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8
148화. 균형(3).
“혹시, 무림으로 통하는 문도 열 수 있는 건가?”
“그러타.”
마지막 희망을 잃고, 모든 것을 체념한 클레이는 순순히 대답을 내놓았다.
차원의 문을 여는 것은 서책의 주인 된 자의 의지다.
즉, 서책을 손에 든 자가 원하는 세계로 통하는 문을 열 수가 있다는 뜻이다.
덧붙여 차원에 따라 필요로 하는 힘은 다르다고 했지만 무림은 이 세계가 타이탄과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세계.
필요한 힘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또한 통로를 이용하는 데에 인원제한은 없었다.
클레이도 기사 스물과 함께 돌아가려고 했던 만큼, 허용된 시간이 수백수천이 오가기에는 무척이나 짧을 뿐이다.
“어떻게 할 건가?”
권왕이 나와 서책을 번갈아보며 물었다.
직접 경험해 봤듯, 서책이 필요로 하는 힘은 현경의 내공으로도 감당할 수 없었다.
결국, 차원의 문을 열고자 한다면, 일천을 희생시키는 방법밖에 없다는 말이다.
비록, 일천의 생명을 제물로 삼아야 하지만 죽음 외에 선택지가 생겼다.
“모르겠습니다.”
목내이와 같이 말라 죽어버린 일천의 생명을 직접 봤다.
나 한 사람, 아니 권왕이 더해진다 해도 두 사람의 생명과 일천의 생명의 저울질하는 일이다.
당장 결정을 내리는 것은 무리였다.
“하긴,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
권왕은 내 대답에 의외라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태빈, 무영살은 백 이상의 생명을 돈 몇 푼에 앗아간 살수다.
이번에는 일천으로, 그 수가 열 배에 가깝게 늘어나긴 했지만 이렇듯 망설임을 보일 줄은 몰랐다.
사실, 따지고 보면 정상적인 반응이다.
자신 또한 무인으로 살아오면서 손에 수많은 피를 묻혔지만 일신을 위해 일천을 희생시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
“조금 더 생각해 보기로 하세.”
“예.”
과연 내가 어떤 결정을 내리게 될지는 모르지만 당장 권왕과의 일전을 피한 것만으로도 의미는 있었다.
아직 권왕과는 승부를 점치기 어렵다.
최근 비무에서 간신히 동수를 이루긴 했지만 본 실력이라기보다는 운에 의한 결과였다.
나도 마찬가지지만 권왕도 전력을 다하지 않았고.
내가 생각하기에 지금 생사결을 벌였을 때, 내가 승리 할 확률은 약 삼할.
암살을 시도 한다면, 이할이 더 해져 오할이 되겠지만 그래봐야 오십대 오십의 싸움이다.
상황에 떠밀려 불확실한 승부를 벌이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자네의 결정에 따를 생각이네.”
“예?”
“어차피 여벌로 얻은 목숨이지 않은가. 덕분에 수아도 만날 수 있었고. 수아가 살아갈 세상을 아비가 망쳐서야 되겠는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내게 권왕이 미소를 지어보였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나를 방심하게 만들기 위한 거짓이 아니다.
권왕은 진심으로 내 선택을 따를 생각이었다.
하긴, 권왕의 성격상, 나와 싸우게 되더라도 정면으로 부딪치고 말지, 이런 치졸한 수를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
“크흠...”
잠시간의 훈훈한 기류 뒤에는 어색함이 찾아왔다.
권왕이 그 분위기를 이기지 못하고 헛기침을 흘렸다.
“이 자는 일단 살려두도록 하겠습니다.”
나 또한 더 이상 권왕을 바라보지 못하고 클레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몇 대 맞기는 했지만 아직 멀쩡히 숨이 붙어 있는 클레이다.
살려두길 잘했다.
덕분에 어색한 분위기를 모면했다.
직접 차원 간의 통로를 열었던 만큼, 아직 살려둘 가치도 있었고.
“그럼, 일단 돌아 가세나.”
나와 권왕은 그렇게 독일에서의 일을 끝마치고 한국으로 향했다.
처음에는 돌아가지 않으려 했다.
지금도 나와 권왕의 행보에 따라 몬스터와 상위 던전이 생성되는 것을 수차례 봐왔다.
