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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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 안 해?”

“죄송합니다.”

“하! 뭘 잘못했는지 알겠어?”

“싸운 거요.”

“그리고.”

그리고는 무슨

지연이 두 눈을 치켜뜨려 했지만 씨알도 안 먹힐 것 같은 이 여사의 얼굴에 눈을 내리깔았다.

그래, 내가 이 집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다.

“어른들 말 잘 안 들을 거요.”

그리고 7살인 게 죄다.

30살이었으면 이딴 말 하고 있지도 않았을 텐데.

“또!”

없는데.

“또! 더 없어?”

“…네.”

“왜 없어! 누나가 돼서 동생을 데리고 갔는데 간수, 잘 안 했잖아.”

씨발.

별걸 다 트집 잡네.

오늘이 날 잡은 날이구나.

지연이 얌전히 곧 다가올 운명을 받아들였다.

아무 말도 안 하는 지연을 보고 더 열받은 이미란이 다음 타깃으로 지한을 잡았다.

“지한이 너는! 누나가 싸우는데 안 말리고 뭐 했어?!”

자신에게 향하는 화살에 지한이 잔뜩 겁에 질려 말했다.

“잘못했어요.”

“너는 남자잖아. 네가 누나를 지켜줘야지.”

5살짜리 애한테 뭘 바라는 거냐. 5살이랑 8살이랑 체급 차이가 얼만데.

지금 상대하랄 걸 하라고 해야지.

그리고 남자고 여자고가 무슨 상관이야. 너도 오형우랑 싸울 때 남자라고 안 봐 주잖아.

“내가 널 그렇게 키웠어? 어쩜 이렇게 엄마 속을 썩여! 안 되겠다. 호스 가져와.”

“네에.”

지한이 벌벌 떨면서 호스를 가지러 갔다.

베란다로 지한이 사라지고 손가락을 톡톡 치며 기다리던 미란이 참을성을 잃고 버럭 소리 질렀다.

“왜 이렇게 안 와!”

가지러 간지 얼마나 됐다고 이 여사가 다그쳤다.

“어휴. 이 애는 진짜. 굼떠가지고!”

이미란이 더는 기다리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베란다로 향했다.

그녀가 자리에서 사라지자 지연이 슬그머니 다리를 폈다.

쥐 날 뻔 했다.

“너, 너어어어-!”

베란다에 갔던 이 여사가 사자후를 터트렸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세에 지연이 후다닥 달려갔다.

달려와 본 베란다는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고무호스를 빼려다 미끄러진 듯 수도꼭지 아래에 있던 큰 대야가 뒤집어져 있었고 난간 앞에 있던 화분도 몇 개 쓰러졌다.

대야에 담겨 있던 빨래와 화분에서 쏟아진 흙으로 베란다 바닥이 진흙탕이었다.

“이 새끼가-!”

짜증이 머리끝까지 치솟은 이미란이 지한의 멱살을 잡아채 아이의 몸을 들었다.

어린 몸이 부웅 들려 두 발이 땅에서 떨어졌다.

겁에 질린 지한이 미란의 손을 잡고 바둥거렸다.

“어, 엄마. 잘못했어요.”

지한이 바들바들 떨면서 미란에게 애원했다.

“남편이고 자식이고. 그래, 더러운 내 팔자. 늬들도 나 같이 팔자 꼬인 년한테서 나서 인생 더럽게 꼬였는데 오래 살아서 뭐 하겠냐. 그냥 죽자.”

미란이 지한의 멱살을 잡고 베란다 창으로 향했다.

남매동맹

지연은 생각했다.

이 집은 자신을 옭아매는 늪이었다.

흥청망청 돈을 쓰는 여자.

이미란은 경제관념이 제로인데다가 일도 오래하지 못했다.

모든 잘못을 남편에게 넘기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자식들에게 효도를 바랐다.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여자를 뭣도 모르고 20대 중반까지 돌봤었다.

뱃일을 하면서 까맣게 탄 남자.

오형우는 소심하고 무뚝뚝해도 술이 들어가면 사람이 변했다.

의사도 말려봤지만 도통 듣지 않는 중증의 알코올 중독자.

결국에는 술에 취해 칼을 들고 가족을 위협하고 주먹으로 때리곤 했다.

지연이 이 집에서 탈출하려고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이들은 뭐라 해도 변하지 않으니까.

고작해야 30살에서 7살로 회귀한 걸로, 자신은 과거를 바꿀 수 없다.

화목한 가족 따위는 동화책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니까.

그래서 지연은 가족들을 버렸다.

그런데,

발버둥을 쳐도 미란의 손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지한이 간절하게 제 어미를 쳐다봤다.

이미 눈이 돌아간 어미를 보고 지한이 지켜보고 있던 지연에게 손을 뻗었다.

“누나-!”

“전부 죽자! 이렇게 살면 뭐 해?”

“잘못했어요!”

지금 내가 저 손을 잡지 않으면,

편해질 수 있지 않을까?

지연이 자신에게 뻗은 지한의 손을 보고 거절할 수 없는 유혹에 흔들렸다.

“이리와!”

“엄마! 엄마!!”

미란이 베란다 창문을 열었다. 한여름인 데도 베란다로 들어온 바람이 싸늘했다.

“잘못했어요―!”

