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애늙은이 같은 말로 태수의 말에 대답했다.
자신이 열심히 일해서 대출 끼고 산 집을 자신의 집이 아니라니.
더는 말장난 같은 아이와 어울려 주기 싫었던 태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 이름이 뭐야. 아저씨가 경찰서까지 데려다줄게. 가서 엄마 찾아달라고 해.”
태수가 아이의 손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후웅-
손이 허공을 통과했다.
눈앞에서 벌어진 믿을 수 없는 현실에 태수의 동공이 흔들렸다.
아이가 싱긋 웃었다.
“내가 말했지. 너 잡귀가 붙었다고.”
달빛 아래에서 아이가 섬뜩하게 웃었다.
커엇―!
감독의 외침과 함께 저쪽 세계에서 이쪽 세계로 배우들이 넘어왔다.
땀이 흐를 만큼 집중해서 연기한 지한이 막힌 숨을 뱉었다.
“어후. 이거 20년 뒤에는 내가 밀리는 게 아닌가 몰라.”
너스레 떠는 승우의 말에 마 감독이 바로 대답했다.
좋은 장면을 촬영한 마 감독이 두 사람을 불렀다.
“이거 봐라.”
“흠. 괜찮은데. 감독님 생각은 어때요?”
“내 생각에도 괜찮아. 조명 잘 써서 분위기가 괜찮게 나왔어. 좋아 이대로 바스트 따자.”
감독과 배우가 방금 찍은 장면에 대해 이견 없이 넘어갔다.
두 사람의 마음에 흡족하게 나온 탓이었다.
아직 촬영 용어가 익숙하지 않은 지한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바스트가 뭐예요?”
“허리 위에만 나오게 한 번 더 찍는 거야.”
“왜요?”
“편집할 때 더 극적으로 쓰기 위해서. 이거 따고 클로즈업도 할 거란다.”
“그건 또 뭐예요?”
“얼굴만 나오게 찍으려고.”
바스트, 클로즈업. 모두 처음 듣는 말이었다.
하지만 마 감독의 설명과 카메라가 찍은 화면을 번갈아 본 지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장면이 나올지 대충 알았다.
“저 방금 무섭게 웃었는데 그러면 사람들 놀라는 거 아니에요?”
“놀라라고 만든 영화야.”
“그렇구나.”
지한과 승우가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똑같은 연기를 다르게 찍기 위해서였다.
“레디 큐!”
11. 내 이름은 회귀자, 미래에서 왔죠.
“아니 글쎄, 우리 지한이가 정승우랑 같이 촬영을 했는데 말이야.”
“어머, 정승우라면 배우 정승우? 드라마 <천사의 미소>에 나온 그 정승우?”
“그래! 그 정승우.”
“세상에 그 정승우랑 같이 영화를 찍었다고?”
“맞아. 우리 애가 연기에 재능이 있는 줄 몰랐는데, 글쎄 감독이랑 주연 배우의 눈에 들었다지 뭐야?”
“진짜 대단하네. 미란아 너 아들 하나 잘 키웠다.”
하하호호.
주말 아침부터 옆집 아줌마가 놀러 왔다.
주제는 며칠 전에 있었던 지한의 영화 촬영 소식.
촬영 허가를 받기 위해서 미란에게 주절주절 떠벌린 세은 덕분에 이미란은 촬영장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어제는 회사에 따라가서 자랑질에 어울려줘야 했더니, 오늘은 집에 사람을 부르는군.’
평소에 일요일이라고 늦잠 자는 이미란이 자랑하려는 마음에 눈이 일찍 떠진 모양이었다.
오형우는 일요일이라도 오전에는 어장에 가기 때문에 자리에 없었고, 우리는 이미란의 자랑에 억지로 거실에 나와 TV를 봐야 했다.
‘그냥 방에 들여보내 주든가 아니면 밖에 나가서 놀라고 해 주든가.’
물론 이미란의 자랑이 지한의 촬영이니만큼 무리일 것 같았다.
“미란아. 너는 진짜 걱정 하나 없겠다. 큰 애, 작은 애 전부 똑똑하고 잘생긴 데다가 이제는 영화까지 출연했잖니.”
