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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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할 때는 어떻게 저런 애들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엄청난 아이들이 촬영장을 신기하게 쳐다보는 것이 웃겼다.

“지한아 저 사람이 PD님이야. 가서 인사하자.”

영훈이 아이들을 데리고 촬영장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오빠 너무 걱정하지 마시죠.

제가 미리 다 교육시켜 놨어요.

지연이 뒤에서 어깨를 으쓱이며 두 사람의 뒤를 따라갔다.

23. 첫 방영

지한이 카메라 앞에 섰다.

드라마에서 나오는 여주인공의 집을 그대로 옮겨놓은 세트장에 지한과 누나 성아 역의 여배우, 그들의 어머니, 아버지 역을 맡은 중년 배우까지 모두 자리했다.

저들 중에 부모 역을 맡은 중년 배우들은 모두 돌아오기 전까지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배우였다.

‘우와. 저 사람들이랑 지한이가 같이 촬영한다니. 내 동생 너무 대단해.’

스마트폰이 있다면 당장 동영상으로 남기는 건데 스마트폰은 언제 나오더라?

내가 대학 갈 즈음이었던가?

스태프들 사이에 영훈의 옆에 나란히 서서 지연이 지한의 첫 드라마 촬영을 지켜봤다.

“레디, 액션!”

성아가 허겁지겁 방문을 열고 나왔다.

블라우스의 단추를 잠그며 나온 그녀가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말릴 생각도 하지 못하고 부산스럽게 뛰어다녔다.

그를 보며 부엌에 있던 엄마 미진이 버럭 소리쳤다.

“아이고, 정신 하나도 없어!”

“나 늦었어!”

“그러게 어제 일찍 잘 것이지.”

“아, 친구들이 취직 축하한다고 붙잡는 걸 어떡해!”

“시끄러! 북엇국 끓어놨으니까 와서 먹기나 해.”

오늘 첫 출근하는 딸을 위해서 정성스럽게 차린 아침상을 가리키며 미진이 딸을 불렀다.

엄마의 정성도 모르고 성아는 단추를 다 잠그고 머리를 말렸다.

미리 식탁에 모여 출근복을 입은 아빠 봉만과 아들 성진은 수저를 들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부산스럽게 출근 준비를 하는 딸을 보고 미진이 귀를 잡아 식탁으로 끌었다.

“아! 아아아. 엄마. 나 출근해야 해.”

“이 집에서 너만 일하러 가니? 그리고 네 동생 좀 봐라! 일찍 일어나서 식탁에 앉은 걸 좀 봐!”

“쟤는 잠이 없어서 그래. 하여튼 누가 가르쳤는지 새나라의 어린이라니까.”

“너도 새나라의 어린이로 가르쳤어, 이것아. 어쩌다 이런 어른이 됐는지.”

아침부터 싸우는 모녀를 본 부자가 부지런히 젓가락을 놀리며 말했다.

“아들. 너는 나중에 결혼하지 말고 혼자 살아라.”

“응. 아빠. 여자는 무서운 거구나.”

“그렇단다, 아들.”

“여봇!”

“아빠!”

이크! 기가 센 두 여자들의 싸움에 힘없는 아버지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런 아빠를 보고 아들이 동정의 눈으로 쳐다봤다.

‘아빠. 힘내세요.’

‘너밖에 없다, 아들.’

“커엇! 아 다들 너무 좋은데요? 아니 선생님들 우리 드라마 너무 잘 되겠는데요?”

PD가 능청스럽게 열연을 한 배우들을 칭찬했다.

첫 씬부터 순조로웠다.

듣기로는 방송국의 협조도 잘 되고 있고, 배우들도 누구 하나 빠지는 사람들이 없었다.

이름있는 배우들 사이에서 첫 드라마 촬영임이 분명한 어린 배우 역시 세 사람에 뒤지지 않는 모습에 스태프들의 얼굴에서 미소가 걸렸다.

NG 없이 촬영이 이어지면 그들의 퇴근 역시 빨라지는 것이니 좋지 않을 리 없었다.

“자, 다음 씬도 이렇게만 가 주세요!”

“네!”

“이거 유 PD가 우릴 쥐어짜려는 모양인데?”

