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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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아빠가 많으면 좋아?”

“음… 준호 오빠랑 세은 언니가 우릴 챙겨주는 느낌이라고 생각해. 아니면 할머니랑 할아버지를 떠올려도 좋아.”

“아.”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지한을 보고 지연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란이랑 오형우 같은 부모를 만나서 고생한 것은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이런 평범한 가정을 상상하는 것에도 지한은 어려움을 겪었다.

어른들은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아이들도 다 안다.

드라마 속에서 묘사한 가정을 상상할 때 집에서 가족들끼리 어떠한 일상을 보내는지 지한은 몰랐다.

지연은 막연하게 상상하던 가정을 그리며 지한이와 캐릭터 성진의 가족들을 설정하기 시작했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우릴 좋아하잖아.”

“맞아. 맨날 오면 먹을 거 계속 줘.”

“그게 다 우릴 좋아해서 그러시는 거야.”

“히히힛. 나도 할머니 할아버지 좋아해.”

할머니랑 할아버지를 생각하기만 해도 기분이 좋은지 지한이 계속해서 웃음을 흘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지한이 네가 아픈 거야.”

“지난번에 아저씨들 앞에서 연기한 것처럼?”

“음. 그거보다는 덜 아플지도 모르지만 설명하자면 지한이 네가 놀이터에서 놀다가 갑자기 어지럽고 토할 거 같아진 거지.”

“나 엄청 놀랐겠다.”

“맞아. 갑자기 왜 이러는지 모르니까 놀랍고 조금 무섭기도 할 거야.”

자신이 쓰러진다면 할머니랑 할아버지가 엄청 슬프겠지?

그건 싫은데.

지한이 서서히 성진의 감정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몰입하는 동생을 보고 지연이 조언을 했다.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죽을 거란 얘기를 들으면 5단계 감정을 거친대.”

“5단계?”

“감정이 변하는 거야. 처음에는 그럴 리가 없다고 부정하지. 그러다가 화를 내. 그 다음에는 타협을 하게 되지.”

“타협?”

“음. 아마 내 죽음을 관리하는 자와 타협하려고 하지 않을까? 1년만 더 살게 해주세요. 같은 거라든가?”

“저승사자한테 부탁하는 거야?”

“그럴지도?”

지한이 이해하기 쉽게 적절한 예시와 비유를 들어가면서 지연이 마저 설명했다.

“그다음에는 우울해져. 저승사자는 봐주거나 하지 않거든.”

“…못됐어.”

“그러다가 진짜. 진짜 마지막에는 받아들이는 거야. 내가 곧 죽는다는 걸.”

누가 정리한 의견인지는 모르지만 어렴풋이 알고 있는 죽음의 5단계를 알려준 지연이 지한의 머리를 쓸었다.

죽는다는 게 뭔지 아직 와닿지 않을 나이었지만 이 설명으로 성진이란 캐릭터가 어떤 심정인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누나 그다음은?”

“그건 대본이 나와 봐야 알겠는데?”

사실 4화까지만 해도 동생이 아픈 장면은 등장하지 않으니까.

남주랑 여주가 투닥이는 장면이랑 여주가 집에 와서 하소연하는 장면이 거의 다였다.

그러다가 5-6화쯤부터 사건이 전개되고 9-10화 정도 되면 사건의 절정이지 않을까?

11화부터 주인공들의 반격이 시작되고 15-16화에 해피 엔딩으로 끝.

“드라마 한 편 다 본 기분인데.”

“응? 누나 뭐라고 했어?”

“아니야. 아무것도. 그럼 여기 성진의 기분을 상상하면서 대사 읽어볼까?”

“누나가 다른 사람들 대사 읽어줄 거지?”

“물론이지.”

동생을 위해서라면 1인 12역도 할 수 있다.

그게 우리가 하는 놀이기도 했고.

지연이 대본의 첫 장을 넘겼다.

21. 매니저 고영훈

“얘들아, 오빠 왔다.”

준호가 손에 치킨을 들고 할아버지 댁에 방문했다.

다음 학기 복학 준비로 바쁜 그가 이렇게 할아버지 집을 자주 찾는 이유는 동생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방에서 숙제를 하고 있던 아이들이 준호의 목소리에 뛰어 나왔다.

