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팅 장소에 팀장님도 와 있을 겁니다.”
“보통 이런 자리에 팀장도 나오나요?”
“일반적인 신인한테는 팀장이 붙지 않죠. 지한이니까 오신 겁니다.”
이제야 영훈이 말한 빵빵한 지원의 정체를 안 준호가 환한 얼굴을 했다.
우리애가 어디 가서 이런 대우를 받는 건 환영이었다.
“저깁니다.”
영훈이 우아한 한옥 건물을 가리켰다.
22. 작가와의 미팅
이런 곳은 처음이야.
지한의 손을 잡고 매니저의 뒤를 따르는 지연이 건물 내부를 둘러보며 감탄했다.
이렇게 커다란 한옥에 자격증이 벽 가득히 걸려 있는 집은 처음 와 봤다.
고개를 바쁘게 움직이는 아이들을 보며 영훈도 같은 심정이었다.
이야. 내가 이런 델 다 와 보네.
톱스타를 맡게 되면 와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서울 상경한 촌놈처럼 세 사람이 식당을 구경하고 있을 때, 방에서 나와 있던 박 팀장이 손을 흔들었다.
“여기야!”
“박 팀장님이다. 얘들아 저기로 가자.”
“네에.”
“네!”
룸으로 들어간 세 사람을 박 팀장이 반겼다.
맞은편을 비워놓고 자리에 앉은 박 팀장과 세 사람이 통성명을 했다.
“안녕? 처음 보지? 아저씨는 박정현이라고 해. 박 팀장이라고 부르면 돼. 네가 지한이지?”
“안녕하세요!”
“네가 지연이고.”
“안녕하세요.”
목소리만 듣고 처음 보는 아이들의 얼굴에 박 팀장이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왜 사장님이 보석이라고 하는 줄 알겠다.
실장님한테 듣기로는 연기력도 장난 아니라던데 얼굴이 완전 미남 배우 뺨치게 생겼네.
크면 장우성 뺨치게 잘생길 것 같은데.
누나 쪽도 장난 아닌 걸?
혹시 연예계에 관심이 있으려나?
자신을 보고 묘한 시선을 보내고 있는 박 팀장을 보고 지연이 모르는 척 물을 마셨다.
저 아저씨 당장 나랑 계약하고 싶어 하는 눈치네.
죄송하지만 저는 동생 돌봐야 하거든요?
똑똑.
“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단발머리를 하고 안경을 쓴 여성과 단정한 옷차림의 남성이 들어왔다.
박 팀장이 일어나자 덩달아 앉아있던 세 사람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십니까, 김 작가님. 최 대표님도 오랜만입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남매가 활기차게 인사했다.
그 모습에 김 작가와 최 대표가 저절로 미소를 지었다.
“박 팀장님이 말한 아이가 이 아이들이군요. 정말 예쁘고 잘생겼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탑엔터가 왜 이 아이들과 계약했는지 알겠어요.”
“하하. 앞으로 저희 회사 보배가 될 아이들입니다.”
은근슬쩍 자신까지 끼워 넣는 박 팀장을 지연이 흘겨봤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은 듯이 방긋 웃었다.
가벼운 인사가 오가고 드디어 모두가 자리에 앉았다.
“지한 군 프로필을 봤습니다. 아직 개봉되거나 방영한 작품이 없다면서요?”
“네. 하지만 저희가 아무 배우와 계약하지 않는다는 거 아실 거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더 놀랍죠. 지한 군의 연기 무척 기대돼요.”
“저도 지한 군의 연기를 빨리 보고 싶어서 이렇게 김 작가를 따라왔습니다.”
이거 아직 밥도 안 먹었는데 벌써 연기를 보여 달라고 하네.
히죽.
지연이 고개를 돌렸다.
지한이 지연과 눈을 마주쳤다.
‘보여줄까?’
‘응.’
현장에서 캐스팅되는 일이 흔치 않은 일인 데다가 누군가에게 정식으로 연기를 배운 적은 없었다.
하지만 지한은 감정을 연기할 수 있었다.
대사에 감정을 담을 수 있었다.
이건 지한이 오롯이 가진 재능이었다.
그리고 목소리의 축복으로 재능을 얻은 지한이 지연과 같이 대사를 연습했다.
지한이가 눈을 감았다 떴다.
“누나 나 숙제 좀 도와줘.”
지연이 대사를 받아쳤다.
“누나 피곤해.”
자연스럽게 받아준 지연을 보고 박 팀장과 김 작가의 눈에 이채를 띠었다.
아이의 대사에서 일에 치여 피곤에 찌든 직장인이 보였다.
“아이이이잉.”
“하지 마라.”
“누나, 누나, 누나, 누나, 누나.”
