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폭발하면 집집마다 있는 가스통이 다 터질 겁니다.”
“…그건 안 되지.”
아무리 안전 불감증이 널리 퍼져 있던 시대라고 해도 집마다 있는 가스통이 터지면 대형 폭발로 이어질 것은 알 수 있었다.
지갑을 들고 오지 못한 이들은 이웃집 사람들에게 몇 만 원 빌려 모텔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했다.
13. ‘그 아역 배우’를 찾아라! (1)
“너희들 괜찮니?”
“응. 엄마는?”
“엄마도 괜찮아.”
이미란은 큰 부상은 없지만 가위를 들고 호스를 자르려는 오형우를 막느라 팔 여기저기에 자상을 입었다.
가스를 흡입했으니 병원에서도 며칠 경과를 지켜보자고 한 참이고, 가정폭력이 의심되는 상황이니 며칠 입원하기로 결정했다.
나랑 지한이도 맨발로 뛰어나오는 바람에 발바닥이 조금 까지긴 했지만 그 정도야 소독하고 밴드를 붙이는 것에 끝났다.
“엄마. 아빠랑 같이 안 살면 안 돼?”
“아빠 무서워.”
“너희들….”
아이들의 말에 미란의 가슴이 미어질 것 같다는 표정을 했다.
그동안 자신 하나만 당하고 있을 때야 본인만 참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넘겼다. 그런데 아이들이 커갈수록 오형우의 알코올 의존은 점점 심해졌고, 폭력의 수위도 높아졌다.
오늘 있었던 가스 자살 소동은 담대하다고 생각했던 그녀 스스로도 온몸이 떨릴 만큼 무서웠다.
지연은 흔들리는 미란의 마음에 쐐기를 박았다.
“다음에 아빠가 우릴 진짜 죽이면 어떡해?”
“…!”
고작 초등학교 2학년인 제 딸의 말에 미란이 입을 벌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동안 술을 먹고 와서 죽겠다고 술병을 깼을 때도, 가스 호스를 자르겠다고 가위를 들 때고, 설마설마했다.
그렇게 설마설마했던 결과가 이거다. 이러다가 진짜 오형우에게 죽을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지연아, 지한아. 너네 아빠 없어도 괜찮아? 다른 아이들처럼 아빠랑 같이 어딜 놀러 가거나 학부모 모임에 아빠가 오는 일이 없을 텐데도?”
“지금도 안 그러잖아.”
“그렇긴 하네….”
“엄마, 나도 아빠가 없었으면 좋겠어. 맨날 엄마 때리기만 하고 부수고 소리 지르고! 아빠 미워!”
“지한아….”
항상 아이들이 자고 있을 때 난동을 부리기 때문에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아이들도 이미 오형우에 대해서 알고 있었던 거다.
미란은 잠옷 바람에 발에 맞지 않는 슬리퍼를 신고 발에는 밴드를 붙이고 있는 아이들을 보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우리 셋만 있으면 이 험한 세상도 살아갈 수 있어. 앞으로 우리 가족은 우리 셋뿐이야.”
“네.”
“응! 좋아!”
자신의 품에 두 사람을 끌어안으며 미란이 다짐하듯이 말했다.
물론 언젠가 이미란도 가족에서 떨어져 나가게 할 거지만.
미란의 품에 안겨 지연이 혼자 다른 생각을 했다.
“그런데 너네 안 추워?”
“괜찮은데.”
“엄마가 이모한테 전화할게. 가서 옷이랑 신발이라도 좀 챙겨 입자.”
“알았어.”
안 그래도 신발이 절실했는데 잘됐다.
지연이 지한의 맨발을 보고 미간이 좁아졌다.
다음에는 이런 일이 있을 때를 대비해서 신발장에서 슬리퍼라도 미리 꺼내놔야겠다.
* * *
병원 앞에서 이모, 이미애가 짐 가방을 들고 내렸다.
“얘들아-!”
“이모!”
“이모오!”
내성적이고 심약한 성격의 이모는 우리를 보고 살짝 안도한 얼굴이었다.
잠옷 차림에 신발만 슬리퍼인 우릴 보고 꼭 안은 이모는 이내 품에서 놓아 주었다.
