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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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세요. 어? 고모? 응. 응응. 알았어. 고모는 언제 퇴원해? 아. 알았어. 애들 잘 챙길게. 어. 여기저기 연락이 많네. 호텔 옮길까 봐. 알았어.”

이미란인가 보네.

드디어 지한이 계약에 대한 답이 온 건가?

아무리 이혼 소송으로 정신이 없다지만 어지간히도 늦게 연락하네.

벌써 하루가 지났다고?

뚝.

준화가 통화를 끝냈다.

그가 밝은 얼굴로 남매를 돌아봤다.

“얘들아! 우리 호텔 옮기자!”

“와아-!”

“짐 싸! 얼른 호텔 옮기고 탑엔터도 가야 해.”

준호는 어제 이미란의 허락을 받고 변호사를 찾아가 계약서 검토를 맡겼다.

이 정도면 불공정한 계약은 아니라며 독소 조항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수익 분배도 꽤 괜찮았고, 양자 합의하에 계약 종료할 수 있다는 조건도 문제없다고 했다.

역시 준호를 데려오길 잘했다.

오빠가 때마침 제대해서 진짜 다행이야!

* * *

“본부장 들었나? 오늘 온다고 하는군.”

“네, 조금 전에 전달받았습니다.”

“회사 둘러보는데 문제없도록 하고, 배우실 실장들도 모여 있나?”

“지한 군이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서 모일 겁니다. 지한 군 연기 평가하는 자리니 다들 구경하러 올 겁니다.”

“그래. 다른 사람들도 본인 눈으로 확인해야 잡음이 없을 거야.”

지시를 내리는 공 사장의 말을 본부장이 빠르게 받아 적었다.

본인들이야 오지한의 잠재력을 믿지만 어린 배우가 성공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보니 회사 내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직접 보면 그런 잡음은 더 이상 나오지 않겠지.

공 사장은 곧 오지한의 연기를 볼 생각에 들뜨는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이게 얼마 만이었더라?

배우의 연기를 보고 반해서 직접 두 발 벗고 나선 게?

다른 형제들과 다르게 이쪽 업계에 뛰어든 것도 이런 설렘 때문이었지.

주민이 지금도 회사의 간판 배우인 자신의 첫 배우의 사진을 보았다.

연극이 끝난 무대의 뒷정리를 하면서 홀로 주인공의 대사를 말하던 그 배우.

그를 무사히 스크린에 데뷔시켜 톱스타로 만든 주민이 또다시 자신의 심장을 뜨겁게 만드는 배우를 떠올리고 활짝 웃었다.

“어서 빨리 보고 싶군.”

스크린에 비친 지한의 연기를.

* * *

“어서 오세요! 지한아, 지연아, 그리고 보호자 분.”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정승우 아저씨 옆에 있던 아저씨다.

탑엔터에서 그나마 우리와 안면이 있는 매니저를 붙여 준 모양이었다.

“자, 저희 회사 안내해 드릴게요. 따라오세요.”

“네에!”

“네!”

아이들이 씩씩하게 대답하고 매니저의 뒤를 따랐다.

“여긴 회의실이에요. 배우에게 들어온 작품 중에 어떤 걸 할지 정하기도 하고 드라마나 영화 홍보를 어떻게 할지, 다음 활동은 어떻게 할지. 아! 가수들의 다음 앨범 컨셉 회의도 이곳에서 한답니다.”

커다란 스크린이 있는 회의실을 보니 엔터 회사도 일반 회사 못지않게 전략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알았다.

어딜 가나 회사는 다 비슷한가 봐.

난생처음 엔터 회사라는 곳에 방문한 지연이 신기하다는 듯이 이곳저곳을 둘러봤다.

반면 지한은 아무것도 없이 하얀 벽에 의자만 있는 곳이 지루한지 금세 다른 곳으로 가려고 했다.

“자, 여기는 홍보실이야. 우리 배우나 가수가 새 작품, 앨범을 냈을 때 홍보하는 역할을 하지. 언론사에 기삿거리를 제공한다든가 소속 아티스트 프로필 관리며 이런저런 일을 담당하죠.”

