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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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님!”

“무슨 일이야?”

“8시까지로 오기로 했던 아역 배우가 못 온다고 합니다.”

AD의 말에 영화 <오싹한 집>의 감독 마왕석 감독이 험악한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선이 굵고 짙은 얼굴과 그의 이름이 합쳐져 촬영장에서는 마왕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매니저, 아니 배우 어머니께 연락해 봤어?”

“그게 분명 2시간 전에는 오는 중이라고 했는데 30분부터 계속해서 전화해도 안 받습니다.”

“펑크났네.”

마 감독이 이마를 짚었다.

이런 상황이면 안 봐도 뻔했다.

시간에 못 올 것 같아 연락 안 받는 거다.

“지금 당장 올 수 있는 배우 있어?”

“되는 사람이 있어도 여기까지 오려면 3-4시간은 걸릴 겁니다.”

“에이, 쓰벌!”

오늘 촬영하기로 된 배우가 연락 두절이란 소리에 스태프들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촬영이 하루 미뤄질수록 제작비는 어마어마하게 사라진다.

말없이 촬영에 안 왔으니 마 감독 성격상 새로운 배우를 뽑아야 하는데 며칠이 걸릴 줄 몰랐고, 이후의 촬영 스케줄도 복잡하게 섞이게 될 거다.

“아, 도대체 여기까지 어떻게 들어온 거야!”

“죄송합니다. 길을 잘못 들어서.”

“학생, 그게 말이 돼? 어떻게 길을 잘못 들면 스태프 차량 사이에 숨어 있을 수 있는 거야.”

마 감독은 가뜩이나 펑크 난 촬영 때문에 혈압이 올랐는데 촬영장까지 통제가 안 되자 눈앞이 시뻘게졌다.

“아아. 큰일 났다.”

“감독님 막아. 알지? 여기서 구경꾼 치면 우리 영화 바로 끝나는 거야. 알지?”

“제가 오른쪽을 잡겠습니다.”

“내가 왼쪽이다.”

마 감독이 벌떡 일어났다.

시뻘건 얼굴이 불화에 그려진 사천왕처럼 보였다.

“감독님! 감독님!”

“우리 감독님 없으면 진짜 끝나요!”

“이거 놔!”

마왕석이 젊은 스태프 둘을 몸에 달고 앞으로 걸어갔다.

“한 명 더 붙어!”

“감독님 진짜 안 돼요! 참으세요!”

“이것들이 이거 놔!”

결국 네 명이 팔다리를 붙잡고서야 마왕성의 전진을 막을 수 있었다.

소란이 있었던 스태프 차량 바로 앞까지 왔으니 막는 게 조금 더 늦었으면 9시 뉴스에 나올 뻔했다.

“너희들 이거,”

“죄송합니다!”

“잘못했어요!”

코앞에 고지를 놔두고 멈춘 마왕석은 자신의 귀에 들린 앳된 목소리에 그제야 소란을 일으킨 범인의 얼굴을 확인했다.

여고생으로 보이는 여자애 한 명. 그리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10살도 안 돼 보이는 남녀 아이 둘.

그중 마 감독의 눈에 띈 것은 어린 두 아이였다.

“너희들 고개 좀 들어봐라.”

9. 소름 끼치는 연기

“언니, 정말 이쪽으로 가도 되는 거야?”

이쪽 관계자들이 들락날락하는 곳이라고.

“괜찮아, 괜찮아.”

“….”

“누나, 안 괜찮은 거 같아.”

그래, 지한이 네 말처럼 괜찮다면 지금 이렇게 주위를 경계하면서 걸을 필요가 없겠지.

하지만 괜찮다. 여차하면 이 언니를 팔고 우린 아무것도 몰랐다고 하면 되니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지연은 지한의 손을 꼭 잡고 뒤를 따랐다.

“여기 이 트럭이 자재 옮길 때 쓰는 트럭인데 이런 데 뒤에 숨어있으면 돼. 지금은 아무도 이 트럭 안 쓰거든.”

“도대체 언닌 그걸 어떻게 아는 건데?”

“다들 장비 다 꺼내놓고 세팅해놨잖아? 뭘 더 꺼내갈 게 있겠어?”

“….”

설득력 있군.

이 트럭이 장비 싣는 트럭이라는 걸 안 것도 신기하다.

이제 막 고1이 된 주제에, 이 도시에 살면서 촬영팀 본 적도 몇 번 없으면서 어떻게 저리 잘 안데?

“자자. 쉿. 이제부터 구경하면 돼. 곧 있으면 촬영 시작 할 거야. 저기 저쪽 보여?”

“응 보여.”

“저 의자가 바로 배우의자라고 하는 거야.”

“배우의자?”

“주연이나 조연급들이 앉는 의자라는 거지. 의자에 이름표도 붙여져 있다?”

“호오?”

“우와.”

몇 번 드라마 속이나 메이킹 영상 속에서나 봤었지 이렇게 생생한 촬영 현장은 처음이었다.