우리 둘은 지금 움직이는 폭탄과 같다.
스스로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나와 권왕이 위험해질 리는 없으나, 주변 사람들은 목숨까지도 위태로울 수 있다.
때문에 오지, 사막에 처박혀 마지막을 준비하려 했다.
하지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시간은 딸아이와 보네고 싶군.”
권왕의 뜻을 막을 수는 없었다.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름에도 먼저 한 발 양보한 권왕이다.
주변을 위험하게 만들긴 하겠지만 사실, 나 또한 마음은 권왕과 같았다.
***
살막과 타이탄이 사라지고 유럽과 아시아는 한 층 더 혼란스러워졌다.
하지만 인간들의 문제일 뿐, 갑작스런 몬스터의 출현과 상위 던전의 생성 빈도는 확실히 줄어들었다.
균형에 관한 요한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음이 증명됐다.
콰앙. 서걱.
키엑! 크륵..
그러나 여전히 균형은 어긋나 있었다.
나와 권왕 이외의 모든 이계의 존재가 사라지며 그로 인해 발생되는 문제의 빈도는 줄었지만 균형이 무너진 시간이 길어지면서 그 격은 한층 더 높아졌다.
튀어나오는 몬스터들은 더 이상 하위 헌터들만으로는 막아 낼 수 없을 정도고, 생성되는 상위 던전들 또한 S급 헌터 두셋은 포함되어야 간신히 공략이 가능할 정도다.
“멀지 않은 곳에서 동기화가 일어난 모양입니다.”
때문에 지금은 대부분의 던전을 동기화가 일어난 뒤에야 처리하는 추세다.
무리한 공략으로 S급 헌터를 잃을 수는 없으니.
경공을 펼쳐 나아가는 나와 권왕은 하루 사이에도 다급히 움직이는 헌터들을 몇 번이나 볼 수 있었다.
여전히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몬스터와 던전에 맞서야 했다.
“거들려는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당장 눈앞의 헌터들에게 도움은 될 수 있지만 우리가 선택을 미루는 만큼, 뒤에는 더 큰 위험이 찾아온다.
이런 곳에서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
“그럼, 결심이 서면 말해주게나.”
권왕은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수아에게로 떠났다.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다.
당장 내일이면, 더 이상 결정을 미루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권왕에게는 마지막으로 딸아이와 보낼 일분일초가 소중했다.
“예.”
나 또한 붙잡아온 클레이를 원 길드에 맡겨 두고 곧장 가족에게로 향했다.
비록 가짜지만 나에게 진짜 가족의 소중함을 느끼도록 해준 이들.
살수가 아닌, 평범한 삶을 살았다면 이렇지 않았을까 싶었다.
물론, 고작 닷 냥에 자식을 팔아버린 과거의 부모에게서는 기대하기 힘들겠지만.
“뭐야?! 지금 왔냐?”
소식도 없이 불쑥 집으로 돌아온 나를 살짝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형이다.
대수롭지 않은 듯 말을 이었지만 형의 눈에는 나의 무사함에 대한 안도가 담겨 있었다.
내가 살막과 타이탄을 없애러 다녀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
“이제 다 끝난 거야?”
“어.”
나는 두 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남은 일이 있지만 내가 이 세계에서 해야 할 일은 모두 끝났다.
이제 떠나든가, 사라지든가 하는 내 선택의 문제만 남았을 뿐이다.
“어머니랑 아버지도 곧 오신다니까 같이 밥이나 먹자.”
형은 그 말만 하고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며칠 만에 본 동생이지만 형제들이 으레 그렇듯, 살아있는 것을 확인했으니 됐다는 식이다.
나 또한 형의 반응에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형을 걱정했다.
방으로 들어가는 형은 꽤나 초조해 보였고, 손에는 핸드폰이 잘게 진동을 울리고 있었으니.
아마 김시연에게 온 연락일 것이다.
***
며칠간의 고생으로 피와 먼지로 얼룩진 몸을 씻어내고, 옷을 갈아입고 나니, 부모님이 차례로 돌아오셨다.
“아들~! 언제 왔어? 말이라도 하지. 그럼 맛있는 거 해놓고 기다렸을 텐데.”