“홍보?”

“예를 들면 지한이가 어떤 영화에 들어갔는지 지한이가 어떤 배우인지에 대해서 알리는 일을 하는 거야.”

“오오!”

“멋져요!”

아이들의 반응에 매니저의 어깨가 으쓱했다.

이런 순수한 반응 너무 좋아.

매니저는 중간중간 아이들의 질문에 대답해 주면서 이곳은 무엇을 하는 곳이고 저곳은 무엇을 하는 곳인지 설명했다.

“그리고 연습실도 보여줘야겠죠?”

“배우도 연습실이 있어요?”

“다음 배역이나 실력 향상을 위해 끊임없이 연기 연습을 하죠. 회사에서는 배우들을 위해서 연기 선생님도 여러 명 초대한답니다.”

“왜 여러 명이에요?”

“각자한테 맞는 스타일이 있거든.”

“그렇구나.”

지한이한테도 맞는 연기 선생님이 왔으면 좋겠는데.

강압적이거나 윽박지르는 선생님은 사양이다.

“자자. 오늘은 우리 연습실에 아무도 없어요.”

“왜 아무도 없어요?”

“그게. 사장님이,”

“네?”

“아니야! 아무것도!”

얼버무리려는 매니저를 보면서 지연이 생각했다.

아저씨, 그렇게 말을 돌린다고 이미 들은 걸 못 들은 척할 순 없잖아요?

오늘 우리가 온다고 사장 아저씨가 여길 비우라고 한 모양인데.

그렇게까지 지한이의 실력을 보고 싶은 건가?

“와. 엄청 넓다!”

“정말 여기서 연기 연습하는 거예요?”

“연기는 혼자 하는 것보다 여럿이서 합을 맞추는 장면도 많잖아? 거기다 몸을 쓰는 장면까지 있으니 크게 지었대.”

그래서 이렇게 넓게 지은 거구나.

그 공 사장이라는 사람은 정말 소속 아티스트들을 소중하게 생각하나 봐.

지한이 계약 조건을 말할 때도 좋다고 생각했는데 연습실도 장난 아니게 좋아 보여.

벌컥.

“아, 여기 있었군. 찾아다녔네.”

공 사장이 문을 열고 등장했다.

찾아다녔다고 하기에는 그의 뒤를 따라 우르르 들어오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조금 전에 매니저 아저씨가 한 말도 그렇고 공 사장님, 여기서 우리 지한이 연기를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은 거 같은데 아닌가요?

지연이 간이 오디션 장소처럼 되어버린 연습실을 보고 지한이에게 다가갔다.

“지한아 우리 또 연기해볼까?”

“귀신 연기?”

“아니, 이번에는 아픈 연기.”

저 아저씨들 눈에서 눈물 좀 뽑아보자.

19. 울어라!

“안녕, 이렇게 직접 보는 건 처음이네. 아저씨 이름은 공주민이야. 여기 사장이란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남매가 공 사장을 보고 꾸벅 인사했다.

말로만 듣던 아이들을 직접 본 이들은 자신들의 생각보다 훨씬 예쁘고 잘생긴 아이들의 얼굴에 반쯤 설득되었다.

직접 보기 전까지만 해도 아직 7살짜리 아이와 전속 계약을 하는 것은 리스크가 크다고 생각했는데 저 얼굴이라면 키즈모델만 시켜도 본전은 뽑을 얼굴이었다.

“이준호 군이었던가요? 그때 호텔에서 뵌 이후로 처음 보는 거죠?”

“그렇습니다. 오랜만입니다, 사장님.”

“소개할게요. 우리 회사를 이끌어 가는 이들이죠. 배우들을 관리하는 실장들입니다. 그리고 여기는 본부장.”

한 명 한 명 가리키며 소개하는 공 사장의 말에 준호와 실장들이 고개를 숙이며 가볍게 인사를 나눴다.

