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
150화. 귀환(2). <완.>
내가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본 것은 낡고 오래된 초옥의 천장이었다.
대들보가 삭아 당장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지구에서는 보기 힘든 초옥의 모습에 나는 일이 잘 풀렸음을 직감했다.
익숙한 무림의 자연지기가 나를 반기고 있었다.
“으윽.”
다만, 약간의 문제가 있었는지 몸이 제 말을 듣지 않았다.
몸을 일으키려던 나는 심한 고통에 신음을 흘려야만 했다.
분명 멀쩡했던 몸이 왜 만신창이가 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차원이동의 여파로 받아들였다.
아무리 생명력을 대가로 치렀어도, 차원을 넘는 일이니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
‘일단 몸부터 추슬러야겠군.’
나는 무리하지 않고, 몸을 회복하는데 전념했다.
내상을 입은 것이 아닌, 근육에 잠시 문제가 생긴 정도였기에 몸을 회복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확실히 지구와는 다른 풍부한 자연지기가 회복을 빠르게 도운 덕분에 나는 한 시진도 채 되지 않아 거동이 가능할 정도로 회복할 수 있었다.
‘헌데, 권왕과 수아는 어디에 있지? 클레이는 또 어디로 갔고?’
몸을 회복하고 주변을 둘러봤지만 함께 온 권왕이나 수아가 보이지 않았다.
딱히 그들을 걱정하는 것은 아니다.
권왕 그 양반이야 걱정할 필요가 없는 인물이고, 수아는 그 권왕이 제 목숨보다 먼저 챙길 테니.
만일을 대비해 끌고 온 클레이가 조금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나는 잠시 정신을 잃은 나를 두고 식량을 구하러 갔을 거라 여기고 초옥에서 그들을 기다렸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가면서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기감을 아무리 넓혀보아도 사람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내가 누어있는 초옥의 주인마저.
내 기감이 닿는 거리 안에 사람이라고는 오로지 나뿐이었다.
‘설마...’
“허...”
문득, 떠오른 생각에 탄식이 흘러나왔다.
내가 겪은 일들이 죽음의 위기에 직면하고 무아의 세계 속에서의 경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깨달음의 과정에서 겪는 무아지경 속에서는 어떠한 일도 불가능하지 않았으니.
모든 게 한낱 꿈이었을 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허망하고 허탈해졌다.
‘혹시 모른다. 설령 꿈이었다 해도 마냥 누워 있을 수만은 없으니.’
또 다시 하루가 지나고 나서야 나는 정신을 차렸다.
꿈이 아니라면, 잃어버린 그들을 찾아야 했고, 비록 모든 게 한낱 꿈에 불과했을지라도,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몸을 추스른 나는 곧장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지금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근처에 있는 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올랐다.
십년 동안, 살수로 살면서 무림을 주유하고 다닌 덕분에 무림 대부분의 지리는 꿰고 있다.
주변의 지리만 본다면, 위치를 파악하는 것쯤은 어렵지 않았다.
“불귀산 인근인가...”
한 번 발을 들이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 하여 불귀(不歸)라는 이름이 붙은 산.
청해와 신강이 맞닿은 경계에 있는 산이다.
내가 천라지망에 갇혔던 곳은 서안이건만, 어찌하여 이곳까지 떠밀려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장은 이곳이 내가 기억하는 무림이 맞는 것 같았다.
위치를 파악하고 산을 내려오던 내가 걸음을 멈춘 것은 한 냇가였다.
별 뜻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틀이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았기에 잠시 목을 축이기 위함이었다.
“꿈이 아니었던가.”
냇가에 비친 내 모습을 본 나는 그대로 굳어졌다.
과거와 달라진, 한낱 꿈으로 여겼던 기억 속의 얼굴이 냇가에 있었다.
“그들도 나와 같은 일을 겪고 있을지 모른다.”
꿈이 아니었음을 알았으니, 나와 다른 곳에 떨어졌을지 모를, 권왕과 수아 등을 찾는 게 우선이었다.
내가 인근의 객잔으로 방향을 잡았다.
객잔은 온갖 잡다한 인간군상과 함께 소문들이 모이는 곳.
가장 쉽게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장소가 바로 객잔이었다.
비록, 그 정보의 질이 무척이나 떨어지긴 하지만.
개방 혹은, 하오문 등의 정보단체와 접촉하기 위해서라도 일단은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가야했다.
객잔에 들어서자, 객잔 특유의 소란스러움이 나를 반겼다.
나는 간단하게 소면과 만두를 시킨 뒤, 주변의 소음에 귀를 기울였다.
참고로 돈은 인근의 산적들에게 빌렸다.
“자네 그 소식 들었는가?”
“무슨 소식?”
“사천에 사천패부라 불리는 도끼를 잘 쓰는 무인이 있는데, 실전된 극패부법을 익힌 것 같다는구먼.”
“허? 참말인가? 풍랑부법이면, 무영살에게 죽은 녹림 호법 조헌의 무공이 아닌가?”
