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촌 오빠의 눈물겨운 손짓을 본 지연이 지한의 손을 잡고 인형 앞에 섰다.
“누나 왜?”
“하나 둘 셋 하면 같이 인형 꼭 껴안는 거야.”
“응? 응? 왜에?”
“둘이서 같이 껴안으면 더 좋잖아?”
“으음. 알았어!”
“꼭 안고 오빠가 있는 쪽 쳐다봐야 해.”
“꼭 안고, 형 쪽으로.”
“하나 둘 셋!”
준호는 모처럼 만들어진 셔터 찬스에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옆에서 남매의 보호자로 보이는 청년이 일회용 카메라를 들고 아이들을 렌즈에 담았다.
찰칵.
자신도 모르게 카메라를 찍는 청년의 뒤에서 남매의 얼굴을 눈에 담던 민기가 작게 감탄했다.
“이야. 이거 그냥 찍어도 화보겠는데?”
“? 뭡니까?”
“아! 아닙니다.”
뒤에서 중얼거리는 민기의 말을 듣고 청년이 날카롭게 반응했다.
잠시 민기를 위아래로 훑어본 준호가 다가오는 아이들의 손을 잡고 이동했다.
그 반응에 민기는 청년의 반응을 이해하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그들의 뒤를 쫓았다.
“누나, 저거 봐.”
“지한이 너도 머리띠 갖고 싶어?”
“으응. 아니야. 괜찮아.”
“갖고 싶으면 사면되지. 오빠. 우리 이거 사줘.”
“어떤 거?”
“동물 귀 머리띠!”
“그래. 마음에 드는 거 하나씩 골라봐.”
“와아-!”
“형! 너무 좋아!”
청년의 말에 아이들이 신이 나서 머리띠를 골랐다.
기념품 샵 앞에 전시되어 있는 동물 머리띠를 보고 남매로 보이는 아이가 서로 머리띠를 씌워주는 모습이 그림 같았다.
지나가는 이들이 무조건 한 번 뒤를 돌아볼 만큼 잘생긴 얼굴을 하고 있는 아이들을 보자 몰래 뒤를 따르던 민기도 절로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뉘집 자식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알생겼다. 내 새끼였으면 벌써 연예인 시켰ㅇ.”
어?
자신이 한 말에 머릿속이 번뜩이며 후다닥 일어난 민기가 아이들을 보았다.
내가 저 아이들을 연예인으로 만들어 주면 되는 거 아닌가?
모두가 노리는 먹잇감을 차지하러 왔다가 1++++한우를 본 기분이었다.
그것도 아직 아무도 모르는 극상의 특등급 한우를!
멀리서 지켜보던 민기가 근거 없이 솟구친 용기를 가지고 아이들에게 당당하게 걸어갔다.
“저기,”
“너희들 늦으면 후룸라이드 못 탄다?”
“안 돼!”
“잠시만!”
아이들 옆에 있던 청년의 말에 두 아이가 재빨리 머리띠를 골라 청년에게 다가갔다.
청년은 아이들의 손을 하나씩 붙잡고 계산하기 위해서 가게로 들어갔다.
눈앞에서 대어가 그물을 빠져나가는 것을 본 기분에 민기가 다급해졌다.
대어를 놓칠까 봐 서둘러 그들의 뒤를 따라간 민기가 두리번거리며 아이들을 찾았다.
분명 계산하러 갔을 텐데.
급한 마음에 민기가 가게 안에 있는 점원을 붙잡고 물었다.
“저어. 방금 엄청 예쁘고 잘생긴 남매를 데리고 온 청년이 있을 텐데요.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아, 그 손님들요? 벌써 계산하고 저쪽으로 나가셨는데요?”
젠장!
이놈의 기념품 샵은 놀이공원 안에 있는 게 아니랄까 봐 문도 여러 개였다.
점원이 가리킨 곳으로 간 민기가 재빨리 시선을 움직이며 아이들을 찾았다.
멀리 가지 못했을 텐데.