“선생님도 참. 저는 여러분들을 믿습니다!”

“잠시 메이크업 수정할게요.”

“수정하고 바로 다음 씬 갈게요.”

배우들의 옆에 코디들이 붙었다.

영훈과 지연도 지한의 옆으로 다가갔다.

아직 정식으로 코디가 없는 지한이기에 촬영장에 와서도 분장 스태프의 도움을 받았다.

밥을 먹는 씬이었기에 영훈이 지한의 얼굴을 점검했다.

“화장 조금 지워진 거 같은데. 스태프분께 봐 달라고 해야겠다.”

영훈이 스태프에게 부탁을 하러 갔다.

지연은 지한의 옆에 붙었다.

“지한아 괜찮았어?”

“응! 좋았어.”

“밥 먹으면서 대사하는 데 불편하지는 않고?”

“괜찮아, 조금씩 먹었어. 그리고,”

지한이 주변을 잠시 살피더니 지연의 귀에 속삭였다.

“밥 맛없어.”

동생의 말에 지연이 꺄르르 웃었다.

아이의 웃음에 옆에서 코디에게 메이크업 수정을 받던 아버지 역의 이한재가 남매에게 말을 걸었다.

“아들, 뭐가 그렇게 재밌어?”

한재의 말에 지한이 지연과 시선을 나눴다.

누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지한이 쪼르르 한재의 옆으로 다가가 귓가에 속삭였다.

“솔직히 밥 맛없어요.”

그 말에 한재도 웃음을 터트렸다.

옆에서 코디가 수정 중이라며 웃지 말라고 말했다.

경력이 오래된 배우답게 금세 표정을 수습한 한재가 지한에게 똑같이 대답했다.

“아빠도 그래. 아들, 우리 점심은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점심 나가서 먹어요? 누나랑 같이 도시락 싸왔는데.”

촬영이 어떻게 될지 모르고 혹시나 촬영이 길어지면 밥 때를 놓칠까 봐 아침부터 일어나 가정부 아주머니랑 김밥을 싸 왔다.

지한이랑 둘이서 먹으려 했는데.

살짝 불만 어린 그 시선을 느낀 건지 한재가 지연의 눈치를 봤다.

“누나랑 같이 먹고 아빠랑은 다음에 같이 먹을까?”

“김밥 싸왔는데. 누나 다 같이 먹자. 그래도 되지?”

“물론이지.”

이것도 사회생활이다.

동생을 위해서 이 정도는 할 수 있지.

양이 모자라면 영훈 오빠한테 컵라면 사 달라고 해야겠다.

누나의 대답에 활짝 웃은 지한이 한재에게 누나랑 김밥을 싼 일화를 자랑했다.

그래도 지한이를 귀여워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야.

저 배우는 나중에도 큰 논란 없이 연기를 계속하는 배우기도 했고, 재벌 회장님, 주연들의 아버지, 최종 보스 등 연기 스펙트럼도 넓었다.

“지한아! 여기 스태프분 데려왔어.”

“죄송해요, 바로 왔어야 했는데. 오지한 배우 메이크업 수정하겠습니다.”

입가를 닦고 빠르게 지한의 메이크업을 수정하는 스태프의 손길을 지연이 유심히 쳐다봤다.

영훈 오빠한테 이따가 화장품 가게 좀 들리자고 해야겠다.

이래 봬도 미래에서 뉴튜브로 화장하는 법 좀 배웠단 말씀.

“직장인 화장법이지만 지한이한테도 잘 어울리겠지.”

어린애한텐 투명 메이크업이 제일 잘 맞을 거다.

흠흠.

* * *

“누나 잘 다녀와!”

구두를 신고 현관을 나서려는 성아의 뒤로 성진이 배웅했다.

“오냐! 다녀올게!”

구두를 대충 신고 성아가 집을 나섰다.

현관문이 거칠게 닫혔다.

“컷! 오케이! 다들 식사하러 갑시다!”

첫 씬부터 순조로웠다.

한 번의 촬영으로 오케이를 받은 배우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배우들의 열연 덕분에 스케줄이 밀리는 것 없이 촬영이 무사히 끝났다.

덕분에 밥 먹으러 가는 이들의 얼굴이 전부 밝았다.