“그렇지. 몰랐는데, 전인이 있었던 모양이야. 때문에 녹림은 물론이고, 무림맹에서도 진위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나섰다고 하더군.”
“허. 나만 무림에 파란을 몰고 올 소문을 물어 온 줄 알았더니. 자네도 만만치 않네.”
“자네도 뭐 들은 게 있는가?”
“하남에 현운자의 전인이 나타났다는 소문이네.”
“현운자?! 설마 내가 아는 그 청성의 현운자가 맞나? 무영살에게 죽었다는?”
“그렇다네. 심지어 그 전인은 여 검객이라네.”
사내들의 대화는 주변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던 내게도 들려왔다.
나는 사내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익숙한 부법과 이름에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실례지만 방금 한 얘기를 자세히 들을 수 있겠소.”
***
1년 후,
나는 산 속 깊은 곳에 있는 산채를 바라보고 있었다.
산 속에 있는 산채지만 산적들의 소굴은 아니다.
이 세계에 와서 내가 일 년이란 시간을 들여 찾은 백살문의 총타다.
“드디어.”
내가 다시 무림으로 돌아왔을 때는 1년의 시간이 지나있었고, 백살문은 살막이 사라진 자리를 대신해 단숨에 무림 삼대 살수 단체에 한 자리를 꿰차고 있었다.
그러나 백살문의 위상이 높아진 것과는 별개로, 나를 죽이려 했던, 아니 죽였던 문주는 내 시체를 찾지 못하자 두려움에 기존의 총타를 버리고 새로이 터를 잡았다.
더 깊숙한 곳으로 숨어들고, 기존의 암호체계도 모조리 바꿔버렸지만 나는 일 년의 끈질긴 추적 끝에 기어코 총타를 찾아냈다.
“문주. 오래 기다리셨소.”
수백의 살수들이 총타를 지키고 있었지만 두렵지 않았다.
비슷한 상황에서 홀로 살막의 막주 여문휘를 했던 나다.
백살문이 급격한 성장을 이루었다고는 하나, 살막의 막주를 죽인 내 위명에 기댄 것 일뿐, 실질적으로 아직 살막에 미치지 못한다.
하물며 지금의 나는 혼자가 아니다.
내 옆에는 권왕과 세 명의 팀원들이 있었다.
사천에서 표사 일을 하던 사천패부 장만식, 하남에서 여협으로 이름 날리던 김시연. 그리고 천운이 닿아 같은 장소에 떨어진 부모님과 함께 나를 찾고 있던 형, 태성까지.
처음에는 뿔뿔이 흩어졌지만 일 년이 지난 지금은 이렇게 다시 모였다.
권왕이야, 그가 무림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만으로도 소문이 파다하게 난 탓에, 클레이는 색목인의 특성상, 팀원들보다는 훨씬 수월하게 만날 수 있었고.
“바늘 가는데 어찌 실이 안 갈 수 있습니까?”
내 복수이기에 혼자 움직이려 했지만 끝내 고집을 부리며 따라온 팀원들이다.
다른 세계까지 쫓아온 팀원들인 만큼, 이번에도 떼어놓지 못했다.
“이것으로 빚은 갚은 걸세.”
권왕도 기꺼이 나를 도왔다.
이제 어엿한 한 명의 무림인이 된 수아도 제 아비를 따라나섰고.
“그나저나, 자네를 적으로 두다니, 불쌍할 지경이군.”
권왕은 농담 삼아 한 말이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다.
고작 살수 단체 하나에 현경의 고수 둘과 초절정 고수가 넷이나 움직였다.
현 무림에 알려진 현경의 고수는 무림맹주 위정천과 마교주 천태진뿐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실로 엄청난 전력이었다.
“문주는 제가 처리할 겁니다.”
혹, 빼앗길까, 권왕을 보며 당부했다.
그리고 그날, 무림의 이대 살수 단체였던 백살문이 역사에서 사라졌다.
***
그 시각.
“주작 길드가 성공적으로 공략을 마무리했다고 합니다.”
“다행이군요.”
보고를 전해들은 유인원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이번에 주작 길드가 공략에 나섰던 던전은 오랜만에 나타난 재앙 급.
그럼에도 성공적으로 공략을 마무리했다는 것은 피해가 없다는 의미였다.
원 길드와, 청룡 길드에서 박동석과 신유연이 기꺼이 지원에 나선 덕분이겠지만 참으로 다행스러운 결과였다.
“이틀 후에 있을 행사 준비도 마무리 단계만 남았습니다.”
“벌써 이틀 뒤인가요?”
주작 길드를 걱정하느라 잠시 있고 있었다.
“고생스럽겠지만 다시 한 번 전반적인 부분을 확인해 주세요. 영웅들을 기리는 날인만큼, 한 치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알겠습니다.”
유인원의 걱정 어린 지시에 직원이 힘차게 답했다.
직원에게도 이번 행사는 단순히 업무가 아니다.
진정한 영웅들의 행사를 자신의 손으로 준비할 수 있다는 사실이 영광스러웠다.
협회장의 당부가 없더라도, 최선을 다해 행사를 끝마치고 싶었다.