꾸욱―

손에서 느껴지는 압력에 지연이 옆을 쳐다봤다.

이제는 옆선마저 날카롭게 살아있는 동생의 얼굴에 무언가 열기가 서려 있었다.

두 눈이 카메라가 비추고 있는 곳과 조명에 둘러싸인 곳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너도 그런 눈을 할 줄 알았구나.’

하고 싶은 거 평생 모르고 살았었는데.

‘그런 눈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든 도와줄 수밖에 없잖아.’

난생처음 무언가를 하고 싶어 하는 동생이었다.

이 정도는 당연히 할 수 있게 해야 했다.

“어? 뭔가 분위기가 안 좋은 걸?”

“…싸우나봐.”

잠시 한눈을 판 사이 촬영장이 난리가 난 모양이었다.

심상치 않은 촬영장의 분위기를 재빨리 파악한 세은이 동생들을 불렀다.

“얘들아. 아무래도 오늘 촬영 못 할 거 같은데. 얼른 튀자.”

“에? 진짜?”

“아쉽다….”

촬영장 분위기를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세은이 아쉬워하는 동생들을 달래며 조심히 뒤로 돌아 움직일 때였다.

“어이 거기!”

“히익.”

“헤엑!”

“아 씁, 들켰네.”

촬영장 스태프에게 걸린 세은이 인상을 찌푸렸다.

들키기 전에 나가는 게 최선이었는데 들켰다면 어쩔 수 없지.

일단 빈다.

“아, 도대체 여기까지 어떻게 들어온 거야!”

“죄송합니다. 길을 잘못 들어서.”

“학생, 그게 말이 돼? 어떻게 길을 잘못 들면 스태프 차량 사이에 숨어 있을 수 있는 거야.”

세은이 허리를 숙이며 사과하자 스태프가 머리를 짚었다.

가뜩이나 배우가 펑크 내서 스케줄을 미뤄야하는 판인데 촬영장 통제까지 안 되니 눌러왔던 짜증이 폭발했다.

지연은 세은의 뒤에서 지한의 손을 잡고 뒤로 물러나 있을 때, 쿵쿵거리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그림자가 다가왔다.

‘고릴라…?’

이거 괴수 영화였어?

커다란 괴수가 타오르는 눈동자에 사람 넷을 달고 다가왔다.

“너희들 이거,”

“죄송합니다!”

“잘못했어요!”

지연이 재빨리 허리를 숙였다.

생존 본능에서 나온 반응이었다.

누나의 사과에 지한 역시 허리를 숙이고 사과했다.

‘뭐지? 뭐야? 왜 아무 말도 없는 거지? 사람이면 대답을 하고, 괴수면 살려주세요.’

몇 년 같던 몇 초가 지나자 머리 위에서 묵직한 음성이 들렸다.

“너희들 고개 좀 들어봐라.”

* * *

“….”

“….”

촬영장은 지금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저희 신고당하지 않겠죠?”

“그러면 진짜로 큰일 납니다.”

스태프들은 마 감독 앞에 놓인 두 남매를 보고 어쩐지 마왕에게 제물을 바친 기분이 들었다.

저 마왕을 진정시킨 것은 좋으나 그 대가로 가슴팍에 닿지도 않는 아이들이 마왕의 앞에 서 있었다.

자신들은 죽어서 절대 천국에 가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살겠다고 저렇게 어린 아이들을 희생시키다니.

흡, 미안해 얘들아.

“너희,”

“흡.”

“…히끅.”

“….”

마 감독은 일평생 제 얼굴로 편했던 적이 별로 없었지만 오늘처럼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한 적은 처음이었다.

지금 제작중인 영화 <오싹한 집>은 한 남자가 집을 구매하고 거기서 일어난 기묘한 경험들을 보여주는 영화였다.

제목처럼 공포, 스릴러 장르였기 때문에 여름 상영을 노리고 크랭크인, 촬영스케줄까지 전부 잡아 놨다.

오늘을 놓치면 언제 또 장소를 대여하고, 배우들 스케줄을 조정할 수 있을지 몰랐다.

그렇다고 장면을 통째로 날려버리자니 아역 배우가 맡은 씬은 분위기를 환기해주는 역할을 한다.

주인공이 처음으로 귀신을 보게 되는 장면이기도 했고.

대사도 다 합쳐봐야 10줄이 안 된다.

얼굴은 이 애들이 더 나은 거 같으니 대사만 치게 하면 될 거 같은데.

“어, 크흠. 얘들아. 아저씨는,”

“아저씨예요?”

“….”

그래. 이게 다 아까 내가 화를 낸 죄다.

마왕석은 뭔가가 차오를 것 같은 기분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그래. 아저씨란다.”

마 감독의 말에 누나로 보이는 아이가 동생의 귀에 소곤거렸다.

