜 했어?”
옆에 다가온 지연이 신성의 뒤를 바라보고 있는 지한에게 물었다.
지한이 신성에게 했던 것처럼 지연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둘이 있을 때만 형이라고 해도 되냐고 물었어.”
“그랬더니 뭐래?”
“된대!”
완전 멋진 사람이야!
두 팔을 크게 움직이며 멋지다고 반복하는 동생을 보고 지연이 시선을 움직여 신성의 뒤를 좇았다.
“흐음.”
“왜 그래?”
“아니, 아무것도.”
나중에 얘기해줘야지.
주연이 왔으니 곧 촬영에 들어갈 거다.
지한을 데리고 다시 영훈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면서 지연이 손에 들고 있던 핫팩을 지한의 손에 들려줬다.
따뜻한 핫팩을 받고 지한이 빨리 연기하고 싶다고 재잘댔다.
* * *
“엄마엄마엄마!”
방에서 숙제를 하다가 맞춰놓은 알람을 듣고 해수가 뛰쳐나왔다.
호들갑 떠는 딸을 본 홍 여사가 소파에 뛰어드는 딸의 등을 찰지게 때렸다.
“뛰지 마!”
“악! 엄마 아파!”
“얌전히 앉아. KBC 틀어놨어.”
“헤헤헤.”
“웃지 마. 정들어.”
그러면서도 방에 들어가라고 쫓아내지 않는 엄마를 보고 해수가 슬그머니 홍 여사의 옆에 붙었다.
1화를 보고 거하게 울어버린 탓에 그남그녀를 볼 때는 온 가족이 TV 앞에 앉았다.
평소 드라마를 보지 않는 아빠마저 이 시간이 되면 TV 앞에 앉는 것이 첫방 때 있었던 일 때문인 게 분명했다.
“음. 아, 오늘은 두 사람이 그 얄미운 재욱이 형한테 한 방 먹여주려나?”
“글쎄다. 엄마가 봤을 땐 그 형이 큰일 벌일 것 같던데.”
“그 사람 너무 싫어.”
성아와 재욱은 첫만남과 달리 업무로 부대끼면서 서로 가까워졌다.
동생을 질투하고 그룹을 흔들던 형의 계략으로 재욱이 위기에 빠지자 성아가 보란 듯이 나타나 재욱을 위기에서 구해줬다.
외국 바이어와의 미팅 자리에서 성아가 멋지게 서류를 들고 등장하는 모습에 해수네 가족들은 서로 얼싸안고 소리까지 질렀다.
“지난 화에 성아가 재욱을 위기에서 구해줬으니 재성이 가만있지 않을 거다.”
“그래도 두 사람이라면 문제없을 거 같은데? 회장님도 재성이 쳐내려고 하는 거 같고.”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못할 게 없는 거야.”
“그런가? 아! 시작한다.”
광고가 끝나고 화면에 11화 로고가 뜨자 해수가 화면을 가리켰다.
해수의 말에 두 사람의 시선도 TV로 향했다.
“박성아 씨 오늘부로 승진입니다. 이제 박성아 대리입니다.”
지난 화에 있었던 활약으로 성아가 승진하는 것으로 드라마가 시작했다.
들어온 지 반년도 되지 않았는데 승진이라니 질투어린 시선을 보내는 이도 있었지만 어제 있었던 일이 사내에 퍼진 덕분인지 인정하는 이들이 더 많았다.
드라마에서는 팀원으로부터 인정받는 성아의 모습과 위기를 넘기고 가까워진 성아와 재욱, 그리고 그런 밝은 분위기의 주인공과 다르게 한없이 어둠으로 가라앉고 있는 재성의 모습을 대비해서 보여줬다.
“으으. 저놈 일 칠 것 같은데.”
“아빠가 말했잖니. 궁지에 몰리면 사람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고.”
장면이 전환되고 재욱이 성아의 승진을 축하하기 위해서 레스토랑을 예약하는 씬이 나왔다.
