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벅이는 고개가 앞으로 고꾸라질 것 같아서 허벅지를 빌려줬다.
또 손을 잡아 버렸다.
지연은 반쯤 조는 지한을 보고 결심을 한 얼굴로 말을 걸었다.
“너, 이제 누나 말 잘 들어야 해.”
“응 알았어.”
“진짜지?”
“으응.”
“약속해.”
지한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도장 꾹.”
꾸욱
“복사도 해.”
“복사까지?”
“누나 말 잘 듣는다며.”
“알았어.”
손바닥을 마주하고 복사까지 했다.
야, 넌 내가 널 버리지 않기로 한 게 얼마나 큰일인지 모르지?
너 때문에 내 인생 계획 전부 바꿔야 돼.
지연의 고민도 모르고 어느새 지한은 두 눈을 감고 잠에 빠져 있었다.
지연은 가만히 동생을 내려다봤다.
엄마도, 아빠도 버리기로 마음먹었으면서.
돌볼 능력도 되지 않는 7살짜리 꼬마인 주제에.
바람결에 동생의 머리카락이 흩날린다.
눈을 간질이기에 앞머리를 올렸다.
버리기로 했으면서….
‘이번에는 끝까지 데려간다.’
그날, 저녁에 들어간 우리는 그 여자에게 무진장 혼났다.
남동생을 버리지 않기로 결심한 날이었다.
* * *
“누나 뭐 해?”
바닥에 엎어져 스케치북에 무언갈 적고 있는 지연을 보고 지한이 물었다.
“데스노트 작성하고 있어.”
“데스노트?”
“응. 데스노트.”
데스노트가 뭔지 모르는 지한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지연처럼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서 스케치북을 바라봤다.
지한이 스케치북에 있는 글자를 가리켰다.
“이 글자 배웠어.”
“그래 읽어봐.”
지한의 말에 대충 대답해주면서 지연이 부지런하게 손을 움직였다.
“이응! 삐읍!”
“쌍비읍이야.”
“아. 쌍삐읍.”
“삐가 아니라 비.”
“쌍비읍.”
“잘했어.”
지연이 지한을 칭찬했다.
가르칠 게 많았지만 이응이랑 비읍을 읽을 줄 안다는 게 어디냐.
“자 이걸 읽으면 아빠라고 하는 거야.”
“이응 쌍비읍이 아빠야?”
“그건 네가 자음만 읽어서 그런 거고. 옆에 있는 작대기 보이지? 이걸 아, 라고 읽는 거야.”
모음은 아직이군.
새로운 걸 배웠다며 좋아하는 지한을 보고 지연은 갈 길이 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누나, 이거 왜 써?”
“말했잖아 데스노트라고.”
“데스노트가 뭔데?”
“죽일 사람.”
“히이익!”
지연의 대답에 지한이 기겁했다.
“왜? 왜 죽여? 그거 나쁜 거잖아?”
죽는다는 게 뭔지는 몰라도 나쁜 거라는 건 아는 모양이다.
“맞아 나쁜 거.”
“누나, 그런 거 하면 안 돼.”
“돼. 이 사람들이 더 나쁘거든. 그리고 진짜 죽이는 것도 아니고.”
동생마저 챙기기로 한 이상, 계획을 더 확실히 세워야 했다.
지한과의 나이차가 2살인 이상 내가 대학을 가면 어쩔 수 없이 지한이 혼자 부모의 밑에 있어야 한다.
혼자 있을 지한을 위해 보호책과 안전장치가 필요한 법이니까.
그러기 위해서 사람을 거르는 거다.
우리에게 도움이 될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빠? 엄마랑 아빤데?”
지한의 말에 지연이 인상을 팍 쓰고 말했다.
“오지한.”
“넵!”
지연의 박력에 지한이 기합이 들어가 말했다.
“누구 때리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야, 나쁜 사람이야?”