“오빠아!”

“형아!”

그의 손에 치킨집 로고가 찍힌 봉투가 들려있는 것이 보이자 아이들이 온몸으로 준호에게 안겼다.

아싸! 치킨!

치킨은 진리지!

묵직한 동생들을 힘겹게 받은 준호가 겨우 중심을 잡고 섰다.

“준호 왔나?”

“네, 할머니.”

방에 있던 할머니가 준호를 반겼다.

아이들을 떨어트리고 준호가 마루에 앉았다.

“자, 너희들은 치킨 먹고 있어, 오빠는 할머니랑 얘기 좀 할게.”

“응!”

“알았어.”

아이들이 치킨 봉지를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할머니랑 무슨 얘기를 하려고 그러는 거지?

준호와 할머니를 놔두고 아이들이 방에 들어왔다.

지연이가 봉투를 열고 치킨을 꺼냈다.

“자, 닭 다리 하나씩 나눠 먹자.”

“그러면 형이 먹을 게 없잖아.”

“괜찮아. 오빠는 다른 거 주면 돼.”

“으음. 알았어!”

설마 어린 동생들이 닭 다리 좀 먹었다고 때리겠어?

물론 돌아오기 전에 동생이 혼자 닭 다리 다 처먹었으면 바로 로우킥감이지만.

혹시 모르니 후딱 먹어 치워야지.

두 사람이 경쟁적으로 치킨을 해치우기 시작했다.

드르륵-

“너희들….”

누가 뺏어먹는 것도 아닌데 허겁지겁 치킨을 먹고 있는 모습에 준호가 복잡한 얼굴을 했다.

뭔가 안타까우면서도 슬프고, 또 화도 난 것 같은 얼굴.

지연과 지한이 준호의 눈치를 봤다.

“누가 뺏어먹어? 천천히 먹어. 마실 것도 좀 먹고. 할머니가 냉장고에 식혜 있다던데 그거 마실래?”

끄덕끄덕

끄덕끄덕

입 안 가득 치킨을 물고 있는 아이들이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 모습에 다시 한번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한숨을 삼키며 준호가 몸을 돌려 부엌으로 향했다.

우물우물

“화 안 났나봐.”

“다행이다.”

“그치?”

빠르게 턱을 움직인 아이들이 준호의 뒷모습을 보고 서로를 마주보며 말했다.

오빠는 치킨 안 먹어도 되나봐.

지연이 살이 많은 부위를 골라 지한에게 건넸다.

누나가 건넨 치킨을 받아든 지한이 행복한 얼굴로 치킨을 물었다.

그래, 많이 먹어라.

드르륵-

또 방문이 열렸다.

준호가 쟁반에 컵이랑 식혜를 들고 왔다.

아니 그걸 통째로 들고 왔네?

도대체 우리가 얼마나 먹을 거라고 생각한 거야.

식혜를 따라 남매들에게 각각 컵을 분배한 준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먹으면서 들어. 오빠가 오디션 관련해서 팀장님께 물어보고 왔는데 팀장님이 작가님이랑 미팅하기로 했대.”

“미팅이 뭐야?”

“작가님이 지한이가 어떤 사람인지 보고 싶대. 지한이 작가님 앞에서 연기 보여줄 수 있겠어?”

“응!”

“그래. 작가님 미팅은 다음 주래. 팀장님 말로는 지한이 뽑히고 나면 주요 배역 캐스팅은 거의 다 끝난대.”

“그러면 어떻게 되는데?”

“음. 촬영 시작하겠지? 드라마니까 아마 TV에서 빠르게 볼 수 있을 거야.”

“우와! 누나 나 TV에 나온대!”

“대단해!”

남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방방 뛰어다녔다.

“먹을 거 앞에서 먼지 날리는 거 아니야.”

준호가 남매들을 제압해 자리에 앉혔다.

강제로 자리에 앉혀졌어도 들뜨는 몸을 억누를 수 없는지 두 아이가 엉덩이를 들썩였다.

“이번까지는 오빠가 따라갈 거야.”

