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터지면 바로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달려가야지.
원래 1년 전에 할머니가 돌아가시지만 몇 년 간 지한이랑 같이 떼 좀 썼다.
할머니 아프지 말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한 덕분인지.
이전과는 달리 할머니가 병원을 가기 시작했고 더 일찍 병을 관리할 수 있었다.
덕분에 할머니는 지금까지 큰 병 없이 살아계셨다.
‘할머니가 조금 더 오래 사셔야 외갓집도 파탄이 안 나고, 비상금도 무사할 테니까.’
이전에는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주말마다 갔던 외갓집에 발길도 끊었지만 지금은 할머니가 살아계신 덕분에 여전히 주말마다 외갓집으로 간다.
돌아온 날 이후, 명절 때 받은 용돈을 악착같이 모았다.
이미란 때문에 전부 지킬 수 없었지만 몰래 몇 만 원씩 빼내, 지난 2년간 동생이랑 같이 두둑하게 모았다.
그리고 그 비상금은 복주머니에 넣어서 외갓집에 잘 숨겨뒀단 말씀!
“누나 나 다 먹었어.”
“어이구. 잘했어. 옷 갈아입기 전에 양치부터 할까?”
“왜 아침에 양치를 두 번이나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누나도 잘 몰라.”
“그럼 한 번만 해도 돼?”
“응. 안 돼.”
치과의사가 아니라서 잘 모르지만.
아침에 일어나서 양치하는 게 좋댔어.
자면서 입 안에 있는 세균이 번식한대.
지한의 협상을 단호하게 거절하고 지연이 밥상을 치웠다.
자, 이제 돈 벌러 가 볼까?
마왕과의 조우
“지연아! 부탁해!”
“또야? 너무 자주 맡기는 거 아니야?”
“하지만 이번에 새로 간 학원, 숙제 양 장난 아닌걸!”
지연은 자신의 책상에 와서 두 손을 모으고 부탁하는 반 친구를 보았다.
“박찬성! 너 또 어제 게임하느라 숙제 다 못했지?”
“아니야!”
“아니긴.”
남자아이들이 찬성을 놀리며 지나갔다.
지연은 두 손을 모은 찬성을 보고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계속 내가 숙제 대신 해 주다가는 학원 진도 못 따라가는 거 아니야?”
“그 정도는 아니야.”
“진짜?”
지연의 말에 찬성이 슬그머니 눈을 피했다.
그 행동을 모를 리 없었다.
말없이 계속 자신을 노려보다 찬성이 변명하듯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마도.”
어휴. 이 중생아. 너를 어쩌면 좋니.
내 소중한 고객이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네 성적이 걱정된다.
“500원.”
“아싸! 고마워!”
승낙의 뜻이 담긴 말에 찬성이 활짝 웃으면서 자리로 돌아갔다.
자신의 가방에서 학원 수학 교재와 500원을 꺼내 들고 왔다.
“자!”
“점심시간까지 해 놓을 테니까 그때 네 손으로 다시 써.”
“응!”
오늘도 500원 벌었다.
아이들의 학원 숙제를 대신 해 주는 것은 지연이 초등학교에 들어오고 나서 시작한 아르바이트였다.
고작해야 100원, 500원 정도였지만 초등학생에게는 이만큼 큰돈도 없었다.
아이들과 자신의 필체가 달라 한 번 들킨 이후, 지연은 정답 칸 위에 연하게 답을 썼다.
그러면 점심시간에 의뢰를 맡긴 아이가 답을 쓰고 지우개로 지연의 답을 지웠다.
서로에게 윈―윈이 되는 아주 좋은 거래.
“지연아아~”
“넌 1,000원.”
“어째서?!”
“영어잖아.”
“히잉.”
“귀여운 척해도 안 봐준다.”
또 다른 고객이 지연을 찾았다.
오늘도 수입이 좋구먼.
다른 반에서도 찾아오는 잘나가는 집의 사장인 지연이 싱글벙글 웃었다.
* * *
“누나아아-.”
“지한아. 오래 기다렸지?”
종례가 끝난 2학년 교실에 지한이 고개를 내밀었다.
“지연아 오늘도 동생이랑 같이 하교해?”
“응.”
“혜민이 누나 안녕.”
“지한이 안녕.”
친구와 함께 교실을 나온 지연이 보조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섰다.
혜민이 따라나서며 세 사람이 학교를 나섰다.
“아아, 이대로 같이 놀면 좋을 텐데.”
“너 이번 달부터 학원 간다며.”