“나쁜 사람.”
“술 먹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야, 안 좋은 사람이야?”
“안 좋은 사람.”
“물건 던지는 사람은 착한 사람이야 나쁜 사람이야?”
“나쁜 사람.”
“그래. 그러니까 엄마 아빠는 나쁘고 안 좋은 사람이야.”
지연의 말에 지한이 우물쭈물했다.
아이라고 해도 뭐가 착하고 나쁜지 안다. 하물며 그게 자신에게 하는 짓이라면.
부모가 안 좋고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아이가 부모를 버리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
아이들에게 부모는 이 세상 전부니까.
“당장 엄마 아빠를 어떻게 하겠다는 게 아니야. 그냥 엄마 아빠가 나쁜 사람이란 것만 알고 있어.”
“…으응.”
하아.
당장 이 녀석을 버리지 않고 안고 가기로 하면서 제일 걸림돌이 되는 게 엄마였다.
아빠야 뭐 워낙 폭력적이니까 쉽게 떨어트릴 수 있어도, 이미란 그 여자를 떼어 놓는 건 쉽지 않았다.
얼핏 보면 자식에게 책임을 가지고 데려가는 것 같거든.
하지만 이미란은 어미로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밥을 차려주고 옷을 입혀준다. 그게 전부.
밥이야 시에서 지원해주는 걸로 버티고,
중고등학생이 옷 입어봤자 교복밖에 더 입겠는가.
이미란은 그렇게 별다른 수고를 들이지 않고 우리 둘을 키웠다.
그래놓고는 주위에 어려운 형편에도 자식 포기하지 않고 좋은 대학 보냈다면서 떠벌리고 다녔다.
힘들게 이 악물고 공부해서 인서울 한 건 난데. 왜 그 공은 이미란이 다 가져갔는지.
지금 와서 생각해도 열받는다.
“누나… 얼굴 무서워.”
“괜찮아. 너한테 화내는 거 아니니까.”
“진짜?”
“어, 진짜.”
휴우, 일단 이 정도면 어느 정도 다 작성했나?
데스노트에 있는 이름 중 태반이 친인척들이다. 쓸모없는 놈들.
우리 집이 파산하고 나서 거들떠보지도 않던 놈들이다.
그래놓고 내가 좋은 대학 가니까 은근슬쩍 찾아와서 공부법 물어봤었지.
“후우.”
분노를 한숨과 함께 날려버리고, 지연이 스케치북을 덮었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보여주고 싶지 않으니 스케치북을 매트리스 밑에 숨겼다.
“누나 우리 이제 뭐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잘 먹고 잘 놀고 잘 자는 거야.”
“나 잘 잘게.”
“먹는 것도.”
“으응….”
말꼬리를 늘리는 동생을 보고 지연이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의 동생은 제대로 먹질 못해 마른 몸이지만,
돌아오기 전 동생은 중학생 때 이미 고도비만 판정을 받았다.
이왕 끝까지 데려가기로 한 이상 죽을 때까지 건강하게 키워주지.
“누나도 같이 먹을 테니까 밥 제대로 먹어.”
“…야채 싫어.”
“야채 맛있게 먹는 법 가르쳐 줄게.”
“정말?”
“어.”
네 건강관리도 할 겸 나도 미리부터 건강 관리 해야지.
고시 공부 하고, 히키코모리 생활을 하면서 알았다.
건강 관리는 일찍 하면 할수록 좋다는 것을.
“누나 진짜 좋아.”
“그래. 그러니까 앞으로 누나 말 잘 들어. 자다가도 떡 생길 거야.”
“나 떡 싫은데.”
“…재밌는 거 보여줄게.”
“좋아!”
후우.
애 키우기 힘드네.
* * *
“이놈들을 어떻게 조지지.”
지연이 데스노트에 써진 이름을 보고 고민했다.
물리적으로 치우고 싶은데 지금의 자신은 고작 7살이고, 동생은 5살이다.