“이번까지는?”

“다음에는 안 가?”

남매가 장화 신은 고양이 같은 얼굴로 준호를 올려다봤다.

“오빠도 복학해야 하지 않겠니?”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얼굴로 준호가 단호하게 거절했다.

칫-

유능한 보호자였거늘 아쉽게 됐다.

* * *

“그럼 오늘 회의 시작하지. 배우 1실부터 시작해보지.”

“네. 우선 정승우 배우의 영화 <오싹한 집> 촬영이 끝났고, 후반작업에 들어갔습니다. 한 달 쉬었다가 그 다음 달 차기작에 들어갈 겁니다. 민세라 배우의 <여우누이전>은 시청률 30% 넘겼습니다.”

“몇 화 남았지?”

“4화 남았습니다.”

“40은 못 넘겠군.”

“그렇게 예상하고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주민이 대략적인 전망을 예측했다.

배우 1실의 브리핑이 끝나고 배우 2실의 차례가 왔다.

“배우 2실에서는 이번 달 배우 오지한 군을 새로 영입했으며 김은영 작가의 차기작 <그 남자, 그 여자>에 유민 배우와 함께 출현할 예정입니다. 최시우 배우는 현재 <못 말리는 왕가네>에서 인지도를 확보해 여러 작품들이 들어오는 추셉니다.”

“오지한 배우 출연 확정됐나?”

“그건 아직 입니다만 다음 주에 작가님과 미팅하기로 했습니다.”

2실장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팅을 잡기로 한 것만으로 배역이 확정된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들이 봤던 지한의 연기라면 김은영 작가도 납득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 아이들을 데리러 가는 건 누가 하기로 했지?”

“막내가 데리러 가기로 했는데, 준호군이 이번에도 자신들이 알아서 서울로 온다고 했습니다. 대신 촬영이 시작하고 나서는 매니저가 데리러 와 줬으면 한다고 말했습니다.”

“좋아. 막내에게는 이번에 올라오면 옆에 잘 붙어있으라고 해.”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

“네, 가수 1실에서는….”

실장들의 브리핑을 받는 중이었지만 주민의 머릿속에는 다음 주에 오기로 한 지한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

지한이 배역에서 떨어질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만일의 일에 대처하기 위해 김 작가의 취향을 알아두기로 했다.

* * *

“음, 흐흠. 음.”

“지한아 무슨 노래 부르는 거야?”

“응? 아무 노래도 안 불렀는데.”

그러면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콧노래를 부르는 지한을 준호가 내버려뒀다.

흐흥, 음, 으음.

흠, 으음, 흐음.

아무 노래도 안 부른다면서 둘이서 하모니를 이루는 콧노래를 들으면서 준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나중에 무슨 노랜지 직접 찾아봐야겠다.

생각보다 뛰어난 동생들의 콧노래에 준호가 자신도 모르게 멜로디를 따라했다.

“어? 휴게소다.”

“형, 나 화장실.”

“그래.”

“오빠 핫도그 먹어도 돼?”

“지연이 넌 화장실 안 가도 돼?”

“화장실도 가고 핫도그도 먹으면 안 돼?”

“그래… 다 해라.”

어쩔 때는 어른같이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다가도 이렇게 어린애다운 투정을 부리는 동생을 보면

‘아직 어린 아이가 맞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한아 오늘 가면 바로 작가님 미팅 있는데 할 수 있겠어?”

“응! 누나랑 연습 많이 했어.”

“그래. 형이 봤을 때 지한이 정도면 충분히 작가님이 좋아할 거야.”

“만약에 작가님이 지한이 싫어하면 어떡해?”

“글쎄. 우리 지한이가 빠지는 게 없는데 싫어할 이유가 없지. 얼굴이 못났어, 연기를 못해, 성격이 안 좋아. 이 형이 봤을 때 그 작가님도 지한이 좋아할 게 틀림없어.”

“히히힛!”

형의 칭찬에 지한이 좋아서 맑게 웃음을 터트렸다.

고럼고럼. 낙하산이 있더라도 우리 지한이 정도라면 낙하산을 밀어낼 만하지!