“찾았다!”
놀이기구를 타기 위해 줄을 서고 있는 아이들을 보고 민기가 환하게 웃었다.
역시 멀리서 봐도 눈에 띄는 아이들이었다.
서둘러 뛰어간 민기가 드디어 남매에게 말을 걸려고 할 때였다.
“자, 여기까지.”
“예?”
“죄송하지만 다음 순서에 타셔야겠는데요?”
“예에?!”
아이들의 뒤를 쫓다가 놀이기구 앞까지 온 민기는 제 앞에서 잘린 줄을 보고 억울하게 외쳤다.
“아니, 전 꼭 이번 거 타야 해요!”
“네에. 손님 죄송하지만 다음 차례에 타셔야 해요.”
직원은 웃는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민기를 제압했다.
아니, 난 진짜. 이거 타러 온 거 아닌데!
멀리서 아이들이 놀이기구를 타는 모습을 보자 더욱 애가 탔다.
바로 코앞에 있는데 왜 말을 못 해!
민기가 답답함에 제 가슴만 쳤다.
* * *
민기의 노력은 다음번에도 계속됐다.
아이들의 뒤를 쫓기 위해서 줄을 이탈하려고 해도, 오지랖 넘치는 직원의 도움으로 기구를 타게 됐고.
기념품 샵에 들어가서 드디어 말을 걸어보나 했더니 넘치는 인파에 아이들을 놓쳤다.
솜사탕 가게 앞에서 잃어버렸던 아이들을 찾았나 했더니 갑자기 제 앞에서 음료를 쏟은 커플 때문에 아이들과 거리가 또 멀어졌다.
“내가 오기가 생겨서라도 꼭 캐스팅하고 만다.”
이쯤 되면 포기할 법 했지만 서로의 머리 위에 머리띠를 씌워주면서 환하게 웃던 아이들의 얼굴을 떠올리면 포기하려는 마음이 절로 수그러들었다.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마음 때문일까 민기의 눈앞에 드디어 벤치에 앉아 쉬고 있는 남매가 보였다.
드디어! 드디어 만났다!
민기가 지쳐서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뛰었다.
“저기! 얘들아!”
꺄르르 웃으며 노래를 부르고 있던 아이들이 자신들을 부르는 외침에 민기를 돌아봤다.
웬 남성이 큰소리로 자신들을 부르며 뛰어오자 남매는 잔뜩 경계하는 얼굴로 민기를 탐색했다.
아이들 앞에서 잠시 멈춰 숨을 헐떡인 민기가 호흡을 가다듬고 말했다.
“너희들 혹시, 연예인 안 해 볼래?”
갑자기 나타나서 하는 말이 뭐라고?
지연은 이 남자를 사기꾼으로 신고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놀이기구를 탈 때마다 본 것 같은 얼굴인데. 혹시 스토컨가?
지연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민기는 드디어 말을 걸었다는 생각에 활짝 웃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활짝 웃는 아저씨라니.
더더욱 수상해!
지연이 동생을 안고 슬금슬금 준호가 있는 쪽으로 붙었다.
준호는 낯선 이를 보고 잔뜩 경계하다가 그 수상한 인물의 입에서 나온 말이 생뚱맞아 잠시 멍하니 있었다.
그러다 동생들이 자신에게 바짝 붙는 것을 보고 곧바로 험악한 인상으로 대답했다.
“이보세요. 누구시길래 제 동생들한테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아! 실례했습니다.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민기가 품에서 명함을 꺼내 준호에게 건넸다.
KM엔터
매니저 김민기
XXX-XXX-XXXX
명함에 적힌 회사, 이름, 연락처를 확인한 준호가 미심쩍은 얼굴로 민기에게 물었다.
“매니저가 왜 우리 애들한테 말을 건 겁니까?”
“아, 저는 매니저긴 한데 연예인이 될 만한 사람들을 캐스팅하는 매니저입니다.”
말로만 듣던 캐스팅 매니저의 존재에 준호가 경계를 풀지 않고 이어서 말했다.