분하지만 지금의 우리들로서는 오형우와 이미란 없이 살기 힘들었다.
“얘들아 오늘은 외갓집 갈 거야.”
“외갓집이요?”
“그래. 지난주는 일이 있어서 못 갔지만 이번 주는 가야지.”
“네.”
“네.”
어릴 땐 일주일에 한 번은 외갓집에 가곤 했었지.
친가 외가 전부 같은 도시에 있어서 길어봤자 1시간 안에 갈 수 있었다.
“가서 할머니 할아버지 말 잘 듣고.”
“네.”
“저번처럼 할머니 비녀 막 손대면 안 된다?”
할머니!
초등학교 2학년 때 돌아가신 할머니를 볼 수 있다니.
너무 어릴 때 돌아가셔서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나는 매주 외갓집에 가서 할머니를 보길 기다렸다.
“누나 외갓집에 오랜만에 간다. 그치?”
“그러게.”
진짜 오랜만이야.
무려 20여 년 만에 가는 거야.
할머니도 살아 있어!
지연이 모처럼 어린애 같은 표정을 하고 토요일이 오길 기다렸다.
뱀이다아―!
“할머니이~”
“할머니이~”
“연이 한이 왔나?”
오랜만에 듣는 손주들의 목소리에 두 사람의 할머니, 점례가 두 팔을 벌렸다.
“헤헷.”
“할머니.”
할머니의 품에 안긴 두 사람이 까르르 해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엄마, 우리 왔어요.”
꾸벅.
아이들의 뒤를 오형우와 이미란이 따라 들어왔다.
술을 먹지 않은 오형우는 무뚝뚝하게 고개만 꾸벅였다.
“그래, 오 서방도 어서 온나. 안에 들어가자.”
“네에~”
“네에~”
내가 할머니의 오른손을 잡고, 지한이 할머니의 왼손을 잡았다.
우리의 손을 잡고 할머니가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었다.
할머니는 눈이 보이지 않는다.
젊었을 때, 조개 캐다가 돌 파편에 맞아 실명하셨다고 한다.
할머니는 우리가 보이지 않지만 언제나 ‘내 새끼들’, ‘내 강아지’ 라고 해 주셨다.
“보자, 안 본 사이에 얼마나 자랐는지 볼까?”
점례가 지연의 얼굴을 더듬었다.
“저 많이 자랐어요.”
할머니가 상상하지도 못할 만큼 자랐어요.
제 나이가 벌써 30살이 넘었는걸요.
지연이 말하지 못할 비밀을 속으로 삼켰다.
“할머니, 저도 밥 많이 먹고 이마안큼 컸어요.”
지한이 지연의 말을 이어 말했다.
두 팔을 벌려 동그란 원을 그리면서 ‘이마안큼’ 이라고 온몸으로 표현했다.
점례가 지한의 얼굴을 더듬었다.
할머니는 보이지 않을 텐데도 우리의 행동이 보이는 것처럼 엉덩이를 톡톡 쳤다.
“그래, 그래. 벌써 이만큼 컸네. 장하다 내 강아지.”
“히힛.”
“다음에는 더 클 거예요.”
아 할머니 냄새다.
지연은 어쩐지 눈물이 날 거 같아서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았다.
“엄마, 아버지는 어디 가셨어?”
“느그 아부지는 논에 갔지. 오 서방 오느라 고생 많았다. 시장하제?”
그러면서 할머니가 오형우에게 수박을 건넸다.
“전 괜찮심더. 장인어른 오시면 같이 묵을게예.”
할머니가 우리 온다고 잘라서 준비해 놓은 걸 텐데.
그걸 거부해?
역시 건방진 오형우.
지연이 눈을 날카롭게 뜨며 오형우를 째려봤다.
제 딸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보고 있는지 관심 없는 오형우는 슬그머니 작은방으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