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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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덕대는 두 여자들의 옆으로 가장이 슬금슬금 붙었다.

“해수, 너 학원 숙제는 다 했어?”

“다 했어!”

“여보 애도 고생했는데 오늘 한 번만 봐줘. 당신은 재방송 보고.”

“오늘 중요한 장면인데.”

“해수 엄마. 가끔은 딸이 하고 싶은 것도 좀 들어줍시다.”

홍 여사의 옆으로 다가가면서 아버지가 해수에게 눈빛을 보냈다.

그의 시선을 알아챈 해수가 리모컨을 빼내 채널을 틀었다.

“너!”

“어허이. 해수 엄마. 오늘은 봐 줍시다.”

“헤헤. 고마워요, 아빠! 엄마도 사랑해.”

끝내 리모컨을 사수한 해수가 드라마 로고를 보면서 쿠션을 껴안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드라마나 보자며 홍 여사가 소파에 등을 기댔다.

평화로워진 집안을 보면서 해수의 아버지가 책을 폈다.

다행히 늦지 않았는지 광고가 끝나고 <그 남자, 그 여자>의 로고가 화면에 나타났다.

첫 장면부터 평범한 가정을 보여주는 모습에 홍 여사가 입을 열었다.

“저거 딱 네 미래 모습 같네.”

“아, 엄마!”

“나중에 첫 출근 할 때 네가 어쩌는가 두고 보자.”

“흥. 절대 늦잠 안 잘 거거든?”

미래에 홍 여사의 말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란 걸 모르는 해수가 당당하게 말했다.

제 딸의 말을 무시한 홍 여사는 이내 식탁에 나란히 앉은 부자를 보고 입을 가렸다.

“어머머. 저 집 남정네들은 어쩜 저리 잘생겼데.”

그러면서 화면과 옆에 앉은 남편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는 아내를 보고 해수의 아버지가 헛기침을 했다.

“그러게. 내 동생이 저렇게 생겼으면 업고 다녔다. 그런 의미에서 엄마 아빠 둘째 계획은 없어?”

“그게 어디 내 마음대로 되니?”

“어허흠!”

해수의 아버지가 불편하게 기침을 하며 책을 거칠게 넘겼다.

그러면서 슬쩍 원망 섞인 눈으로 TV에 나온 성아의 가족을 흘겨봤다.

‘하여간! 둘째 가지면 우리 애도 저런 얼굴이 나오려나?’

원망은 원망이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얼굴에 해수의 아버지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그렸다.

드라마는 어느새 성아의 첫 출근을 보여줬다.

회사에 처음 출근해서 겪는 신입의 어리버리한 모습을 보고 그가 자신도 모르게 점점 드라마에 시선을 주었다.

“어머, 어머!”

“꺄악!”

성아와 마찬가지로 회사에 처음 발령받은 재벌 2세를 본 모녀가 입가를 가리며 소리를 질렀다.

아버지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두 주인공들의 만남에 TV를 보던 가족들이 주먹을 꽉 쥐었지만 두 사람의 첫만남은 결코 좋은 분위기가 아니었다.

“박성아 씨? 오늘 첫출근이라고요? 도대체 어떤 사람이 당신을 뽑았는지 궁금하네요. 그 실력으로 어떻게 우리 SY그룹에 입사한 겁니까.”

“…죄송합니다.”

겨우 지각을 면했지만 뛰어오느라 거칠어진 숨소리에 어딘가에 걸려 올이 나간 스타킹.

오너가의 일원인 새 전무님께 최악의 인상을 남겨버렸다.

성아가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새 전무는 그런 그녀를 싸늘한 눈으로 보고 다시 걸음을 옮겨 전무실로 들어갔다.

전무의 타박을 받은 그녀의 앞으로 비서실 실장이 다가왔다.

“성아 씨. 면접 때 성실하다는 평가를 받아서 기대했는데 첫날부터 이게 뭡니까?”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따가 제가 전무님께 보고한 뒤, 다시 얘기합시다.”

“네.”

실장이 성아를 못마땅하게 본 뒤, 혀를 차고 전무실로 들어갔다.

