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 (7/296)

사실 겁나 무서웠다.

씨발 무슨 뱀 길이가 내 몸만 해.

하얀 뱀이 지한의 몸을 타고 올라 팔목을 감을 때는 소름이 돋아 한이의 손을 놓을 뻔했다.

제 품에서 떠는 지연과 지한의 등을 할머니가 다정하게 토닥였다.

“잘했다. 형제끼리는 서로 챙기는기다.”

돌아오기 전에는 저 말을 하는 엄마 아빠가 미웠는데 할머니가 한 말이라서 일까?

아니면 동생을 끝까지 챙기기로 해서일까?

할머니의 말이 가슴 속으로 울려, 스며들었다.

역시 할머니가 있어야 해.

데스노트를 떠올린 지연은 막 돌아왔을 때보다 더 적극적으로 과거에 개입하기로 마음먹었다.

명단에 있는 인간들은 쳐내고, 할머니처럼 마음에 안정이 되는 사람들을 가까이 둔다.

할머니 건강 검진부터 받게 해야지.

“많이 피곤하제? 내 새끼들 가서 한 숨 자라.”

“네.”

“네에.”

“그래그래. 할매가 이따가 저녁 맛있게 해 줄그마.”

할머니의 말대로 한 숨 자기로 했다.

울다 지친 동생은 어느새 고개를 꾸벅이고 있었다.

스윽.

미닫이 문인 작은 방문을 닫고 지연이 이불을 폈다. 지한이 펴 놓은 이불 속으로 꾸물꾸물 기어 들어갔다.

“누나, 누나.”

“왜에.”

“오늘 누나 진~짜 멋졌어.”

“그래.”

“프레쉬맨 레드 같았어.”

“너도 거기서 잘 참았어.”

“…하지만 울었는걸.”

지한이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어이구. 이러다 또 울겠다.

“뱀 쫓아낼 때까지 참은 것만 해도 대단한 거야.”

“정말?”

“정말.”

“그럼 나도 나중에 누나처럼 레드가 될 수 있을까?”

지한의 말에 지연이 몸을 돌려 지한을 바라봤다.

“야.”

“응?”

“레드보다 블랙이 더 멋져. 블랙 해.”

“누나는 블랙이 더 멋져?”

“응.”

“그럼 나도 블랙 할래!”

“그래.”

이제 좀 뱀에 대한 공포가 가신 것같이 보였다.

천진난만하게 블랙이 되겠다는 지한을 보고 지연이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까 누나 따라 오느라 고생했어. 무서웠을 텐데도 용케 잘 참았고. 아주 용감했어.”

“응.”

지연은 지한이 잠들 때까지 살며시 가슴을 토닥였다.

지한의 눈꺼풀이 무겁게 깜빡였다.

“하암.”

지한의 졸음이 옮은 지연의 눈도 점점 무거워졌다.

어느새 작은방에는 조용한 숨소리 두 개가 울려 퍼졌다.

* * *

쉬익―

아, 사람 자는데.

조용히 해.

쉬이익!

조용히 하라니까.

캬아악―!

“…럽다고!”

잠을 방해하는 소리에 지연이 신경질 내며 일어났다.

“…여긴 또 어디래.”

오색구름이 뭉게뭉게 떠 있었다.

맑은 피리 소리가 지연의 귓가에 맴돌았다.

짝!

돌아온 첫날처럼 지연이 뺨을 내리쳤다.

“…아픈데?”

눈을 뜨니 신선들이 사는 세계에 와 버렸다.

아무래도 또 장르가 바뀐 모양이다.

인생 프리패스를 얻다.

“하. 내 인생 왜 이러냐. 정말.”

이럴 거 회빙환 다 시키지 왜 환생은 안 시켜.

아무 트럭이나 가져와봐, 한 방에 환생해 주지. 씨발.

지연이 무릎을 세우고 그 무릎 위에 팔을 걸쳤다.

손가락 사이에 담배마저 있었으면 누가 봐도 조직의 형님을 떠올릴 것 같았다.