“으아아. 너무 멋져.”
“당신 우리 연애할 때 기억나?”
“기억나지. 내가 그때 처음으로 데이트한다고 식당에 예약이란 걸 해봤잖아.”
“어머, 그랬어?”
“그랬지.”
성아를 위해 레스토랑을 통째로 빌린 재욱을 보고 해수의 가족이 낭만에 젖어들었다.
부드러운 음악과 근사한 식사.
그 속에 있는 사랑에 빠진 연인.
“이거 열어보세요.”
“이게 뭐예요?”
“승진 축하 선물입니다.”
재욱이 고급스러운 상자를 건네자 홍 여사와 해수가 입을 틀어막고 ‘어머머’ 소리를 질렀다.
무르익은 분위기에 고급스러운 액세서리 상자라니!
“반지다.”
“반지겠지?”
“아직 이르지 않아?”
초를 친 아빠를 보고 홍 여사와 해수가 눈을 세모꼴을 하고 째려봤다.
커흠. 그 내 나름 스토리 전개를 보고 내린 합리적인 판단인데.
아빠가 슬그머니 두 사람의 시선을 피해 TV에 눈을 고정했다.
“어머, 이건.”
“목걸이에요.”
“그러네요.”
조금 실망한 듯한 성아의 목소리에 해수네 모녀도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다른 선물을 기대한 것 같은데?”
“아, 아니에요.”
“그건 뭐. 다음에.”
“네?”
“다음에 정식으로 프러포즈할 때 줄 예정이라 오늘은 목걸이로 참아줘요.”
재욱의 말에 성아가 할 말을 잃었다.
반대로 해수네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아아아아아!!!!!!!”
“전무니이이임!!! 너무 멋져어어!!!!”
“거봐라. 내가 이르다고 했지!”
월드컵 결승골을 넣은 것 같은 반응에 세 식구가 서로 얼싸안았다.
두 사람이 이어지는 것은 기정사실이라며 기뻐하고 있는 동안 장면이 전환되어 성아의 집 앞으로 장소가 바뀌었다.
“아, 잘됐다.”
“그러게. 아직 조금 걱정인 게 있지만.”
가로등 불빛 아래 입맞춤을 하는 두 사람을 보고 해수가 입을 틀어막았다.
“누나?”
동생의 목소리에 두 사람이 화들짝 놀라 떨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현관 앞에 쭈그려 앉아 있는 성진이 보였다.
“너, 너 왜 나와 있어.”
“누나가…, 안 와서.”
그러고 보니 오늘 늦을 거란 연락을 못 했다.
승진도 갑작스러워서.
벨소리를 낮춰놨던 휴대폰을 꺼내들고 부재중 전화를 확인한 성아가 성진에게 다가갔다.
“저 아저씨랑, 있었던 거야?”
조금 늘어진 동생의 목소리에 성아가 미안한 얼굴을 했다.
연락도 없이 늦어서 화가 났나 보다.
“누나가 미안해. 얼른 들어가,”
풀썩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아이가 그 자리에서 풀썩 쓰러졌다.
갑자기 쓰러진 성진을 보고 성아와 재욱이 얼어붙었다.
“서, 성진아.”
이름을 불러도 아이가 일어나지 않았다.
위화감을 느낀 이들이 아이에게 다가갔다.
겨우 몸을 돌린 성진의 얼굴에 피가 묻어 있었다.
그 화면을 끝으로 드라마 주제곡이 흘러나왔다.
“이게 뭐야!?”
“어어엉?!
“아니, 여기서 끊으면 어떡해!”
해수네 가족들이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났다.
* * *
[이게 뭐예요? 당장 다음 화 내놔요]
[뭐야 우리 성진이 어떻게 된 거예요]
[성진이한테 무슨 일 생기면 가만 안 두겠습니다]
[그남그녀 감독님 보세요]
[마지막에 뭐예요? 성진이 왜 쓰러짐?]