“아! 좀 저리가!”
“칫.”
지한이 몸을 돌리다가 고개를 다시 원래대로 홱 돌렸다.
“근데 누나 미안. 지갑에서 5000원만 빼 갈게.”
“야아!”
사랑을 많이 받은 막내답게 귀엽게 보채는 성진을 보고 있던 이들의 광대가 절로 올라갔다.
지연의 고함을 끝으로 두 사람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대본에 적힌 성진과 누나 성아였던 두 사람이 다시 지한과 지연이 되었다.
배역에서 벗어난 두 사람을 본 어른들이 박수를 쳤다.
“이번이 첫 드라마라면서요?”
“세상에 이렇게 빨리 배역에 몰입하다니. 지한 군 7살 맞아요?”
“저 조금 있으면 초등학생이에요!”
당당하게 말하는 그 모습에 김 작가의 광대가 또 올라갔다.
“그런데 지한아. 아, 말 편하게 해도 될까?”
“네, 작가님.”
“어머? 그래. 지한이라고 할게. 성진이가 나중에 아프다는 거 알고 있지?”
“알아요.”
“그럼 아픈 연기 한 번 보여줄래?”
“네!”
지한의 대답에 박 팀장과 영훈이 미소를 지었다.
자신들도 그동안 들은 게 있었다.
이 미팅을 가장한 오디션이 성공적으로 끝나리란 확신이 들었다.
* * *
김은영은 자신도 모르게 고인 눈물을 휴지로 찍었다.
옆을 보니 고개를 들고 있는 뿜엔터테인먼트 대표가 보였다.
눈시울이 붉어진 게 그도 지한의 연기를 보고 우는 게 분명했다.
은영이 물을 마시고 잠긴 목을 풀었다.
“왜 박 팀장님이 지한군을 데려왔는지 알 것 같네요.”
휴지를 붙잡고 눈가를 찍던 이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어른 넷이서 휴지로 눈물을 닦고 있는 모습이 희극을 보는 듯했다.
‘어른들이 짜는 거 극혐.’
지연이 질린 얼굴을 했다.
지금이야 조금 진정된 얼굴이지만 아까 지한이가 몸을 웅크리고 쓰러질 때 다들 입을 틀어막았다.
영훈 오빠는 콧물도 삼키는 거 같던데.
“크흠! 촬영은 12월 초에 시작할 겁니다. 그때까지 지한이 힘낼 수 있지?”
“네!”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이는 지한을 본 박 팀장이 덩달아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지한을 바라봤다.
“그래. 지한이 넌 연기만 집중해. 나머지는 아저씨가 알아서 할게.”
“감사합니다.”
“아니야, 아저씨가 더 고마워.”
“왜요?”
“지한이 너무 멋진 연기를 보여줘서.”
잘은 이해할 수 없지만 내 연기를 좋아하나봐.
지한이 히히힛 하고 웃으며 힘낼 거라고 방방 뛰었다.
촬영이 시작하기까지 앞으로 6개월.
아이의 연기가 브라운관에서 나오는 그날이 기다려졌다.
* * *
날이 흘러 벌써 11월이었다.
김 작가와 미팅을 한 게 여름이었는데 벌써 외투 없이는 나갈 수 없는 계절이 되었다.
지연은 지난 한 학기 동안 지한이 성진을 완성시킬 수 있도록 도왔다.
이미란이 이혼 소송에서 이겨 오형우와 갈라서게 된 것도.
재산을 분배하면서 빚도 나누게 되어 이미란이 날뛰었던 것도.
지한의 장래를 위해서 세 식구가 서울로 이사 준비를 하는 것도.
모두 신경 쓰지 않았다.
아직은 이미란이 보호자로서 쓸모가 있으니 그 일은 모두 이미란에게 맡겼다.
뭐, 내가 알아도 초딩의 몸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없기도 했고.
“지한아 거기서 왜 누나한테 투정을 부렸어?”
“마지막이니까. 앞으로는 가족들한테 투정 안 부리기로 했으니까 마지막으로 떼썼어. 이상해?”
“아니야. 너무 좋아서. 우리 지한이 너무너무 잘했어.”
“히히. 정말?”
“정말.”
누나의 칭찬에 지한이 엉덩이를 들썩이며 손을 움직였다.
자신도 모르게 크게 손을 움직이며 말하는 동생의 머리를 지연이 마구 흩트렸다.
“아이, 누나 하지 마.”
“오구오구. 귀여워, 멋져. 잘생겼어. 연기도 잘해!”
“누나아.”
지연이 동생의 볼을 잡고 쪽쪽 뽀뽀를 했다.