“선생님, 선생님! 빨리요.”

어느새 친해졌는지 지한이 한재에게 손짓했다.

촬영장 한 편에 마련된 대기실에 미리 도시락과 물, 컵라면이 세팅되어 있었다.

지연이 미리 촬영 스케줄을 물어서 영훈에게 준비하자고 말한 덕분이었다.

“이야. 김밥에 컵라면이라니 정말 소풍이라도 온 기분인 걸?”

“누나가 요리 잘해요. 가정부 아주머니랑 같이 만들었어요.”

“지한이 네가 말하던 계란말이 김밥이란 거 먹을 수 있는 거니?”

“네! 맛있어요!”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을 보고 지연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훗, 아침부터 가사 도우미 아주머니랑 열심히 만들었지.

아직 어리다면서 부엌에 오지 말라고 하던 아주머니도 내 뛰어난 미각과 라면을 끓이는 솜씨를 보고 옆에서 요리 돕는 걸 허락했다.

엣헴!

잠시 자신의 활약을 떠올린 지연이 종이컵에 물을 따라 각자의 앞에 놔 주고 자리에 앉았다.

“자, 드세요!”

“이거부터 먹어 봐요.”

“이 계란 옷 입은 김밥 말이지?”

“네! 그 다음에는 유부초밥이랑 참치김밥이랑.”

“알았다. 네가 말한 대로 먹을 테니 너도 먹어야지.”

“그, 지한이 누나라고 했지? 이름이.”

“지연이에요.”

“그래. 미안한데 아저씨 매니저랑 코디도 같이 먹어도 될까?”

그 말에 지연이 뒤에 서 있는 두 사람을 쳐다봤다.

호화로운 도시락에 입을 벌리고 침을 떨어트릴 것 같은 두 사람이 보였다.

뭐, 지한이 도와줄 배우님 스태프니까. 인정!

“좋아요. 그런데 컵라면은 없는데.”

“제가 지금 당장 사오겠습니다!”

매니저로 보이는 아저씨가 뛰어갔다.

코디 언니가 자신은 싱라면이라고 말하는 게 들렸다.

“어머, 이거 진짜 맛있다.”

“그쵸?”

도시락 준비하면서 미리 맛본 지한과 영훈이 뿌듯하게 말했다.

준비한 건 나랑 아주머닌데 왜 두 사람이 으쓱이는지 모르겠다.

“냠.”

맛있당.

도시락통에 담긴 계란말이김밥, 참치김밥, 유부김밥, 기본 김밥을 허겁지겁 먹는 사람들을 보고 지연이 지한의 컵에 물을 따라주었다.

“천천히 먹어.”

“응!”

지한이 물을 꼴깍꼴깍 마셨다.

김밥을 우걱우걱 먹고 있던 이들이 웃으며 두 아이를 보았다.

“지한이도 대단한데 지연이도 대한하네.”

“제가요?”

“아직 어린데 얌전히 지한이 촬영하는 거 기다리고, 밥 먹는 것도 옆에서 챙기고, 요리도 이렇게 잘 하잖아.”

“아직 칼은 못 써요.”

“그건 위험하지.”

한재가 허허허 웃으면서 두 아이를 칭찬했다.

지한이 유부초밥을 먹다말고 누나를 자랑했다.

“있잖아요. 우리 누나는요, 머리도 엄청 좋고, 예쁘고, 요리도 잘해요. 모르는 게 없고, 또 제가 연기하다가 모르는 것도 가르쳐줘요.”

“호오? 지한이 누나는 정말 대단하네. 연기도 한단 말이지?”

연기란 말에 한재의 눈빛이 달라졌다.

오늘 지한의 연기도 배울 점이 있는 연기라고 생각했다.

한 순간에 배역에 몰입하는 집중력, 성진에서 지한으로의 빠른 전환, 상대방을 자신의 연기로 빨아들이는 흡인력.

이 아이는 대배우가 될 재능을 지닌 아이였다.

그런데 이런 아이를 가르쳤다고?

연기 선생 없이?

“지연이는 연기에 관심이 없니?”

“아직은요. 저는 지한이 연기 보는 게 좋아요.”

“아직이란 말이지.”