최악이다.

그 이후로는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성아의 고군분투기였다.

지켜보고 있던 해수의 가족들이 성아에게 감정이입해서 울분을 토했다.

“신입인데 실수할 수도 있지.”

“너무해. 왜 아무도 안 도와주는 거야.”

“높은 사람한테 찍혔으니 아무도 친해지려고 하지 않는 거야.”

“그게 뭐예요.”

해수는 자신이 다 억울해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퇴근하고 너덜너덜한 몸으로 집으로 들어간 성아를 가족들이 반겨줬다.

“성아야, 왔어? 오늘 하루 수고 많았어.”

현관에 들어오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엄마의 말에 성아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미진은 깜짝 놀랐지만 자신에게 안겨드는 성아를 두 팔을 벌려 받아냈다.

거실에서 성아를 기다리고 있던 봉만과 성진이 엄마의 품에 안긴 성아를 보았다.

성진이 누나의 우는 모습을 보고 울먹이자 봉만이 아들을 안아들었다.

“흐어어엉.”

성진이 울었다.

아들을 품에 안고 봉만이 현관으로 걸어가자 성아가 엉망이 된 얼굴로 미진의 어깨 너머로 눈만 빼꼼 내밀었다.

아빠의 품에 안겨 우는 동생을 보고 성아가 헐떡이며 말을 걸었다.

“너는 또 왜 우러어어어.”

“누나아 울지 마아아.”

“너도 울지 마아아아.”

서로 울지마라며 우는 남매를 보고 미진과 봉만이 살짝 웃음을 터트렸다.

TV를 보고 있던 해수의 가족들도 눈물을 글썽였다.

“흐으.”

“해수야. 너도 울지마.”

“어음마아아아.”

성아, 성진 남매와 동화되어 엄마의 품에 해수가 안겨들었다.

“어이구. 우리 딸 어떡하지?”

“히끅. 엄마 동생 낳아줘.”

“왜? 나중에 성아처럼 울 때 같이 울려고?”

“히으응.”

아마 성아를 보고 힘들 때 같이 울어주는 동생을 갖고 싶어졌나 보다.

해수의 엄마와 아빠가 서로 시선을 주고받더니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해수의 양옆에 앉아 딸을 안아 주었다.

“엄마 아빠는 우리 딸이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옆에 있어 줄 거야.”

“그래. 앞으로 계속 함께할 거야.”

“우리 딸. 내일도 같이 드라마 볼까?”

“내일도 또 울지도 모르니까.”

“안 울어.”

놀리는 듯한 엄마 아빠의 말에 해수가 엄마의 품에서 눈물을 닦고 고개를 들었다.

괜찮아진 것 같은 얼굴에 두 사람이 웃었다.

딸을 사이에 두고 엄마와 아빠가 말했다.

“내일도 같이 봐 줄까?”

“아빠가 눈 찜질 해 줄게.”

“괜찮다니까!”

해수가 화를 내면서 두 사람의 사이를 파고들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 엄마 아빠 사이를 떠나지 않는 딸을 보고 두 사람이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이러한 반응은 해수의 집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었다.

* * *

“어허허허헝!”

“형, 이제 그만 울어요.”

“여기 휴지.”

아이들과 함께 첫 화를 보던 영훈이 펑펑 울었다.

아마 아직 1년 차인 신입인 자신의 처지와 성아를 겹쳐 본 것 같았다.

지연에게서 휴지를 받아든 영훈이 코를 팽- 풀었다.

‘으 더러워.’

같은 생각을 했는지 지한이도 슬쩍 영훈에게서 물러났다.

우으으응-

몸은 멀리 떨어진 채, 손만 뻗어 영훈의 등을 토닥이던 지연이 진동 소리를 들었다.

어디서 나오는 소리래?

이거 영훈 오빠 폰인가?

“오빠, 오빠. 전화 온 거 아니에요?”

“어, 응? 그러네.”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낸 영훈이 번호를 보고 각 잡힌 자세로 전화를 받았다.

“네! 팀장님. 네! 넵! 지금요? 아니요, 갑니다!”