“자, 들어가자.”
“응.”
이모가 양손에 아이들의 손을 잡고 병실로 올라갔다.
미애는 무사한 애들의 모습에 겨우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전화로 대략 말을 전해 듣긴 했는데 부탁을 받고 들어간 동생의 집안에는 사람들 발자국이며 깨진 접시며 엉망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검붉은 자국은 핏자국처럼 보였다.
“언니!”
“미란아.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라니.”
제 언니를 본 미란은 자신이 병실에 오게 된 경위며 가슴 속 가득 찬 억울함을 죄 토해냈다.
쉬지 않고 말하는 동생을 보고 미애가 조카들을 침상에 앉혔다.
“애들은? 내가 데려가서 재울까?”
“아니야. 오늘은 쟤들도 입원시켰어. 자, 얘들아? 얼른 침대에 누워.”
“네.”
“네에.”
침대에 올라가는 조카들을 보고 미애가 애틋해했다.
제 동생 가족에게 일어난 일이 믿기 힘들었다.
“와 줘서 고마워 언니. 당분간 부탁 좀 할게.”
“그래. 나도 이만 내일 출근해야 해서 들어가 볼게. 퇴근하고 들릴게.”
“알았어. 고마워.”
“이모 안녕히 가세요.”
“안녕히 가세요.”
“그래, 너희들도 오늘 고생했다. 푹 자렴.
이미란은 아쉬워했지만 벌써 시간이 새벽 3시였다. 이모가 병실을 나섰다.
방금 이모를 배웅하고 벌써 눈꺼풀이 눈을 덮은 지한이 보였다.
정말 긴 하루였다.
* * *
오형우가 자살소동을 피우길 기다렸다가 신고하면 쉽게 감방에 보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현실은 지연의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오형우 씨는 도주의 위험이 없기 때문에 불구속 수사를 하기로 결정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며칠 입원해 있는 동안 들락거리던 형사는 병실에 와 허리를 숙였다.
허리를 숙이고 터무니없는 말을 뱉은 경찰을 보고 이미란이 뒷목을 잡았다.
“아니, 왜 구속을 안 한다는 거예요?!”
“그다음 날 아침에 술에서 깬 오형우 씨가 죄송하다며 자신의 죄를 전부 인정하기도 했고, 주변에서도 오형우 씨는 평소 술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함부로 폭력을 쓸 사람이 아니라는 증언이 있었습니다.”
원래 술 먹고 사고 치는 놈들은 술 안 먹으면 주변에서 얌전하단 소릴 듣는다.
문제는 술 안 처먹는 날이 없다는 거지.
“아니 제 몸에 있는 멍 보셨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오형우는 이 집의 가장이고, 일하러 가는 것까지 막으면 아무래도 가계가 곤란하지 않을까라는 판단도 있어서 불구속 수사로 결정 났습니다. 그래도 어머니, 형을 받는 것은 거의 확실합니다.”
“어휴, 진짜. 내가 속이 터져서!”
그럼 그렇지.
이놈의 대한민국은 법도 개같지만 적용하는 것도 문제였다.
여기서 심각하게 봐야 하는 가정폭력을 가정 내에서 해결할 문제라며 간섭을 하지 않으려 했다.
그놈의 가부장적 문화. 빌어먹을 유교 문화!
가해자를 피해자가 있는 공간으로 보내면 어쩌라는 거야.
“엄마 그럼 아빠 집에 계속 오는 거야?”
“! 아니, 절대 안 그럴 거야. 그 사람이 집에 오면 우리가 나가면 되지!”
그래.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된다.
“그럼 우리 어디가?”
“당분간 이모 집에 가 있자. 아빠가 일하러 갔을 때, 엄마가 집에 가서 이것저것 챙겨올게.”
“엄마 다쳤잖아.”
“괜찮아. 지금은 오형우가 오기 전에 피하는 게 먼저야.”
하여간 개같은 법. 개같은 오형우!
경찰은 다시 한번 허리를 숙이고 병실을 나갔고, 이미란은 이모에게 전화해 하소연을 했다.
인생 다시 살아도 쉬운 건 없구나.
따르르릉-
겨우 내려놨던 휴대폰에 또 벨이 울렸다.