천방지축 어리둥절 빙글빙글 돌아가는 인생에 지연이 허공을 보고 깊은 한 숨을 뱉었다.

“하아아아아. 그래서 여긴 또 어디냐. 몸은 아직 7살 그대로인 거 같은데. 환생시키려고 오는 저승 관문이냐? 아니면 이승과 저승의 경계?”

환생 아니면 혹시 차원 이동이냐?

뭐가 됐든 개빡칠 준비가 되어있으니 얼른 와라.

하지만 지연의 인내심은 금방 동이 났다.

“어―이. 아무도 없어요?”

나와 봐라 어딘가의 설명충.

어느 소설의 도깨비라든가,

어느 소설의 시스템 같은 놈들.

누구든 좋으니까 지금 이 상황 설명해 보라고!

지연의 기대에 부응해 뭔가가 나타났다.

스르륵―

“옴마야!”

제 엉덩이 근처를 기어가는 한 존재에 지연이 기겁하며 일어났다.

화들짝 놀라 일어나고 나서 제가 앉았던 부근을 보았다.

쉬익?

낮에 본 것과 같은 뱀이 두 갈래로 갈라진 혀를 날름 내밀며 지연을 올려다봤다.

자신을 깜짝 놀라게 했던 존재가 하얀 뱀이란 것을 본 지연은 화를 참지 못하고 양손을 꽉 쥐었다.

“하 씨. 또 뱀이냐? 오냐 오늘은 내가 뱀 잡는 날이여.”

땅꾼 한번 되어 보자.

백사가 그렇게 비싸게 팔린다면서?

내가 바로 조선의 땅꾼이다.

지연이 소매도 짧으면서 팔을 걷어붙이는 시늉을 하며 뱀을 노려봤다.

쉬익?

뱀이 한 눈을 깜빡이며 몸을 베베 꼬았다.

“뭐 하냐. 지금. 윙크한다고 해서 내가 봐 줄 거 같아?”

애완 뱀처럼 애교를 부리는 모양이었지만 분노에 눈이 돌아간 지연은 뱀이 몸을 꼬든 말든 당장 그 몸체를 곱게 묶어 주고 싶었다.

예쁘게 리본 모양으로 묶어 주마.

쉭, 쉬익! 쌔액!

손님 계속 움직이시다가 다쳐도 몰라요.

손을 뻗는 지연을 보고 뱀이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궁지에 몰린 쥐새끼처럼 한구석에 몸을 돌돌 만 뱀이 머리가 바쁘게 움직였다.

“뭐 어쩌라고.”

냉정한 지연의 모습에 뱀의 눈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하, 내가 살다가 뱀이 우는 것도 다 보네.

“야, 운다고 봐주냐?”

오늘 네가 한 짓을 생각해봐라. 지금 이 이상한 공간에 네가 나타난 것도 수상하지 그지없어.

이거 전부 네가 그런 거지?

너는 시방 무서운 짐승을 깨운 것이나 다름이 읍서!

뱀이 벌벌 떨든 말든 손을 움직여 지연이 당장이라도 뱀의 숨통을 쥐려고 할 때, 천지를 울리는 목소리가 그녀를 막았다.

[그 애를 너무 다그치지 마렴.]

“뭐, 뭐야.”

[그 아이는 우리 부탁을 들어줬을 뿐이란다.]

하늘에서 목소리가 내려왔다.

부드러우나 위엄이 있고

상냥하나 무서웠다.

공간을 울리는 목소리에 지연이 바짝 긴장해 손을 떨었다.

그녀의 상태를 알아챈 목소리가 미안하다는 듯이 말했다.

[이런. 우리 목소리를 듣기에 아직 일렀나 보구나.]

“누, 누구, 세요.”

지연이 벌벌 떨리는 몸으로 물었다.

차마 고개까지 들어서 하늘을 올려다볼 생각을 하지도 못했다.

감히 고개를 들어 올려 마주 볼 수 없는 무언가가 지연을 주시하고 있는 느낌.

한순간에 차갑고 깊은 바닷속에 빠진 것 같은 서늘함.