“형, 어디 가요?”

“지금 일하러 가요?”

“어어. 지금 잠깐 보고 싶다고 회사로 올 수 있냐고 하시네. 늦을지도 모르니까 너희들 먼저 자고 있어.”

“다녀오세요.”

“다녀오세요.”

남매가 차키를 들고 나가는 영훈을 배웅했다.

1년 차 신입에 사장의 명령으로 지한이만 전담하고 있는 영훈 오빠를 부르는 걸 보니 드라마 성적이 꽤 좋은 모양이다.

그러니 지한이 담당인 영훈 오빠를 데려가는 거겠지?

“오늘 영훈 오빠 늦을지도 모르니까 우리 먼저 자자.”

“좋아! 근데 그 전에 대본 더 읽고 자도 돼?”

“5번만 읽고 자는 거다?”

“응!”

누나의 말에 지한이 대본을 가지러 방으로 갔다.

가방에서 다음화 대본을 가져온 지한이 방긋 웃는 얼굴로 대본을 품에 안고 뛰어왔다.

“밑의 집에서 올라온다?”

“아.”

지연의 말에 지한이 까치발을 하고 조심조심 걸어왔다.

그 모습이 귀여워 지연이 꺄르르 웃었다.

“누나, 이거 봐.”

“지한이도 이제 이신성 배우랑 같이 촬영하겠네.”

“응. 처음으로 같이 연기하는 거라 엄청 떨려.”

떨린다고 말하면서도 두 눈이 초롱초롱한 게 절대 밀리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 같네.

좋아, 네가 그렇게 나온다면 누나로서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지한이 네 마음에 드는 연기가 나올 때까지 자면 안 돼.”

“알았어.”

대본을 넘겨 지연이 지한이 나오는 씬을 찾았다.

항상 우리 둘이서 대본 연습을 하는 것을 알고 있는 영훈 덕분에 이번 대본도 각각 1부씩 나눠가졌다.

노랗게 쳐져 있는 지한의 배역을 보면서 지연이 눈을 감았다.

가로등이 켜진 골목.

주택가와 어울리지 않는 외제차.

낯선 차에서 내리는 여자와 남자.

머릿속에서 대본에 적힌 상황을 그리면서 지연이 서서히 눈을 떴다.

눈을 뜬 지연을 보고 지한이 속으로 감탄했다.

역시 누나는 대단해!

눈앞에 재수 없는 재벌 2세 남주인공이 있었다.

“내일 아침에 데리러 올게.”

“괜찮아요. 전무님께서도 피곤하실 텐데 저 혼자 출근할 수 있어요.”

“그러다가 또 저번처럼 지각하는 건 아니겠지?”

“윽, 그날 지각은 안 했어요. 조금 늦게 출근했을 뿐이지.”

“그래. 또 지각할 뻔하지 말고 내일 얌전히 8시까지 나와.”

재벌 2세와 성아 역을 번갈아 가면서 대사를 뱉는 지연을 보고 지한이 바짝 긴장했다.

이제 곧 자신이 대사를 말할 차례였다.

“…누나?”

화들짝 놀라며 자신을 돌아보는 누나를 보고 지한이 마른 입술을 적셨다.

“지한아? 거기서 입술을 핥는 건 좀 안 어울리는데.”

“아.”

입이 말라서 나도 모르게.

시작하자마자 한 실수에 지한이 시무룩해졌다.

“물 마시고 다시 할까?”

“응.”

첫 판부터 실수한 적은 없는데 본인도 실망한 모양인지 축 처진 동생을 보고 지연이 살포시 웃었다.

하여간 귀엽다니까.

부엌으로 가 물을 떠 오면서 지연이 동생을 힐끗 쳐다봤다.

입을 앙 다물고 대본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모습을 보니 오늘 연습은 늦게까지 이어질 것 같았다.

* * *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니야. 어서 앉아.”

문을 열고 허겁지겁 들어오는 영훈을 보고 박 팀장이 영훈을 앉혔다.