준호는 갑자기 나타난 공 사장이 차례차례 회사의 중역들을 소개시켜 주자 뭔가 그들이 원하는 게 있다는 것을 간파했다.

처음부터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할 만큼 공 사장은 지한이에게 진심인 모양이지만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겠지.

설득하려고 하는 건가?

준호는 공 사장의 뒤로 살짝 탐탁지 않은 기색이 있는 몇몇 인물들을 보고 지레짐작했다.

그의 짐작은 반쯤 맞았다.

실장들이 반대한다고 해도 공 사장은 지한과의 계약을 물릴 생각은 없었으나, 지한의 앞길에 꽃길을 깔아주기 위해서는 그들의 협조가 필요했으니 직접 지한의 연기를 보여주려고 데려왔다.

“지한아 아저씨는 지한이랑 계약하는 거 좋아. 지한이도 좋니?”

“네! 여기 좋아요. 엄청 크고 넓고 멋져요.”

오늘 둘러본 탑엔터가 상당히 마음에 든 모양이다.

엔터 회사여서 그런지 벽에 소속 배우들의 사진들이 걸려 있고, 밝은 분위기에 지한이가 보기에 재밌는 공간들도 많았겠지.

이미란이 일하는 보험 회사와는 전혀 다른 곳이다.

미래에서 온 지연마저 신기하게 둘러봤고 꽤 마음에 들었다.

언젠가 회사 입구에 걸린 연예인 사진을 지한의 사진으로 바꿔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지한이를 제대로 된 배우로 봐 주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어.’

저 공 사장이라는 아저씨 상당히 마음에 든다.

지한이가 연기를 하는데 빵빵하게 밀어줄 거라는 느낌?

그에 따른 성과를 원하겠지만 그거야 미래에서 온 내 지식과 지한이의 재능이라면 못 낼 것도 없지.

지연이 팔목을 쳐다봤다.

붉은 상처가 지연의 눈에 선명하게 보였다.

‘이쪽은 치트키도 있다고.’

공 사장이 신나서 재잘대는 지한과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지연을 바라봤다.

두 사람을 본 주민이 지한과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지한아. 오늘 아저씨 회사에 온 기념으로 지한이 연기하는 거 볼 수 있을까?”

“좋아요!”

이미 아저씨가 말하기 전에 누나와 또 연기하자고 얘기를 나눴었다.

무슨 연기를 할지도 미리 정한 지한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매니저가 구석에 있던 의자를 가져왔다.

공 사장과 실장들, 준호가 자리에 앉았다.

지한의 옆에 지연이 섰다.

“지연아, 이리와.”

준호가 지연을 불렀다.

지연이 고래를 절레절레 젓고 말했다.

“이번에는 같이 해야 해.”

“지연이도 연기 할 수 있니?”

“우리 누나 연기 잘 해요!”

“그래?”

지한의 말에 공 사장이 흥미로운 눈으로 지연을 바라봤다.

그렇게 봐도 뭐 없다.

이번에는 그냥 대사 받아주는 역할 정도만 할 거니까.

그리고 아저씨한테 전부 보여주지도 않을 거고.

지연과 지한이 서로를 마주 봤다.

좋아. 한번 해 보자.

* * *

누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누나를 보고 동생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방금 지연이가 문 여는 타이밍에 맞춰서 지한이가 고개를 돌린 거죠?”

“네. 그렇지만 문 여는 행동만 했을 뿐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았을까요?”

“쉿, 지금은 두 사람의 연기를 지켜봅시다.”

공 사장의 말에 대화하던 두 실장이 입을 닫았다.

그의 말대로 두 사람의 연기를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누나 왔어?”

“내 동생! 잘 있었어? 밥 잘 먹었고? 의사 선생님 말은 잘 들었어?”

동생의 침대로 다가간 누나가 동생의 얼굴을 붙잡았다.

“어디 보자, 내 동생. 흐음, 밥 잘 먹은 거 맞나? 살이 좀 빠진 거 같은데?”

“병원 밥이 다 그렇지 뭐.”