“그럼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그래요.”
보고를 위해 찾았던 직원이 밖으로 나가고,
“벌써 1년이나 지났군...”
집무실에 딸린 창으로 서울 거리를 바라보던 유인원이 1년 전 이맘때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태빈과 그의 일행이 떠나고 벌써 1년이 지났다.
당시에 얼마나 당황했던가.
태빈의 팀원들과 가족들까지 줄줄이 소시지마냥 그의 뒤를 따라 사라져버렸다.
유일하게 남은 것이라고는 팀원 중 하나였던 김영기와 아무것도 모르는 화우뿐이었다.
“처음에는 참 원망스러웠는데.”
후에 태빈의 형, 김태성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고, 한동안 그를 원망하기도 했었다.
하루아침에 절대 고수 둘과 S급 헌터 셋을 잃었으니.
자신과 권왕이 사라지면, 균형이 맞춰져 지금 같은 현상은 사라질 거라는 태빈의 말을 믿기는 했지만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일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김영기에게 그들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고, 백 프로의 성공이 아님에도 균형을 위해 선택의 여지가 없었음을 알고, 그들을 원망했던 스스로가 얼마나 부끄러웠던가.
다행스럽게도 태빈의 말을 틀리지 않았다.
태빈이 떠난 후, 몬스터의 출현과 급격히 늘었던 상위 던전의 발생 빈도가 빠르게 제 수치를 되찾았다.
뿐만 아니라, 던전의 생성 빈도는 꾸준히 줄어, 1년이 지난 지금은 그 빈도가 전년에 반밖에 되지 않았다.
그로 인해 헌터 계의 규모가 축소됐지만 몬스터와 던전에 대한 위협은 그보다 훨씬 줄었다.
국민의 안위를 최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협회장으로서 잘 된 일이었다.
때문에 유인원은 태빈과 권왕이 국가와 세계를 위해 희생한 영웅이었음을 알리고, 이번 행사를 준비했다.
비록, 더 이상 같은 하늘 아래 숨 쉬지는 못하겠지만 그들이 다른 세계에서 안녕한 삶을 살기를 바라면서.
***
시간이 흘렀다.
백살문이 사라지고, 몇 년 후, 무림에 정마대전이 일어났다.
과거에도 수차례 있었던 정마대전이지만 그 양상은 이전과 달랐다.
오랜 시간 힘을 길러온 마교는 섬서까지 거침없이 밀고 들어왔고, 무림맹은 최후의 일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림맹의 분위기는 밝지 않았다.
현경의 고수는 무림맹주와 천마교주로 그 수가 균형이 맞지만, 화경과 초절정 고수의 수에서 여덟과 여섯, 일천과 팔백으로 확연히 밀렸다.
“위정천.”
“천태진.”
무림맹주와 마교주가 수천의 무인들과 함께 서로를 마주했다.
총타가 있는 하남이 바로 뒤였기에 무림맹은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고, 하남만 무너트리면 마교 천하가 코앞까지 다가왔기에 마교 또한 멈출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모두를 긴장케 했던 최후의 일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정말 개입할 겁니까?”
“맹주가 와서 눈물을 흘리더군. 제발 도와 달라고. 내 개인적인 일이니, 자네까지 나설 필요는 없네.”
“수아가 선배님이 다치면 집에 들어올 생각하지 말라더군요.”
“흠...수아가?”
“예. 사실, 그 보다도 곧 태어날 아이에게 태어나자마자 피 냄새를 맡게 하고 싶지도 않고요.”
“뭐?! 정말인가? 당장 마교주에게 병력을 물리라고 해야겠군.”
멀리서 두 단체의 대치를 바라보고 있던 권왕과 내가 나눈 이야기였다.
곧 손주가 태어날지도 모른다는 말에 무림의 명운을 건 일전 앞에서도 태연하던 권왕의 마음이 급해졌다.
그리고 바로 그 날, 마교는 하루아침에 병력을 물리고 십만대산으로 돌아갔다.
현경의 고수 둘이 찾아와 한 명은 검을 겨누고, 한 명은 주먹을 쥔 채 협박을 하는데, 천하의 천마도 별 수 없었다.
“허허...”
하도 어이가 없어 천태진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는 후문이 돌았다.
***
그 날, 이후 무림에는 천태진의 허탈한 웃음 말고도 한 가지 소문이 더 떠돌았다.
엄청난 고수들이 있는 신비문파가 하나 있다는 소문이었다.
문도는 여섯밖에 되지 않지만 한 명, 한 명이 초절정 이상의 고수이며 현경의 고수가 둘이나 된다는 소문이었다.
대부분은 믿지 않았다.
아무리 기인이사들이 모래알처럼 많은 무림이지만 전 무림을 통틀어도 둘뿐인 현경의 고수가 한 문파에 있다니, 그저 마교의 이해할 수 없는 퇴각에 생겨난 허황된 소문으로 치부했다.
그러나 무림맹주와 마교주, 그리고 그들의 후계자와 소교주는 알고 있었다.
그 소문이 결코 허황된 것이 아닌, 진실임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