“그래서 우리 애들을 연예인으로 만들어 준다고요? 뭐 교습비나 앨범 제작비 이런 거 필요합니까?”
사기꾼들의 뻔한 수법을 읊으며 준호가 당신도 그런 인간이냐며 물어보자 민기가 손사래를 쳤다.
“저희는 그런 업체가 아닙니다. 물론 이 바닥에 사기꾼들이 많긴 하지만 저희는 달라요! SAS 알죠? 저희 회사 소속 가숩니다!”
“그 가수는 알지만 그쪽이 정말 그 회사 다니는 걸 어떻게 확인합니까?”
“회사에 전화해서 물어보시면 됩니다. 진짜예요.”
강력하게 부인하는 그를 보고 준호가 명함을 받아들고 말했다.
“알겠습니다. 확인하고 연락드리죠. 얘들아 가자.”
“응.”
“….”
남매가 민기를 두고 준호를 따라 움직였다.
민기는 멀어지는 준호와 남매를 보고 두 손을 입 앞에 모으고 소리쳤다.
“꼭 연락 주세요―!”
누가 보면 열렬한 구애라도 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준호가 아이들을 잡은 손에 힘을 주고 더욱 빠르게 걸었다.
* * *
“편집장님 이제 시작해 봅시다.”
-그래! 내가 안 기자만 기다리고 있었어!
“지금 메일 보냈고요. 후속 기사는 내일 보내드릴게요.”
-알았어! 이거 우리 독점이지?
안윤한이 제 노트북에 띄워져 있는 기사 원고를 보고 씨익 웃었다.
“물론이죠.”
-조오아써! 나만 믿어 안 기자!
“네이, 네이.”
뚜욱-
윤한이 귀찮다는 얼굴로 통화를 종료했다.
매번 독점 기사를 가져오라고 닦달하던 편집장이 저렇게 매달리는 모습을 보자니 썩 유쾌했다.
휴대폰을 대충 침대 위에 던진 윤한이 노트북 화면에 띄워져 있는 기사 원고를 보았다.
[도 넘은 가정 폭력. 가스 자살 소동 남편 불구속 기소.]
[[집중취재] 아역 배우의 고충.]
[아버지의 두 얼굴, A군의 연기 비밀.]
17. 공 사장의 미소
<오싹한 집>의 추가 촬영이 무사히 끝나고, 샤롯월드에서 하루를 알차게 보낸 세 사람은 이제 집으로 내려갈 준비를 했다.
“더 놀고 싶다.”
“그러게. 집 가기 싫네.”
학교 안 가고 재밌게 놀았는데 내려가면 또 학교 가야 하잖아?
그리고
내려가면 또 무슨 꼴을 보려고.
우리가 올라오기 전에 미란이 이혼 준비를 하면서 이것저것 알아본다고 했는데 그 작은 도시에서 일가친척이나 친구들에게 두 사람의 이혼 소식이 안 들어갈 리 없었다.
예전에도 오형우랑 이미란이 이혼한다고 했을 때, 친가 친척들이 떼로 몰려와서 얼마나 귀찮게 굴었던지.
지연은 그때를 떠올리면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누나? 추워?”
“아니. 그냥. 내려가면 이렇게 못 놀잖아. 그게 아쉬워서.”
“나도 아쉽다. 서울엔 신기한 거 엄청 많은데.”
“나중에 또 서울 올라오자.”
“진짜?!”
“어 진짜.”
“좋아!”
누나의 말에 지한이 신이 나서 방을 뱅글뱅글 돌았다.
좋아서 방을 도는 동생의 뒤를 지연도 따라서 뛰었다.
“얘들아. 방에서 뛰면 안 되지.”
짐을 정리하고 퇴실 준비를 하던 준호가 아이들에게 주의를 줬다.
가방을 멘 준호가 두고 가는 것이 없는지 확인하고 아이들을 불렀다.
“자, 가자. 얼른 자기 신발 신어.”
“네에!”