“학원가기 싫은데 엄마가 웅변 학원도 가래서 억지로 끊었어.”
초등학교 앞에 가니 여러 학원의 봉고차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었다.
“아아, 학원 차 벌써 왔어.”
“혜민이 누나 힘내.”
“나도 너희들처럼 학원 안 다녀도 100점 맞으면 좋겠다.”
혜민이 두 사람을 부러워했다.
곧바로 지연이 반박했다.
“우리도 학원 가고 싶은데 말이지.”
“네가 학원 갈 게 있어?”
“합기도 학원은 가고 싶어.”
“아, 거기.”
지연의 말에 혜민이 찬성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엄마가 체력이 약해 보인다면서 태권도 학원을 끊으려고 했었지.
그냥 학원을 하나 빼 줬으면 좋겠는데.
“네 학원 차 앞에 왔다.”
“아… 싫다.”
세 사람이 학원 차들이 나란히 선 곳까지 왔다.
“그럼 난 학원 가 볼게. 내일 봐~”
“내일 봐.”
“잘 가, 누나!”
두 사람이 혜민을 배웅했다.
지한의 손을 붙잡고 집으로 가는 길에 두 사람이 도란도란 대화했다.
“지한아 우리 오늘은 가는 길에 비디오 가게 들릴까?”
“와아. 좋아. 프레쉬맨 보고 싶어!”
“훗. 오늘은 그거보다 더 좋은 걸 보여주지.”
학원을 가지 않는 두 사람에게 방과 후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둘이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 다른 친구들끼리 공을 차거나 놀이터에서 놀기도 했다.
초등학교에 들어온 이후 친구들이 학원을 다니느라 두 사람이서 노는 시간이 더 많아졌지만 하교 시간은 즐겁기 그지없었다.
딸랑딸랑.
“어서 오세요. 오! 너희들이구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아이들의 방문에 비디오 가게 주인, 진성우가 반갑게 반겼다.
벌써 몇 년째 자신의 가게를 방문한 단골이었으며, 두 아이들만 와서 비디오를 빌려가기도 하니까 인상에 남기 쉬웠다.
남매는 성우에게 인사하고 아동 코너로 왔다.
“누나, 뭐 볼 거야?”
“뮬란.”
“뮬란?”
“이거 재밌을 거야.”
“얼른 보자!”
이 누나가 널 위해서 무려 더빙판이랑 자막판 둘 다 빌려주마.
“누나, 왜 두 개 빌려?”
“이제 슬슬 영어도 배워볼까 해서.”
“어이구. 너희들 오늘은 이거 볼 거냐?”
“네!”
“오냐. 2개 빌렸으니까 특별히 모레 가져와도 된단다.”
“감사합니다!”
집으로 돌아온 두 사람이 가방을 던져놓고 비디오를 틀었다.
노래를 따라 부르거나 비디오에 나오는 동작을 따라 했다.
“아하하! 누나 이 부분 돌려서 다시 보자.”
“그럴까?”
“뮬란 멋있어. 나도 뮬란 되고 싶어.”
그러더니 옷걸이를 가져와 얍! 얍! 하고 휘두른다.
“지한아, 뮬란은 여잔데?”
“난 뮬란이 하고 싶은데 안 돼?”
“안 되기는. 하면 되지.”
그래, 남자든 여자든 무슨 상관이냐.
네가 하고 싶은 거 하면 되지.
TV에서 뮬란이 호수를 보고 노래를 부른다.
불후의 명곡 ‘I’ll Make A Man Out of You’ 다.
“아웃 오브 유~”
“오? 발음 좋은걸?”
역시 아이들의 영어 공부에는 디즈니 영화가 최고지.
십여 년 후 유행할 겨울왕국이 얼마나 유행했는지 떠올린 지연이 자신의 선택에 뿌듯해하며 웃었다.
* * *
“고마워!”
단골손님 찬성이 영어 학원의 숙제를 받아갔다.
어제는 수학이더니 오늘은 영어였다.
지연이 받는 숙제는 수학이나 영어, 사회, 과학 같은 주요 4과목.
받아쓰기나 논술은 너무 티 나고 오지선다나 답을 낼 수 있는 과목이 좋았다.
“오늘 학원 가기 전에 갈 데가 있었는데 다행이야.”
“어디 가게?”
“찬성이 쟤 오늘 촬영장 구경 간대.”
“촬영장?”
어쩐지 오늘따라 애들이 들떠 있다 싶더라니.