“어머 언니도 참. 뭐 애들이 날 닮아서 머리도 좋고 끼도 넘치는 거 같긴 해.”
웃기시네.
머리 좋은 거랑 얼굴은 절대 너 때문인 거 아니거든.
이거 그 목소리 녀석 덕분이거든?
이미란과 오형우의 유전자에서 이런 조각 같은 외모가 나올 것 같으냐.
“미란이 네가 끼가 많긴 하지. 네 애들이 널 보고 자라서 그런가 보다.”
“그치? 역시 내가 자식 복은 있다니까.”
“그래. 어우 애들 아빠는 요새도 술 먹고 들어오지?”
“하루라도 안 빼먹는 날이 없다니까.”
“그래도 애들 앞에서 싸우는 건 자제해. 우리 집까지 다 들리더라.”
“나도 그러려고 노력하고 있어.”
혜숙은 남편 잘못 만나서 맨날 멍을 달고 사는 미란이 안쓰러웠다.
그래도 자식 복은 있는 것 같았지만 제 몸 상하면 남겨진 자식들은 어쩐단 말인가.
“그건 그렇고 언니 우리 지한이 말이야 혹시 추가 촬영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감독님이 연락처까지 받아갔대!”
“어머어머, 진짜?”
아무래도 두 아줌마의 수다는 당분간 끝나지 않을 모양이었다.
* * *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이미란이 다니는 회사에서도, 연락 한 번 없던 친척들까지도 전부 지한이를 찾아 댔다.
처음에는 이미란이 상대하면 되는 줄 알았으나 어찌나 다들 지한이랑 전화를 하고 싶어 하는지.
다음 명절 때 큰집에 가기 싫어질 정도였다.
“뭐, 그래도 용돈이 짭짤했으니 된 건가?”
통장에 찍힌 숫자를 보고 지연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마을금고 통장에 있는 돈은 얼른 빼서 외갓집 비밀 금고에 넣어야지.
지연이 통장에 적힌 숫자를 보고 뿌듯해하는 사이 지한이 동글동글한 눈으로 누나에게 말했다.
“누나 나 또 연기하고 싶어.”
“걱정 마. 누나가 네가 연기 할 수 있도록 이미 밑밥을 깔아놨단다.”
자신만만한 누나의 대답에 지한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멋져! 도대체 언제 깔아놨어?”
“흐흐흐. 촬영 다 끝나고 나오기 전에.”
* * *
지한이 지난 삶과 이번 삶을 통틀어 인생에서 첫 연기를 펼친 그날.
분장을 지우는 지한의 옆으로 배우 정승우가 다가왔다.
오늘 하루 놀라운 연기로 마 감독의 얼굴에 무시무시한 미소를 떠올린 배우에게 승우가 말을 걸었다.
“지한아. 너는 재능이 있어. 연기 계속 해 보는 게 어떻겠니?”
“그게….”
무려 자신에게 재능이 있다고 해 준 두 번째 사람이었다.
오지한을 인정받은 기분에 지한의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그렇지만 연기를 계속하는 건 모르겠다.
엄마가 허락해 줄지도 모르겠고.
아빠한테는 말할 생각도 안 들었다.
“할 거예요.”
“! 누나.”
“내 동생은 연기 계속 할 거예요.”
“하하하. 그러면 연기하다가 모르는 게 있으면 언제든지 형한테 물어봐. 지한이 너라면 환영할게.”
“누나, 누나!”
“좋아요. 전화번호 주세요.”
“이거 영광인걸? 이렇게 예쁜 미인한테 전화번호를 다 따이고.”
조금 전까지 망설이던 모습은 어디 가고 정승우의 말에 지한이 잔뜩 들떠서 말했다.
동생이 원하면 들어줘야지.
서울에 둘이서 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필요하면 또 사촌들 좀 찾아보지 뭐.
“그래서, 아저씨 전화번호가 뭐냐니까요.”
“아, 아저씨. 그래도 아직 30댄데.”
뭘 그거 가지고 그러냐. 이쪽도 30살에서 돌아왔다.
같은 30대끼리 아저씨, 아줌마 소리 들을 때도 됐지.
“군대 갔다 왔죠?”