이번에는 또 누구려나.
“모르는 번혼데?”
“혹시 경찰 아저씬가?”
“경찰 번호는 저장했는데.”
모르는 전화번호지만 안 받을 수 없던 미란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지한이 어머니인가요?
“네. 맞는데, 누구세요?”
-나는 최장산이라고 하는데. 혹시 기억하십니까?
“죄송해요. 제가 요 며칠 정신이 없어서 그런데. 저희 어디서 만났었죠?”
-정승우 배우가 찍고 있는 영화의 조감독입니다.
“아 그!”
전화의 상대방을 기억해낸 미란이 미안한 얼굴을 했다.
보이지도 않을 상대방에게 미안함을 표한 미란이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근데 무슨 일이예요?”
-아, 아무래도 세트장에서 추가 촬영이 필요할 거 같아서. 혹시 시간 괜찮으신가요?
저번에 흘린 듯이 말하던 추가 촬영 건인 모양이다.
옆에서 듣고 있던 지연과 지한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추가 촬영에도 지한이를 부르는 걸 보면 어지간히도 내 동생의 연기가 마음에 들었나 보지?
“시간은 괜찮은데. 가면 또 출연료 나오나요?”
이미란이 물었다.
아싸! 또 출연료 들어온다!
지한이가 세트장에서 찍는 걸 경험해 볼 좋은 기회라고 해도 그것과 이거는 구분해야 하지 않겠어?
출연료에 대해 물었음에도 촬영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 더 좋은지 최장산이 들뜬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요! 그래서 언제 올 수 있으신가요?
“장소가 어딘데요?”
-여기 파주에 있는 세트장인데 서울까지 오면 제가 데리러 가겠습니다.
파주라. 거기 거의 38선이랑 가까운 곳 아닌가?
머릿속에 지도를 그려보던 지연이 서울까지 가는 버스 시간을 떠올렸다.
첫차가 새벽 6시였던가? 안 막히면 대략 4시간 정도 걸릴 거고.
“언제 촬영하나요?”
-내일이라도 와 주시면 저흰 좋죠. 혹시 가능하실까요?
“바로는 제가 좀 힘든데.”
“갈래요! 네? 저희들끼리 만이라도 안 돼요?”
“안 돼. 우선 보호자로 갈 수 있는 사람 좀 찾아봐야겠는데. 여보세요? 언제 되는지는 내일 다시 연락드려도 될까요?”
칫. 거절당했나?
하긴 고작 초등학교 2학년짜리 몸인걸.
이럴 땐 시간을 빨리 돌리고 싶어진다니까.
-네! 네! 됩니다! 내일 몇 시에 연락 주시나요? 죄송하지만 저희가 조금 급해서.
“점심 전에 연락드릴게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머니.
오형우랑 갈라서기로 한 이상 이미란은 병원에 오래 입원해 있기로 했다.
본인이 당장 퇴원이 어려우니 다른 사람을 구해야 할 텐데.
서울에 이미란의 지인이 있던가?
빈약한 그녀의 인맥을 떠올리면서 지연이 생각에 잠겼다.
“누나 나 또 촬영해?”
“응. 좋지?”
“좋아! 나 이번엔 더 잘 할 수 있어!”
“그래. 내 동생은 뭐든 다 할 수 있어. 그때 귀신의 마음 안 잊었지?”
“응!”
그래. 사람 구하는 건 이미란에게 맡기고.
난 지한이랑 같이 연기 연습이나 해 볼까?
어린애 귀신 나오는 영화가 뭐 있더라?
* * *
“하아. 이걸 어떻게 한다.”
지방 경찰청 강력계 형사인 박순찬은 제게 배정된 사건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답답한 마음에 잠시 담배 피우러 밖을 나온 그의 곁으로 후배인 김동철이 달라붙었다.
“형님 뭐 때문에 그러세요?”
“아니 새로 배정된 사건 때문에.”
“하여튼 이 좁은 땅에 사건은 왜 이리 많은지. 일도 많은데 하나하나 신경 쓰다가는 금방 대머리 될 거예요.”
“임마 우리 집에 대머리 유전자는 없어.”
“….”
후배의 따가운 눈빛에 박순찬이 아차 싶었다.