이 도시는 너무 작아서 무슨 일이 생기면 고작 초등학생이라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정도였다.
“지연이 너도 안 갈래?”
“어디서 하는데?”
“해양공원 근처에서 한대.”
“거기서? 몇 시 정도?”
“시간을 잘 모르지만 엄마 아빠 얘기 들어 보니까 저녁에 하나 봐.”
“그러면 나는 안 되겠네.”
“에에~”
지연의 말에 단짝인 혜민이 아쉬워했다.
아쉬워해도 어쩔 수 없다. 우리 집 사람들 성격상 그런데 가자고 해도 안 갈 게 뻔하니까.
* * *
“누나 촬영이 뭐야?”
낮에 반 친구들과 했던 것과 똑같은 얘기가 집에서도 흘러나왔다.
어지간히도 그 촬영장이 유명하긴 한가 보네.
“어디서 들었어?”
“훈이가 말해줬어.”
같은 유치원 친구, 훈이에게서 들었나 보다.
“그래서, 촬영이 뭐야?”
“우리가 TV로 보는 드라마나 비디오로 보는 영화 같은 거 만드는 걸 촬영이라고 해.”
“그럼 TV에 나와?”
“TV에 나올 수도 있고, 비디오로 볼 수도 있지.”
“우와아-!”
지한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그 모습을 보고 지연이 웃으면서 물었다.
“지한이 TV에 나오고 싶어?”
“응! 나도 뮬란처럼 TV에 나왔으면 좋겠어.”
며칠 전에 보여준 뮬란의 첫인상이 아주 좋았나 보다.
동생의 장래희망은 그날부터 계속 뮬란이었다.
그래.
내 동생 얼굴이라면 연예계에 관심을 가져도 되지.
‘선물’을 받은 날 이후 지연은 동생의 조각 같은 외모를 더 조각같이 가꾸었다.
역변 따위는 절대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체중 관리며 피부 관리, 영양 관리까지 안 한 것이 없었다.
“촬영장 구경하는 것쯤이야, 누나가 도와줄게.”
“진짜?! 우와! 근데 어떻게?”
“우리에게는 그 언니가 있잖아? 지금 바로 전화해야겠다.”
“아아. 그 누나?”
지연의 말에 지한이 더욱 선명해진 이목구비로 웃었다.
척 하면 척이라.
TV 쪽에 관심이 있는 ‘언니(누나)’는 그 한 명밖에 없었다.
촬영한다고 했지?
못해도 한 명쯤은 우리가 아는 배우가 나올지도 몰랐고,
그렇다면 연예인에 환장한 사촌언니가 제격이었다.
이제 고1이라고 했던가.
중학생 때도 축제 때 온 가수 보러 간다고 난리였으니 불과 몇 개월 만에 그 취향이 어디 가지 않았을 거다.
HOT 팬클럽에도 가입했었다고 하니까 이런 소식에는 역시 그 언니지!
* * *
“너희들 오랜만~ 어째 더 예쁘고 잘생겨진 것 같다?”
“세은 언니는 변함없네.”
“후훗.”
역시나 이 언니는 우리의 전화에 한 걸음에 달려왔고 촬영이 몇 시에 시작하는지, 배우가 누가 나오는지까지 전부 꿰고 있었다.
그보다 언니 고1 맞아? 지금 야자하고 있을 시간 아니야?
“언니 지금 8신데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고등학생은 야자라는 걸 한다던데 안 가도 돼?”
“후후후. 너희들도 나중에 크면 한 번쯤은 자유를 찾아 교문을 뛰쳐나오게 될 거야.”
야자 땡땡이친 주제에 자랑스럽게 말하기는.
하지만 오늘은 그 선택 덕분에 우리도 이렇게 구경할 수 있으니 봐줘야지.
“근데 사람 많다.”
“그러게. 안 보여.”
동네 사람들은 전부 이 촬영장으로 몰려온 것 같았다.
스태프로 보이는 사람이 열심히 통제하려고 했지만 멀찍이 물러나게 하는 게 다였다.
“언니 이래서는 하나도 못 볼 거 같은데.”
“스태프가 통제하고 있는 곳은 안 돼. 사람들이 몰리거든. 이 언니를 따라오라고.”
“언니 멋져.”
“누나 멋져.”
“호호호.”
축제 때 맨 앞에 가서 가수 보던 짬밥 어디 안 가는구먼.
이 언니에게 연락한 건 잘한 선택이었다면서 지연이 지한의 손을 잡고 세은의 뒤를 따랐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