지한의 눈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도대체 무엇을 그리 잘못했을까.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아이가 잘못했다고 말한다.

아니,

사실은

태어난 게 잘못이지 않을까?

저들의 미래야 뻔했다.

빚을 지는데 아무런 거리낌도 없는 여자.

갚을 능력도 생각도 없는 주제에 낭비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그런 여자를 엄마랍시고 옆에 붙어 있는 아이.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눈을 돌리고 제 스스로 늪으로 걸어간다.

바뀌지 않을 텐데….

“어음마아아-!”

퍼억!

“연이 너까지-!!”

지연이 미란을 밀었다.

미끄러운 바닥 덕분에 잠시 균형을 잃은 미란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지한에게 다가가 일으켰다.

“일어나.”

지연이 지한의 손을 잡고 달렸다.

“너희들―!”

뒤에서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진 여자가 소리를 지른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무시한다.

오직 손에 쥐고 있는 온기만을 떠올린 채 앞만 보고 뛴다.

“허억, 누, 나.”

“멈추지, 마. 뛰어!”

턱 끝까지 숨이 차오른다.

하지만 멈출 수 없다. 멈추면 그때와 변함이 없을 테니까.

타다다다.

고작해야 10살도 안 된 꼬맹이 둘. 짧은 다리로 달려봤자 어른의 손바닥 위.

멀리 못 가서 잡힐 거다.

하지만 쉽게 잡혀 줄 순 없지.

비상구 계단을 내려가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주차장 입구를 통해서 아파트를 빠져나온 아이가 재빨리 길을 건넜다.

“누, 누나.”

“허억, 헉, 하아.”

아직 안 돼.

지연이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거리를 살폈다. 조금 더 가면 대학교 정문이 있다.

학교 안으로 숨어야지.

“허억, 허억, 누, 나.”

“괜찮, 아?”

“조금만 더.”

동네 사람들이 공원처럼 쓰던 대학 부지 내로 들어가면 이 여사가 쉽게 찾지 못할 거다.

동생과 함께 대나무 숲으로 들어갔다.

작은 대나무 숲 그늘에 앉아 겨우 숨을 돌렸다.

“하악, 하악.”

“하아아. 허어,”

쏴아아.

대나무 숲이 바람에 흔들렸다.

시원한 바람에 흘렀던 땀이 식어간다.

“미안,”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를 보고 있을 때, 물기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지연이 옆을 돌아봤다.

“뭐가?”

습기가 어려 일렁이는 눈동자가 보인다.

겁에 질려서 하얬던 얼굴이 뛰어서인지 울어서인지 아니면 둘 다 때문인지 빨갰다.

“나 때문에 엄마가 화났는데, 이제 누나도 엄마한테 혼나잖아.”

“….”

그런 게 아니다.

애초에 그 여자 정신에 문제가 있는 거,

“미안해. 누나, 미안해.”

네가 사과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때도 지금도.

“내가, 흑, 내가 잘못,”

“네 잘못이 아니야.”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던 아이가 내 말에 거칠게 숨을 들이쉰다.

맺혀 있는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저러다가 숨도 제대로 못 쉴 거 같다.

“그냥, 엄마가 조금 아파서 그래.”

그래,

정신이 좀 이상하지.

어린아이에게 차마 엄마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 없었다.

분명 어딘가 잘못된 사람이지만

내 동생은 고작 5살이었다.

“조금 더 있다가 가자.”

“흐윽, 응.”

아아-

그때도 이렇게 동생의 손을 잡고 집에 간 적이 있었는데.

외할머니의 장례식.

누군가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뭘 뜻하는지 모를 때,

그냥 오랜만에 외갓집에 모두가 모인 게 좋아서 빨빨거리며 돌아다녔다.

삼촌과 이모, 엄마까지 왜 저렇게 우는지 몰랐고, 그저 어른들끼리 분위기가 좋지 않아서 우리는 작은 방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던 거 같다.

그래, 그때.

쫄래쫄래 따라다니는 우릴 보고 그 여자가 그랬었지.

‘너희들은! 필요 없어! 집에 가버려!’

아아-

지금이라면 안다.

그 여자는 분명 우리에게 화풀이를 한 거겠지.

그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인 우린 어쨌더라?

동생의 손을 잡고 외갓집에서 단둘이 집까지 갔었지.

서로의 손을 꼭 붙잡고 버스 정류장에 가서.

어린아이 둘을 귀엽게 봐 준 다정한 어른의 도움을 받아 집까지 가는 버스를 탔었지.

‘그때도 지한의 손을 잡고 갔었어.’

내 동생은 내 손을 붙잡고 따라왔고,

나는 동생의 손을 잡은 채 집으로 갔었다.

그때는 너와 나는 세상에 다시없을 남매였는데.

언제부터 그렇게 어긋나 버렸더라.

“여기서 저녁이 될 때까지 기다리자.”

“응!”

계속해서 대나무 숲에 있을 수 없어서 숲을 나와 벤치에 올라가 앉았다.

옆을 보니 동생이 반쯤 눈이 감겨 있었다.

올해 고작 5살.

죽을 뻔한 공포를 느끼고, 아파트를 뛰어다니고, 숨넘어갈 만큼 울었으니 지칠 만도 하지.

“편하게 누워.”

“으응.”

커다란 벤치는 딱딱했지만 5살 아이가 누울 만큼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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