“재작년 제대하긴 했지.”
“빨리 갔다 왔네요. 그래서 군대도 갔다 왔으니까 아저씨 맞죠?”
“반박할 수 없구나.”
그래도 아직 어디 가면 오빠 소리 듣는데 아저씨라니.
순진무구한 어린아이의 말에 부정맥이 온 것처럼 심장이 아팠다.
눈물을 흘리며 지연에게 전화번호를 적어 준 지연에게 정승우가 화제를 돌리기 위해서 입을 열었다.
“그래도 네 동생 덕분에 살았다 이 영화 끝나고 바로 다음 작품 들어가는데 하마터면 스케줄이 꼬일 뻔했거든.”
“벌써 들어가요?”
“그래. 그만큼 이 오빠가 인기가 많단다.”
지연의 말에 승우가 으쓱해하며 말했다.
“다음에 들어갈 작품은 고등학교 선생에 관한 얘긴데. 입시 비리가 만연한 사립재단 고등학교에 가서,”
“승우형!”
“아, 깜짝이야.”
“왜 영화 내용을 흘리고 다녀요.”
“미안미안. 하지만 어차피 각 소속사들한테 시나리오가 쫙 퍼졌을 텐데.”
“그래도 관계자 외 사람들한테 흘리는 건 안 돼요.”
매니저의 말에 승우가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죄송하지만 두 분이 그렇게 말하셔도 무슨 영환지 대충 알 거 같은데요?
입시 비리, 사립 재단 고등학교, 고등학교 선생.
그 영화잖아?
“잘되겠네요. 그 영화.”
“그치? 네가 생각해도 그렇지?”
“네. 한 400만은 넘으려나?”
“400만이라. 그랬으면 소원이 없겠네.”
400만이 넘을 거다.
왜냐하면 뉴스에서 봤었거든.
영화 때문에 실제 사학 재단의 비리가 밝혀졌다면서 뉴스에 나왔으니까.
“제 느낌엔 400만 확실해요.”
“이거 믿고 싶어지는데?”
“믿으세요. 믿는다고 해서 손해 볼 건 없잖아요?”
“하하하. 맞는 말이긴 해.”
“제가 앞으로 믿음을 팍팍 드릴 테니 연락하면 꼭 받으셔야 해요.”
“그래, 그래. 연기와 관련해서 연락하는 거라면 언제든지 환영이다.”
* * *
“그때 누나가 말했던 거 기억나지?”
“응! 전화할 때 꼭 받는다고 했어.”
“지한이 너한테는 서울 올라오면 한번 보자고 했었지?”
“밥 사준다고 했어.”
“한국 사람들은 보통 만나자는 약속을 밥 먹자는 걸로 하니까 서울 올라오면 보자는 뜻이야.”
“그렇구나.”
어른들이 하는 말은 어렵다며 힘이 들어간 미간을 지연이 손으로 눌러 펴 주었다.
“자자. 인상 쓰면 주름 생긴다.”
“앗! 안 돼.”
누나의 말에 재빨리 미간에서 힘을 푸는 지한을 보고 지연이 귀엽다는 듯이 꼭 안았다.
내 동생.
가르쳐 주는 것마다 쏙쏙 받아들이고, 말도 잘 듣고, 생긴 것도 귀엽고.
누가 이렇게 키웠어, 어?
그야 물론 나지!
지한에게 또다시 연기의 꿈을 심어주기 위해서 지연이 지한의 손을 잡았다.
“자, 그럼 우리 오늘 <미녀와 야수> 빌려서 볼까?”
“응!”
* * *
서울. 정승우의 소속사 탑엔터.
작은 회사였던 탑엔터는 몇몇 스타를 일찍부터 발굴해 키운 것으로 유명했다.
현재는 S급 탑스타만 셋을 보유한 중견 소속사였다.
“그래. 촬영장에서 별일 없었고?”
“오기로 한 아역 배우가 오지 않는 바람에 스케줄이 밀릴 뻔했지만 현장에서 대체할 만한 배우를 찾아서 해결했습니다.”
“현장에서라. 그때 전화로 말했던 그 아인가?”
“네.”