여지가 있는 말에 한재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 웃음을 보고 지연의 등골이 오싹했다.

뭐지, 나 지금 지뢰 밟은 것 같은 기분인데.

누군가의 사냥감이 된 것 같은 예감에 지연의 경계심이 올라갔다.

“라면 사왔습니다! 앗! 김밥 거의 안 남았잖아요?”

“아, 미안미안.”

“미안해요, 오빠. 너무 맛있어서 나도 모르게.”

라면 사러 갔다 오느라 자리를 비운 한재의 매니저가 울상을 지었다.

중년 아저씨의 처량한 얼굴을 본 지연이 자신도 모르게 내일도 도시락을 싸오겠다며 매니저를 달랬다.

비록 김밥은 잃었으나 내일 점심을 약속받은 매니저가 활짝 웃으며 라면을 먹었다.

* * *

“지연아. 오늘은 도시락 뭐 싸왔니?”

“오늘은 김치볶음밥이요.”

“캬. 계란 후라이는?”

“당연히 올렸죠.”

한재가 엄지를 척 올렸다.

지나가던 스태프들이 그 대화를 듣고 고프지도 않은 배를 쓸었다.

얼핏 오늘 점심은 김치볶음밥을 먹는다는 얘기를 한 것 같았다.

지난 한 달간, 지연은 지한이 못지않게 촬영장의 유명인이 되었다.

아직 코디가 없는 지한이 분장 스태프에게 며칠 메이크업 받는 것을 보더니 어느 날부터 자신이 직접 지한의 메이크업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어린애가 무슨 화장인가 했더니 생각보다 꽤 잘하는 모습을 보고 분장 스태프와 붙어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요리 솜씨는 얼마나 좋은지 가사 도우미와 함께 준비한 도시락은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 심기가 불편했던 배우의 마음까지 풀어놓았다.

연기력이 뛰어나 촬영하는 씬마다 일찍 끝내버리는 연기 천재 동생에 다방면으로 재주가 뛰어난 누나라니.

스태프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지 않을 리 없었다.

가끔 과하게 준비해 도시락이 남을 때면 지나가던 스태프들한테 나눠주기도 했는데 그 때문인지 대기실 주위를 얼쩡거리는 스태프들이 늘었다.

“자자. 여러분 드디어 내일입니다. 다들 오늘 촬영 일찍 끝내고 일찍 들어갑시다!”

와아!

첫 방영을 앞두고 스태프들이 활기가 넘쳤다.

그도 그럴 게 이번 드라마는 정말 자신이 있었다.

대본도 대본이지만 배우들의 연기 합도 좋았다.

“영훈 오빠, 오늘 지한이 언제 촬영해요?”

“으음. 일단 3시쯤인 거 같던데.”

출연하는 씬이 한 화에 몇 장면 안 되는 만큼 지한의 대기 시간은 길었다.

그래도 지한은 아침부터 나와 있었다.

신인인 데다가 연기 경력이 짧은 지한에게 좋은 교습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스태프들에게도 좋은 눈도장을 찍었으니까 손해 볼 건 없지.

“누나, 회사 생활이란 건 힘든 거구나.”

여주인공인 성아의 근무 씬을 찍는 것을 본 지한이 누나에게 작게 말을 걸었다.

“지한아 뭐든 돈을 버는 건 쉽지 않은 일이란다. 우리가 대사 연기하는 것도 오래 연습해서 나온 거잖아?”

“응!”

“그거랑 똑같은 거야. 다 돈 벌려고 그러는 거지.”

“그렇구나.”

지한이 혼자 고개를 주억거리며 팔짱을 꼈다.

어설프게 삶의 고뇌를 안 것 같은 행동을 흉내 내는 지한을 보며 지연이 동생의 등을 토닥였다.

내일 첫 방영이랬지?

영훈 오빠도 같이 보자고 해야겠다.

24. 남동생 열풍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은 시기에 드라마 <그 남자, 그 여자>가 방영됐다.

“리모컨 건들지 마라.”

“아, 엄마!”

“씁.”

“우리 오빠가 나온 드라마 오늘 첫 방송이란 말이야!”

홍 여사의 하나밖에 없는 딸이 리모컨을 두고 홍 여사와 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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