회의실에는 이미 배우 2실 박팀장과 홍보팀 한 팀장, 유민 배우의 매니저가 와 있었다.

“김 실장님은 지금 출장 중이어서 내가 나중에 따로 보고드릴거야. 한팀장 바로 시작하지.”

“네. 유민 배우와 오지한 배우가 출연한 드라마 <그 남자, 그 여자> 첫 시청률이 16%를 넘겼다고 합니다.”

“순조롭네. 두 배우 분량은 어떻지?”

“재욱의 비서 역인 유민 배우와 성아의 동생 역인 오지한 배우 모두 분량이 좋습니다. 주인공들과 함께 나오는 장면이 꽤 있다 보니 적지 않은 분량을 챙긴 것으로 보입니다.”

“좋군. 앞으로 두 배우 분량이 어떻게 될 것 같나?”

“회사 에피소드가 이어지기 때문에 유민 배우의 분량은 문제없습니다. 오지한 배우도 나중에 사건의 전개에 있어서 긴장감을 주는 역할이기 때문에 분량이 줄어들 것 같진 않습니다.”

두 매니저와 한 팀장의 보고에 박정현이 미소를 지었다.

다른 지상파의 경쟁 드라마들의 시청률이 순조로웠기에 조금 불안했는데 재욱 역으로 인기 배우를 섭외한 탓에 꽤 선방한 것 같았다.

한숨 놓은 박 팀장에게 홍보팀 한 팀장이 더 좋은 소식을 전했다.

“지금 그남그녀 시청자 게시판 반응이 폭발적입니다. 성아의 모습을 보고 공감했다는 반응과 성진 역을 맡은 아이가 누구냐며 난립니다. 성진이 같은 동생이 갖고 싶다는 글도 많습니다.”

“하하. 우리 오 배우가 한 건 했구만. 내 와이프도 성진이 같은 아들 갖고 싶다고 전화왔어.”

올해로 결혼한 지 5년차, 슬하에 3살 딸 하나 있는 박 팀장이 푸근하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옆에서 유민 배우의 매니저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박 팀장의 말에 그와 함께 회사에서 드라마를 모니터링한 한 팀장이 엄마 미소로 웃으며 대답했다.

“저도 보고 너무 귀여워서 아들 낳고 싶더라니까요.”

“사실 저는 드라마 보다가 울었는데 옆에서 지한이가 토닥여 주더라구요. 덕분에 장가가고 싶어졌습니다.”

“부럽네요.”

“고 매니저는 지금 아이들과 같이 살고 있죠?”

“네, 드라마 촬영 끝날 때까지 제가 돌보기로 했습니다. 서울에 아이들 친척이 없어서요.”

“어머. 나중에 제가 반찬 들고 한 번 가야겠네요.”

“아뇨. 가정부 아주머니가 애들 밥 잘 챙겨주고 있고, 지연이도 생각보다 꽤 요리 잘하더라고요.”

“제가 간다고요.”

“넵.”

아무래도 아이들에게 반찬을 주는 것이 목적이 아닌 것 같지만 홍보팀의 실세인 한 팀장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던 영훈이 순순히 승낙했다.

“앞으로 오 배우 관리 잘해. 우리 회사의 대들보가 될 배우야.”

“넵. 알겠습니다.”

25. 국민 최루탄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다음 날 촬영장에 도착한 남매는 평소처럼 활기차게 인사했다.

“어어. 너희들 왔니?”

“어서 와라.”

한 달 넘게 함께 한 스태프들이 남매를 정겹게 반겼다.

다들 얼굴이 밝은 것을 보니 어제 드라마 반응이 좋아서 그런 모양이었다.

첫 방송 시청률도 좋았고, 밤사이 게시판도 불타올랐다.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남매는 익숙하게 한 쪽에 마련된 분장실로 들어갔다.

“너희 왔니? 오늘도 빠르네?”

“학교 안 가니까 일찍 왔어요.”

“이야. 지연이랑 지한이는 좋겠네.”

분장팀 스태프가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면서 수다를 떨었다.

지연이 스태프한테 필요한 도구를 건네주면서 맞장구를 쳐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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