동생이 안색을 살피는 누나의 손을 쳐냈다.

평소보다 더 안 좋은 것 같은 동생의 얼굴에 누나가 걱정 어린 얼굴로 동생을 쳐다봤다.

“괜찮다니까, 그보다 누나 일하러 갈 시간 아니야?”

동생의 말에 누나가 시계를 쳐다봤다.

정말 일하러 갈 시간이었다.

동생의 병원비를 대기 위해서 밤에도 일해야 하는 누나가 조금 지친 얼굴을 했다.

그 얼굴을 본 동생의 얼굴이 흐려졌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누나 가볼게. 아프면 꼭 이 버튼 눌러야 돼. 알았지?”

“알았어.”

병 때문에 안색이 창백한 아이가 입을 삐죽 내밀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아이들처럼 힘들다고 투정 부려도 부족할 동생이 불만을 억누르고 제 말을 듣는 모습에 누나가 동생의 머리를 토닥였다.

누나가 병실을 나섰다.

홀로 남은 동생은 누나가 걱정할까봐 삼켰던 고통을 드러내며 침대 위에 쓰러졌다.

“허윽, 흑.”

겨우 참고 있었는데.

동생이 고통에 침을 뚝 뚝 흘리며 입을 뻐끔거렸다.

참아야 해.

아직 누나가 멀리 가지 못했어.

동생이 몸을 말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한두 방울 맺히는 땀이 그가 견디고 있는 고통을 보여주고 있었다.

동생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허억, 큽, 끅.”

심상치 않은 아이의 반응에 두 사람의 연기를 지켜보던 어른들이 다리를 떨었다.

준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지만 자신을 제지하며 검지를 들어 입술에 대는 공 사장을 보고 초조하게 발을 굴렀다.

연기라고 생각하는 건가?

하지만!

어른들이 점점 초조하게 바라보는 걸 모르는 지한이 계속해서 연기를 이어갔다.

식은땀을 흘리던 아이가 고통을 참지 못하고 허공에 손짓했다.

아파, 아파!

누가 나 좀!

고통에 흐려진 눈에 누나가 아프면 누르라던 버튼이 보였다.

저걸 누르면,

덜덜 떨리는 손이 버튼으로 향하다가 허공에서 멈췄다.

저걸 누르면 의사 선생님들이 달려오겠지.

하지만 누나는 또 잠도 못 자고 일하러 갈 거다.

“흐, 흐으.”

큰 소리로 울지도 못하는 아이의 눈동자가 갈등으로 이지러졌다.

동생의 눈에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싫, 어. 흡, 더 이상,”

누나의 짐이 되는 것이 싫다.

결심을 한 동생은 실수라도 버튼을 누르기라도 할까 봐 주먹을 쥐었다.

다시 몸을 둥글게 말고 고통에 괴로워하면서도 동생은 끝끝내 손을 뻗지 않았다.

“누, 나. 미안. 컥, 미, 아아.”

숨을 쉴 수 없어 뻐끔거리던 입이 천천히 다물렸다.

땀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는 액체가 동생의 뺨을 가르고 침대에 떨어졌다.

살고 싶다는 마음과 더 이상 누나의 짐이 되기 싫다는 마음 사이에서 몸부림치던 아이의 몸이 서서히 움직임을 멈췄다.

땀과 눈물로 젖은 동생의 눈이 감기고 아이의 고개가 서서히 아래로 내려갔다.

“지한아!”

* * *

준호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지한에게 달려갔다.

눈시울이 붉어진 눈으로 동생의 이마를 짚었다.

땀으로 젖은 이마가 차갑게 식어갔다.

왜, 갑자기.

지한이가 땀을 이렇게.

피부는 또 왜 이렇게 차갑지?

제 동생들이 연기를 한다고 할 때부터 이것이 연기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중간부터 땀을 흘리고 몸을 떠는 지한을 보니 머릿속에 있던 생각이 점점 흐려졌다.

그냥 연기하는데 멀쩡하던 애가 갑자기 땀을 흘릴 리가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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