아저씨란 말에 깜짝 놀라며 눈동자가 흔들리던 동생은 누나의 말에 진정이라도 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 혹시 아저씨 좀 도와줄 수 있니?”

“감독님 얘들을 써 보시려구요?”

“일단 분위기랑 얼굴은 합격인데 말이지. 테스트 좀 해 보려고.”

“시간 낭비예요. 딱 봐도 이쪽엔 발도 들여 본 적 없는 애들이라구요.”

“어차피 시간낭비 하는 거 이게 우리 황금 동아줄일지 썩은 동아줄인지 한 번 확인해 봐야 하지 않겠냐?”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에 지연은 대충 상황 파악을 했다.

아무래도 저 감독은 우리 얼굴을 보고 펑크 낸 배우 역할을 맡길 모양이었다.

동생에게 촬영장 한 번 구경시키려던 일이 어쩌다 여기까지 왔을까.

하지만 아까 뜨겁던 동생의 두 눈을 보면 한 번 경험시켜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내 동생은 완전 잘할 거니까.’

말다툼하던 두 사람 중에 결국 고릴라 아저씨가 이겼는지 옆에 있던 사람이 머리를 헤집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너희들 대사 좀 읽, 아니다. 아저씨가 말해 줄 테니까 한 번 읽어볼래?”

“그냥 읽어요? 아니면 연기하면서 읽어요?”

지연의 말에 마 감독이 부리부리한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이내 호쾌하게 웃었다.

“프하하하하! 너 그게 무슨 말인지 알고 하는 거냐?”

“알아요. 아저씨 지금 우리한테 연기시키려는 거잖아요. 유치원에서 해 봤어요.”

내 동생은 무려 왕자님이었다.

아까보다 자신이 편해진 건지 당돌하게 말하는 여자 아이를 보고 마 감독이 유쾌하게 웃었다.

그러면서 자신이 들고 있는 대본을 펴 오늘 찍을 예정이던 씬을 가리켰다.

“이 장면 할 수 있겠냐? 아, 읽어주마.”

“괜찮아요.”

지연이 마 감독의 손에서 대본을 낚아챘다.

제 손에서 대본을 가져가는 이는 감독이 되고 나서 한 번도 없었는데 신선한 경험이었다.

당대 최고의 여배우들의 어린 시절을 보는 것같이 벌써부터 범상치 않은 외모의 아이는 자신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말했다.

“10분 주세요. 그러면 제 동생 연기 보여드릴게요.”

“너는 준비 안 하고?”

마왕석의 말에 지연이 귀엽게 웃으며 말했다.

“저는 연기 잘 못해서요.”

그러면서 제 동생의 손을 잡고 촬영장에 같이 들어왔던 여고생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연기 못하긴. 내 앞에서 하는 거 보니까 엄청 잘하겠구만.”

촬영장의 마왕이 제 눈앞에 흔들리는 동아줄을 보고 씨익 웃었다.

지나가던 스태프가 흠칫 놀라 멀리 돌아갈 정도였다.

* * *

“누나 저 아저씨가 말한 것처럼 연기 할 거야?”

“응. 대신 지한이 네가.”

“내가!?”

조금 전에 누나와 거인 아저씨가 대화를 나눴을 때만 해도 반쯤 흘려듣고 있었던 지한이 처음 듣는다는 것처럼 반응했다.

“이거 보이지?”

지연이 두 사람의 팔목에 둘러진 붉은 자국을 보여주며 말했다.

그 자국을 본 지한의 눈에 자신감이 차올랐다.

“우리 둘이 함께 하면 뭐든 할 수 있어.”

“뭐든 할 수 있다.”

낯선 환경에서 당황하던 조금 전과 달리 지한이 안정을 찾고 하겠다는 의지로 불타올랐다.

“지금부터 누나가 지한이가 어떤 캐릭터를 연기할지 알려줄 거야. 그럼 지한이가 그 느낌 살려서 누나가 가리키는 글을 읽어보는 거야. 어때?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나 뮬란이 되고 싶었거든.”

지한의 말에 지연이 씨익 마주 보고 웃었다.

고마워요, 디지니. 당신이 내 동생에게 꿈을 심어 준 거 같아요.

시간이 없었다.

지연이 대본을 파라락 넘겼다.

이 영화에서 나오는 귀신은 여럿. 그중에서 동생이 맡은 역은 동자귀. 즉, 어린아이 귀신이다.

주인공이 처음 만나는 귀신.

다른 귀신을 성불시킬 때 옆에서 한마디씩 언급하는 까메오 같은 역할.

그러니까 귀신 잘 모르는 주인공을 위한 길잡이네.

“후우. 지한이 지금부터 상상해 보는 거야.”

“응.”

“뮬란이 되고 싶다고 하니까. 누나가 불러주는 뮬란 이미지를 그려봐. 꼭 뮬란 닮을 필요는 없고.”

“알았어. 내가 연기할 뮬란을 떠올리란 거지?”

“맞아. 똑똑하네, 내 동생.”

때는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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