입으로는 싫다는 듯이 누나를 부르면서 동생의 몸은 솔직해서 엉덩이가 바닥에 붙어있지 않았다.
발가락과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동생이 슬쩍 누나의 입에 볼을 들이댔다.
솔직한 몸의 언어에 지연이 꺄르르 웃으며 동생을 꼭 껴안았다.
“지한이는 멋진 연기자야.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널 좋아할 거야.”
누나가 꼭 그렇게 만들어줄게.
* * *
며칠 뒤. 지한의 매니저 영훈이 아이들을 데리러 왔다.
“안녕하세요. 지연이, 지한이도 안녕?”
“안녕하세요. 직접 보는 건 처음이네요.”
“영훈 오빠, 안녕.”
“형, 안녕!”
지한이의 촬영이 얼마 남지 않아 미리 서울로 올라가기로 했다.
방학 전에 약 한달 넘게 빠지기로 했는데 이미란이 선생님과 말을 잘 끝냈다고 한다.
“지연이도 같이 가는 거지?”
“네!”
“지한이가 누나랑 떨어지는 걸 싫어해서. 미안해요.”
“아닙니다. 남매간의 우애가 보기 좋은걸요.”
아이가 배우인 경우 촬영장에 가족이 함께 하는 것도 없는 얘기는 아니었다.
보통은 아이의 엄마가 동행하는 일이 많지만.
영훈은 생각을 멈췄다.
지한이의 가정사에 대해서는 대략 언질 받은 내용이 있었다.
살인미수 피해자인 아역 배우에 대한 찌라시를 들었기도 했고.
“그럼 우리 애들 잘 부탁드립니다.”
“네! 자주 연락드리겠습니다.”
영훈이 아이들을 차에 태웠다.
커다란 짐 가방을 트렁크에 싣고 마지막으로 미란에게 인사한 영훈이 차를 출발시켰다.
* * *
아이고, 허리야.
장시간 이동은 역시 좋지 않아.
온몸이 다 찌뿌둥하네.
“자! 여기가 너희들이 머물 곳이야.”
“…아무것도 없어.”
“형, 우리 진짜 여기서 자요?”
조금 작은 쓰리룸을 본 지한과 지연이 눈을 깜빡이며 감상을 늘어놨다.
아이들의 짐 가방을 현관 입구에 내려놓은 영훈이 아무렇지 않은 듯이 말했다.
“원래 여기 다른 형, 오빠들이 쓰고 있었는데 지금은 다른 데 갔어.”
다른 데라니.
짤렸나!?
“잘돼서 다른 숙소 갔어.”
“아하.”
“그 형들이 누군데요?”
“MAX.”
아 그 그룹?
나도 얼핏 들어본 적 있는 그룹이다.
확실히 내가 들은 기억이 있을 정도면 꽤 잘나갔을 거다.
나중에 어떻게 됐는지는 나도 어릴 때여서 기억이 없네.
“여기서 촬영 끝날 때까지 먹고 자고 할 거야.”
“서울에서만 촬영하는 건 처음이에요!”
“다른 배우들은 야외 촬영이 있긴 하겠지만 지한이는 대부분 실내에서만 촬영할 거야.”
“오! 그건 좋다. 지한아 잘 됐지?”
“응. 밖에 추워.”
희소식에 남매가 환하게 웃었다.
안 그래도 따뜻한 남쪽에서 차가운 북쪽으로 오느라 움츠러들었던 몸이다.
추운 건 딱 질색이야.
“촬영 스케줄 나왔어.”
“언제예요?”
“12월 3일.”
지한이의 첫 드라마 <그 남자, 그 여자>의 촬영 스케줄이 나왔다.
* * *
영훈이 아이들을 데리고 KBC에 방문했다.
방송국에 온 게 처음이야. 신기해!
“얘들아 내 손 꼭 잡아야 해.”
“네.”
“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이미 다른 곳에 한눈을 팔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는 아이들이 길을 헤매지 않도록 영훈이 손을 꼭 잡았다.
오늘은 12월 3일. <그 남자, 그 여자>의 첫 촬영이 있는 날이다.
비로 적은 분량이지만 지한이는 1화부터 등장한다.
여주인공의 동생 역할이니까 당연한 일이겠지만.
세트장도 거대했다. 여주인공의 집, 방, 거실. 저쪽은 회사처럼 보이는 곳이네.
인형의 집 같은 세트장을 보고 지연과 지한이 입을 벌렸다.
“우와아.”
“호오.”
<오싹한 집>에서 추가 촬영 할 때도 세트장에서 촬영했지만 그땐 추가 촬영이라서 이곳처럼 많은 세트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이게 본격적인 촬영 현장이구나.
눈을 반짝이며 감탄하는 아이들을 보고 영훈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