“응!”
신발장에서 각자의 신발을 신고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을 본 준호가 웃음을 흘렸다.
발을 동동 구르는 아이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띠리리리.
“누구지? 얘들아 잠시만 기다려.”
방을 나서려던 준호가 뒤를 돌아봤다.
아이들이 신발을 잘 신었는지 꼼꼼히 확인하던 준호가 전화를 받으러 갔다.
“여보세요? 어? 고모?”
이미란이 전화했단 소리에 지연이 혼자 방을 나서려던 지한의 목덜미를 잡았다.
오늘 우리가 내려가는 걸 알 텐데 갑자기 웬 전화람?
“네. 네. 알았어요. 애들은 제가 데리고 있을게요.”
도중에 심각한 얼굴이 되더니 준호가 미란과의 통화를 끝냈다.
“오빠?”
“형, 엄마야?”
자신을 올려다보는 동생들을 보고 준호가 가방을 다시 내려놨다.
“얘들아 우리 조금 더 여기 있어야겠다. 잠시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래? 오빠는 가서 결제하고 올게.”
“알았어. 다녀와.”
“다녀오세요.”
준호가 아이들을 두고 방을 나섰다.
“누나! 그럼 우리 여기서 더 놀 수 있는 거야?”
“그런가봐.”
“와아! 좋아.”
“오빠한테 또 놀러가자고 할까?”
“응!”
노는 건 노는 거지만 일단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 둘 필요성은 있겠어.
나중에 준호 오빠가 돌아오면 그때 물어봐야겠어.
* * *
“사장님 이거 보셨습니까!?”
“어, 그래. 지금 보고 있어.”
탑 엔터의 사장실.
본부장이 손에 신문을 쥐고 사장실에 뛰어 들어왔다.
그가 하고 싶은 말이 무슨 말인지 이미 알고 있는 공 사장이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위험 수위를 넘은 가정 폭력. 한밤중에 일어난 가스 누출 소동.]
지난 16일 오후 10시 57분 경. ○○시 △△동에 있는 한 아파트에서 가스 누출사고가 발생, 아파트 거주민 약 380여 명이 대피하는 일이 일어났다. 관리인의 신고로 경찰과 119 소방대가 긴급 출동, 가스 중독 상태를 보인 10여 명이 병원으로 긴급 후송됐다.
…한편, 이 사태는 가정 폭력을 일삼던 오모씨(38)가…
평소라면 사회면에 있는 일로 엔터테인먼트 회사가 소란을 떠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소속 연예인들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킬 사건을 만든다면 예외지만 말이다.
“이게 얼마 전에 있었던 찌라시 내용인가 보군.”
“그렇습니다. 그리고.”
“알아. 이거 지한 군 아버지지?”
“네.”
<오싹한 집>의 투자자로서 추가 촬영이 있던 날 이미 이 일에 대해서 들은 공 사장이 담담한 얼굴을 했다.
배우가 피해자인 이상 이 일은 제작사에서 충분히 대처할 수 있는 일이었다.
“지금 오지한 군 화제성이 압도적입니다!”
“흔하디흔한 사건인데 왜들 이렇게 호들갑이야?”
“이거 보십시오!”
[슬픔을 딛고 일어선 아역배우 오지한]
올 여름 개봉 예정인 영화 <오싹한 집>에 출연한 배우 오지한 군(5)의 불우한 가정사가 공개되어 파장이 일고 있다. 오지한 군은 지난 13일 현장에서 캐스팅되어 배우 정승우와 합을 맞췄으며
…현장에 있던 스태프들을 모두 감동시킨 오지한 군의 아버지가 16일 자살 소동을 일으켜 충격을 주고 있다….
영화와 전혀 관련도 없는 사건이 지한의 이름을 팔아 크기를 키우고 있었다.
심지어 그 기사에는 어디서 구했는지 지한의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는데 사진에 있는 다른 아이들의 얼굴이 모자이크된 걸 보면 소풍이나 현장학습에서 찍은 단체 사진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