탑엔터의 사장 공주민은 회사 소속의 탑배우 정승우를 담당하는 1팀 실장의 말을 듣고 고민했다.
당장 촬영이 펑크 날지 모르는 상황이었고, 회사에서 대처를 해야 했기 때문에 보고받았던 걸로 기억한다.
다행히 촬영은 무사히 끝났고 그곳에서 만난 아이의 연기에 스태프들이 감탄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아이가 왜?”
“정승우 배우가 언제든지 연기에 관해 도움을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승우가 그런 말을 해?”
연기에 관해서라면 누구와도 양보하지 않는 자신의 배우가 연기를 가르쳐주겠다고 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승우는 언제나 자신의 연기에 만족하지 못했고, 연기를 갈고닦는 것에 휴일을 쓰곤 했다.
그런 그가 그렇게 말할 정도로 관심을 보인 아이란 말이지?
“김 실장. 자네는 그 아이의 연기를 보았나?”
“죄송합니다. 그날은 제가 PD와 미팅이 있어서.”
“아니야. 그러면 현장에 팀장급이 따라갔나?”
“네. 그 친구를 데려올까요?”
“잠시 보자고 해.”
잠시 후. 변 실장이 촬영장에 따라갔던 팀장을 데리고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사장님.”
“그래. 촬영장에서 봤던 아이에 대해서 듣고 싶은 게 있는데.”
“아, 그 남매요?”
“남매?”
분명 듣기로는 연기한 아이는 남자아이일 텐데.
남매라?
보고받지 못한 내용에 공 사장이 흥미를 가지고 물었다.
“정말 특이한 남매들이었죠. 동생이 연기를 하는데 저 순간 소름이 돋았어요.
그렇게 연기하는 아역은 처음 봤어요. 오싹하면서도 뭔가 애절한 느낌도 들고.
어른도 그렇게 연기하기 쉽지 않을 겁니다.”
촬영 스태프도 그렇고 자신의 직원도 그렇고 모두 같은 말을 하는 것 보니 그 남자아이가 연기 재능이 있긴 한가 보군.
“그런데 누나 쪽도 대단했어요. 동생도 누나랑 눈 마주치고 말 몇 번 주고받더니 연기에 확 몰입하는 게!
그리고 누나가 정 배우한테 차기작으로 들어갈 영화 400만 넘을 거라고 자기 믿으라고 하는데 정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니까요.
이게 머리론 이해가 안 되는데 뭔가 분위기가 사람을 납득하게 만들어요. 물론 제 느낌 때문이겠지만요. 400만 넘을 리가 없잖아요?”
동생에게 연기에 몰입하는 법을 가르쳐 준 누나라니.
그거 또한 흥미로운 이야기다.
공 사장은 팀장의 말에 누나 쪽에도 흥미가 가는 것을 느꼈다.
“400만이라. 그게 만약 정말이라면 한 번은 믿어줄 만하군.”
“아! 그 애가 그랬습니다. 앞으로도 믿게 해 줄 테니 연락 꼭 받으라고.”
“앞으로도라. 만약 그 애를 믿는 것만으로 400만을 넘긴다면 못 믿을 게 없지.”
“사장님.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아이가 한 말입니다.”
“…그렇겠지.”
정말 400만이 넘는다면 모를 일이지만.
그렇게 된다면 자신은 어떻게 할까?
공 사장이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12. 내 동생 건드리지 마라.
지한이 연기자의 길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상 지연은 그의 앞에 생기는 걸림돌을 제거해야 하는 의무가 생겼다.
바로 오형우와 이미란.
스타에게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랑 경제 능력 제로인 어머니가 붙는 것만큼 최악의 환경은 없으니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오형우는 술 먹고 난동 피운 적이 한두 번 아니었지?’
지금 이 시대로는 가정폭력으로 가장을 구속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서양이었다면 당장에 체포되어 가족들과 떨어트리겠지만 여기는 대한민국이었다.
그러니 더 확실한 걸로 묶어야 한다.
돌아오기 전이야 어려서 뭣도 몰랐다지만 커서 이미란에게 듣기로는 오형우는 술 먹고 자살을 기도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문제는 오형우의 좆같은 가장으로서의 책임감 때문에 우리까지 죽이려 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