그남그녀 시청자 게시판이 불탔다.
1화부터 훈훈한 외모로 등장해서 시청자들에게 성진이 같은 남동생 갖게 해 달라며 신드롬을 일으켰던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갑자기 창백한 얼굴로 피를 흘리며 쓰러졌는데 그 원인도 모른 채 끝났다.
그 전까지 나오던 훈훈한 분위기에 위험 요소는 재성밖에 안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뜬금없이 성진이 쓰러지는 모습에 영문을 알 수 없는 시청자들의 혼란이 게시판에 가득했다.
“흐흐흐.”
“PD님 지금 웃음이 나와요? 지금 시청자 게시판 난리예요.”
“당연히 웃음이 나오지. 시청률 봤냐?”
“25% 넘었다면서요?”
“그래. 그리고 지한이 덕분에 내일 시청률도 장난 아닐 것 같지 않냐?”
“무조건 볼걸요?”
당장 우리 성진이 잘못되면 KBC로 쳐들어가겠다는 게시글이 실시간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우리 잘만 하면 30%도 넘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면 좋겠네요.”
조연출이 무언가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얼굴로 헤헤 웃었다.
나사 빠진 얼굴을 보고 유 PD의 얼굴도 실실 풀렸다.
아마 오늘 밤에는 그남그녀의 시청자들이 전부 눈물 바람이 될 거다.
오늘 나올 씬을 촬영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을 붉혔던 일을 떠올린 유 PD가 악마처럼 웃었다.
* * *
“국장님 23%로 시작했습니다!”
“이거 어제 그렇게 끝나서 다들 시작부터 보는 것 같은데?”
“제 생각도 같습니다.”
조정실에서 시청률을 확인하던 국장이 환한 얼굴로 보고받았다.
게시판의 화력을 보고 오늘 혹시 30%가 넘지 않을까 조정실에 찾아왔는데 기대해 봐도 좋을 것 같았다.
화면에는 쓰러진 성진을 안고 응급실에 뛰어 들어가는 가족들이 보였다.
“백혈병입니다.”
“그게 무슨 갑자기 백혈병이라니요.”
“혹시 최근에 아이가 밥을 잘 먹지 못하고 자주 쓰러지지 않았나요?”
“그게 저번에 넘어지고 나서 조금.”
“넘어진 것도 빈혈 때문일 수 있습니다.”
의사의 말에 가족들이 넋이 나간 얼굴을 했다.
다치고 나서 조금 예민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병의 증상이었다니.
“선생님 치료는. 치료는 어떻게.”
“우선 항암 치료부터 시작하시죠.”
이 이후로 성아의 가족들의 사정은 급속도로 악화됐다.
아이의 간호를 위해 어머니는 하루 종일 병실에 있어야 했고, 아버지는 병원비를 위해 대출을 알아봤다.
성아 역시 편한 마음으로 재욱을 바라볼 수 없어서 일에만 몰두했다.
“싫어! 안 먹어!”
“성진아.”
“배 안 고파. 먹기 싫어.”
독한 치료와 환자를 고려한 병원식.
지친 얼굴의 가족들을 본 성진이 가족들에게 화를 내고 이불을 뒤집어쓴 뒤 홀로 우는 장면에서 조정실에 있는 이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수라장을 헤쳐 나온 방송국 사람들의 마음마저 흔드는 성진의 연기에 국장이 감탄했다.
“저 아이, 크흠. 이름이 뭐라고?”
“오지한, 입니다.”
어른의 체면으로 울음을 삼키느라 목이 잠긴 국장과 직원이 대화를 주고받았다.
화면에서 성진이 눈물을 꾹 참고 머리를 깎는 장면이 나왔다.
“성진아. 누나가 무슨 일이 있어도 성진이 꼭 낫게 해 줄게.”
“누나, 투정 부려서 미안해. 잘못, 했어.”
“아니야. 성진이는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
“아파서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