“일은 잘 해결 된 거냐?”
환한 미소와 함께 반겨주는 어머니와 겉은 조금 무뚝뚝하지만 속내는 누구보다 아들을 생각하는 아버지.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은 내가 과거와 현재의 고민을 잊을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었다.
우우웅...
그러나 내게 허락된 시간은 길지 않았다.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이 불안한 소음을 만들어냈다.
김원철과 협회 등을 제외하면, 내게 연락을 해올 사람은 많지 않다.
애초에 내 번호를 알고 있는 이들조차 손에 꼽히니.
그리고 내가 가족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그들이 사사로운 일로 연락을 했을 리 없었다.
“서초구 일대가 황무지로 변했고, 수백의 몬스터들이 튀어나오고 있습니다. 헌터들을 급파하긴 했지만 현재의 전력으로는 많이... 버거운 상황입니다.”
역시나,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나와 권왕이 돌아오자마자 일이 터졌다.
그래도 하루, 이틀의 여유는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허락된 시간은 내가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짧았다.
“바로 가야되니?”
“예.”
나는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는 부모님에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가지 않는다면, 더 많은 이들이 죽고 다칠 거다.
과거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을 일.
그러나 가족과 여러 인연을 만들어가며 감정이 생겼고, 책임을 알았다.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
“자리 지켜!”
“이쪽으로 지원 좀 보내!”
“다른 쪽도 마찬가지야! 일단 버텨!”
서초에 도착하니, 이미 전투가 한창이었다.
전선은 치열했고, 후방은 부상을 입은 헌터들의 신음이 가득했다.
크와아.
황무지의 환경과 함께 튀어나온 몬스터는 이족보행을 하며 네 개의 팔과 네 개의 눈을 가진, 지금껏 어느 던전에서도 보지 못했던 생소한 몬스터였다.
크기는 4~5m에 불과하지만 개체 마다 느껴지는 기운은 1급 몬스터에 드레이크를 넘어섰다.
네 개의 주먹이 휘둘러질 때면 A급 탱커들조차 두세 걸음은 밀려났고, 여섯 개의 눈에서는 물, 불, 바람, 땅, 네 가지 원소 마법이 제각기 펼쳐졌다.
근접전과 원거리 공격이 자유로운 몬스터가 수백 마리.
급파된 헌터들만으로 어쩌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서울에 기반을 둔, 청룡 길드가 나선 덕분에 간신히 버티고만 있었을 뿐, 당장 방어선이 무너져도 이상할 게 없어 보였다.
쐐애액!
위태로운 상황에 나는 지체 없이 검을 날렸다.
드레이크를 상회하는 힘을 가진 몬스터지만 내 검에 담긴 당해내지는 못했다.
막 쓰러진 헌터를 내려 치려던 놈의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생겨났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검은 몬스터 하나를 꿰뚫은 것에 그치지 않고,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휘어져 주변의 몬스터를 휩쓸었다.
촤아악.
이기어검.
검은 내 손을 떠났지만 내 의지 하에 움직이며 몬스터들을 베었다.
“김태빈 헌터!”
“지원군이 왔다! 원 길드와
내 참전에 이어 팀원들과 원 길드의 헌터들이 속속 도착했다.
최근 발생하기 시작한 현상들로 인해, 헌터들이 항시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발 빠른 대처였다.
“살았다...”
정예들이 나서면서 후방으로 밀려난 헌터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를 제하고도 앞서 저지선을 구축했던 청룡 길드와 지원을 온 팀원과 원 길드까지.
S급 헌터만 여섯이 포함된 전력이다.
나에 이어 각 길드의 정예까지 투입되고 나자, 상황은 빠르게 정리되어 갔다.
크으...
몬스터 한 마리가 내 앞에서 애처로운 신음을 흘리며 죽어가고 있었다.
흉포하게 빛나던 눈동자가 점차 생기를 잃어가며 꺼져갔다.
‘혹시...’
꺼져가는 생명을 보며 문득 인간의 생명력이 아닌, 몬스터의 생명력을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책도 그렇고, 클레이도 차원의 문을 열기 위해 막대한 힘이 필요하다고만 했을 뿐이다.
그 힘이 꼭 인간의 생명력이라고 한 적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