[우리가 누군지 알 필요는 없단다. 그저 우리가 널 항상 응원하고 있다는 사실만 알아두렴.]

“날, 날. 꿀꺽, 돌려보낸 것도. 당신, 이에요?”

[그렇단다.]

이 목소리에 항거할 생각도 들지 않았지만, 30살에서 영문도 모른 채 없애버리고 싶던 과거로 돌아온 지연은 알 수 없는 힘이 솟아 목소리에게 물었다.

“왜, 요?”

수많은 사람 중에 왜 하필 난가?

누가 돌려 달라고 했어?

나 말고 다시 한번 기회를 얻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기회조차 원치 않는 나야?

덕분에 이쪽은 지긋지긋한 어린 시절을 또 겪어야 한다고!

[너무 그렇게 생각하지 마렴. 이 모든 것을 선물이라고 생각하렴.]

“이게, 어떻게, 선물이야.”

지연이 반박했다.

누구 멋대로 사람을 7살로 돌려놓고 선물이래.

받는 사람이 하나도 안 기쁜 선물도 있냐?

[뭐든 건 네 마음먹기에 달렸단다.]

“됐어요. 다시. 가져, 가세요.”

[정말?]

“그럼, 정말이,”

[돌아가면 다시 동생을 못 볼 텐데?]

“….”

목소리의 말에 지연이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내가 의도해서 돌아온 건 아니었지만 돌아오고 나서 나는 내 동생을 끝까지 책임지기로 결심했다.

[또 버릴 거니?]

지연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목소리가 되물었다.

“…씨발.”

지연이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이자 제 팔목에 선명하게 남은 붉은 자국이 보였다.

자신과 동생이 서로 연결되어 있던 손 위로 새겨진 자국.

단단히 묶인 끈처럼 보이는 붉은 자국.

뱀 때문에 남은 자국이 눈에 아로새겨졌다.

[어때? 돌려보내 줄까?]

“됐어요.”

보내줄 생각도 없으면서 물어보기는, 애당초 더 일찍 불러주고 물어보든가.

이제 와서. 결심까지 한 마당에 그렇게 물어본다고 해서 내가 돌려보내 달라고 할 줄 알았나.

지연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웃음기 띤 목소리가 들렸다.

[후훗, 그래.]

왠지 놀리는 것 같은데?

지연은 또다시 혈압이 오르는 것 같았다.

[너무 싫어하지는 마렴. 그래도 그 자국. 선물이니까.]

“이런 고오급 문신을 다 새겨주시고. 선물이 너무 후하네요.”

억누를 수 없는 반항심에 지연이 투덜댔다.

[그 자국. 잘 이용해보렴. 동생과 함께라면 넌 뭐든지 해낼 수 있을 거야.]

“어떻게 이용하는데요.”

[어머, 시간이 다 됐네.]

“아니, 말은 끝까지 해 주고,”

[그럼 잘 가렴. 다음에 또 만나자.]

“야!”

말은 끝까지 해 주고 가야지.

한국 사람들이 제일 짜증 나는 두 가지가 뭔지 알아?

하나는 말을 하다 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 * *

“…누군지 알면 테러하러 간다.”

보아하니 힘 좀 있는 양반들인가 본데.

어느 나라의 신인지는 몰라도 누군지 꼭 알아낸다.

신전이든 사당이든 전부 불태워주마.

I’ll find you, and I’ll burn you.

꿈에서 깨고 나니, 자신이 차원 이동이 아니라 꿈을 꿨다는 것을 깨달은 지연이 조용히 타올랐다.

“으응, 누나.”

“너도 깼냐.”

지연이 지한을 토닥였다.

창문을 보니 어느새 날이 저물고 있었다.

슬슬 일어나야겠는걸. 더 자면 오늘 밤에는 잠 못 잘지도 몰라.

지연이 지한의 등을 받쳐 상체를 일으켰다.

누나의 손에 순순히 일어난 지한이 눈을 비볐다.

눈을 몇 번 깜빡인 지한은 이내 뭐가 생각이라도 난 듯이 신이 난 얼굴로 말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