예전 저놈의 가족사진을 봤을 때 동철의 아버지는 훤한 정수리를 가지고 계셨다.
“미안하다.”
“아니에요. 곧 수천만 탈모인을 위한 약이 곧 개발될 겁니다.”
“그래. 힘내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격려에 동철의 눈에 눈물이 찔끔 차올랐다.
고개를 들어 눈물을 털어낸 동철이 순찬에게 물었다.
“그래서. 형님을 힘들게 하는 일은 뭔데요?”
“가정 폭력을 쓰던 남편이 홧김에 일가족 자살을 하자고 가스 호스를 잘라버린 사건.”
“살인 미수에 방화 미순가요? 하여튼 여자랑 제 새끼한테 손대는 놈들은 다들 교도소에 처넣어야 한다니까.”
“그러게 말이다. 거기다 이 미친놈이 구출하러 온 소방대원 앞에서 라이터 키려고 했단다.”
“이야. 미쳤네.”
얘기만 들어도 걸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전부 다 합치면 죄가 꾀 무거워질 것 같았다.
그때 순찬이 듣기만 해도 형량이 낮아지는 소리를 했다.
“근데 술까지 처먹고 그랬단다. 애가 둘이나 있는 애 아빠기도 하고.”
“쉽지 않겠네요. 우리나라 판사들은 술 먹고 우발적으로 한 거면 엄청 감형 때리잖아요.”
“그러니까 문제다. 그런 놈 집유로 풀어주면 어떻게 될지 뻔하잖아?”
“또 집에 가서 술 먹고 가족들한테 손찌검하겠네요.”
안 봐도 뻔한 판결에 두 형사들이 답답한 듯 담배를 뻐끔뻐끔 피웠다.
이런 가정의 결말이야 뻔했다.
가장이 죽을 때까지 묶여 살거나 아빠를 피해 가족들이 도망치는 것.
최악은 참다못한 아내나 자식의 남편 살해.
“형님이 왜 답답해하는지 알겠네요. 이런 거 싫어하시잖아요.”
“싫어하지. 뻔히 똑같은 짓 할 거 아는데. 거기다 이거 누가 신고했는지 아냐?”
“아파트 주민이 했겠죠.”
“그 집 애들이 맨발로 뛰어나와서 관리실에서 신고했단다. 고작 9살. 7살짜리 애들이.”
“예에?!”
“이게 뭔 말인지 알겠냐?”
초등학생인 아이들이 어른을 거역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심지어 부모는 제 세상을 보호하는 울타리나 다름없는 존재.
그 울타리 밖의 세상에 제 발로 뛰쳐나온다고?
“애들도 제 아빠를 포기했다는 뜻이네요.”
“그래. 그만큼 이미 이 가정은 파탄이 났단 소리야.”
그런 파탄인 가정으로 애들 아빠가 돌아간다.
이때까지 한 번도 가정 폭력의 피해자들 편인 적 없던 판결을 알기에 두 사람의 가슴이 답답해졌다.
“들어가자. 우리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빌어먹을 검사님이 최대한 형을 높게 때릴 수 있게 수사하는 것밖에 없으니까.”
“에잇. 이럴 땐 진짜 굿이라도 하고 싶다니까요. 저딴 놈 벼락이라도 내려달라고.”
“굿할 때 나도 불러라.”
두 형사가 담배를 다 태우고 들어가자 자판기 뒤에 숨어 있던 기자가 번득이는 눈을 한 채 나타났다.
“애들이 제 아빠를 신고했단 말이지?”
한 번 무는 건수는 절대 놓치는 법이 없다는 사회부의 하이에나, 안윤한.
그가 남매의 사건을 물었다.
* * *
“너희들! 오랜만이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그리고 지금 안 기자가 찾던 아이들은 지금 파주 영화 세트장에 와 있었다.
14. ‘그 아역 배우’를 찾아라! (2)
“이게 촬영장이구나.”
오늘 하루 아이들의 보호자 대타로 온 준호가 주변을 둘러보며 감탄했다.
살면서 자신이 촬영장에 오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는데.
어릴 때부터 비범한 제 사촌 동생들 덕분에 촬영장에 다 와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