지연이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두 아이를 본 준호가 휴게소에 들어가는 버스를 보고 지갑을 챙겼다.

아이들 화장실에 들렀다가 핫도그를 사려면 부지런하게 움직여야 했다.

* * *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지한의 매니저가 세 사람을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앞으로 지한군을 맡게 될 매니저 고영훈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아이들 사촌 오빠인 이준호입니다. 이쪽은 오지연, 오지한. 저희 애들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주시고, 제 연락처는….”

서로 몸을 숙여 잘 부탁한다고 주고받는 어른들을 보고 지연이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아니 여기서 서로 인사만 하고 끝날 거냐고요.

우리 지한이 오늘 미팅 있는데 언제까지 잘 부탁한다고만 할 거야.

“오빠 우리 언제가?”

“아.”

“아.”

저 매니저 믿어도 될까.

너무 초짜 티 나는데.

지연이 지한의 손을 꾹 잡았다.

아무래도 내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것 같다.

겨우겨우 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매니저와 준호는 잠시도 입을 쉬지 않았다.

“회사 사람들이 다들 지한이를 보고 싶어 합니다.”

“우리 지한이를요?”

“네. 회사에서 아역과 전속 계약을 맺은 적이 처음이기도 하고, 지한이가 회사에 온 것도 한 번 밖에 없지 않습니까. 아직 TV나 영화관에서 연기를 보여준 적도 없어서 다들 지한이를 환상의 동물처럼 생각하고 있어요.”

“환상의 동물이라. 우리 지한이가 그 정도로 대단하기는 하죠.”

“하하. 저도 보고 깜짝 놀랐어요. 아직 유치원생이라고 들었는데 너무 잘생긴 것 있죠?”

“예전부터 우리 애들 모델이나 미스코리아 시켜야 한다고 집안에서도 말이 많았죠.”

휴게소에서 산 과자를 지한이에게 나눠 주면서 아이들이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소곤소곤 속삭였다.

“누나 환상의 동물이 뭐야?”

“용이나 구미호같이 그림에서만 볼 수 있는 동물을 말하는 거야.”

“그럼 내가 용이야?”

“다른 사람들은 지한이를 못 봐서 그렇게 생각하나봐.”

“히힛. 용이다! 누나, 용 엄청 쎄?”

“무지하게 쎄지.”

진짜 용을 말하는 건 아니지만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용처럼 강한 동물로 생각한다는 말에 지한이 발을 동동 굴렀다.

엉덩이를 들썩이는 모습을 보니 엄청 좋은 모양이었다.

누가 더 센가로 영원한 배틀을 하는 남자아이다웠다.

“사장님이랑 실장님들이 전부 지한이를 좋아해요. 그래서 다른 직원들도 더 궁금해 하는 거예요. 그 사람들을 홀린 지한이가 누군지.”

“아. 우리 지한이가 홀리긴 홀렸죠.”

연기로.

그날 탑엔터 연습실에서 있었던 해프닝을 떠올린 준호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을 포함한 어른들 모두를 연기로 속였던 제 동생을 힐끗 쳐다봤다.

“다들 신인에게 이렇게 지원이 빵빵한 적은 처음이라고 놀라요.”

“매니저와 차가 배정된 게 빵빵한 겁니까?”

그 정도로 작은 규모는 아닌 것 같던데.

준호가 의문을 뱉자 영훈이 고개를 살짝 저으며 아니라고 말했다.

“지금 가는 미팅 장소를 보면 깜짝 놀랄 거예요.”

“미팅 장소는 작가님이 정하는 거 아닙니까?”

“저희 쪽에서 제안하기도 합니다. 사장님이랑 실장님들이 여기저기서 작가님에 대한 정보를 알아 오시더니 작가님 취향을 알아봐서 제일 좋아할 법한 장소를 잡았습니다.”

“대단하네요.”

“하하. 그렇죠?”

그 정도로 신경을 썼을 줄은 몰랐다며 준호가 감탄을 했다.

뒤에서 안 듣는 척 몰래 들으면서 지한이랑 놀던 지연도 속으로 감탄했다.

그 아저씨들 진짜 우리 지한이 연기가 마음에 들었나 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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