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
147화. 균형(2).
살막의 살수들을 죽인 후,
나와 권왕은 곧장 유럽으로 향했다.
목표는 교황청이 있는 독일.
중국 국경선을 넘고, 폴란드에 가까워졌을 때부터 경공을 펼쳐 움직였다.
아직 독일까지 상당한 거리가 남아있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살막과 타이탄의 전쟁은 끝났지만 서로에 대한 적대심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두 단체의 다툼은 유럽과 중국, 국가들마저 적대 관계로 만들었고, 아시아인은 더 이상 정상적인 경로로 유럽의 국경선을 넘을 수 없었다.
사실, 말이 도보지, 나와 권왕의 경공은 웬만한 교통수단보다 훨씬 빨랐다.
늦어도 이틀이면, 교황청에 닿을 수 있었다.
***
“자네는 이계의 존재들을 모두 지울 생각인가?”
막 독일의 국경선을 넘었을 때, 권왕이 문득 물음을 던져왔다.
“예.”
“그 존재들에는 나 또한 포함되겠지?”
...끄덕.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살막의 살수들을 죽이고, 다음 목표를 타이탄의 잔존세력으로 잡았다.
조금만 눈치가 있다면, 이후의 내 목적을 모를 리 없었다.
“역시...이유가 알고 싶은데, 말해줄 수 있겠나?”
“균형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이 세계는 파멸을 맞이하고 말 것입니다.”
나는 요한이 죽기 전에 했던 말과 내 생각, 그리고 그간의 사건들을 차례로 열거하며 이 세계에 무림과 타이탄의 존재들이 미치는 영향에 대해 설명했다.
“으음...”
설명이 끝나자, 묵묵히 듣고 있던 권왕이 길게 침음을 흘렸다.
나는 그런 권왕을 보며 조심스럽게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결국, 자신마저 목표로 한다는 것을 안 이상, 권왕이 어떤 식으로 나올지 알 수 없었다.
“그럼, 홀로 남게 될 자네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그건...”
“...알겠네. 일단 타이탄의 일을 마무리 하지.”
나는 미처 대답하지 못했지만 권왕은 내 눈과 미세한 표정의 변화로 대신 대답을 들었다.
권왕이 굳이 듣지 않아도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얼마 지나지 않아 나와 권왕은 독일에 있는 티탄교의 교황청에 도착했다.
서쪽의 반란세력과 남동에도 적을 두고 대치하고 있는 상황 때문인지, 교황청 인근은 종교의 희망적이고 활기찬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음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래도 한 때, 유럽 전역을 아우르는 종교의 본산답게 교황청 내부에는 일천이 넘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럼, 잠지 후에 뵙겠습니다.”
나는 곧장 권왕과 구역을 나눠 행동을 개시했다.
요한을 대신해 새로이 교황이 된 클레이를 포함해 약 이십 명.
사제였던 클레이는 무력이 전무하고, 남아 있는 이들도 일반 기사단원 수준에 불과하기에 특별한 계획은 필요치 않았다.
“예배시간이라도 되는 건가.”
분명 교황청 내부에는 일천이 넘는 기척이 느껴지고 있건만, 내 시선이 닿는 곳에는 개미새끼 하나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마땅히 있어야 할, 경계 병력조차 없었다.
교황청에 들어서기 전에 느껴졌던 기척은 예배당에 전부 뭉쳐있었다.
나는 일단 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 향했다.
“진인가?”
은밀히 걸음을 옮기던 나는 순간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진법에 대해 공부하고, 진을 경험했을 때의 느낌과 유사했다.
주변의 기가 자연의 섭리에 어긋나게 뒤틀려가고 있었다.
나는 걸음을 빨리했다.
경계 병력이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았기에 조금 과감하게 움직였다.
제갈민에게 명부와 함께 받은 정보로 교황청의 구조는 꿰고 있었기에 순식간에 예배당에 도착할 수 있었다.
“거룩하신 타이탄님. 종 클레이가 간절히 간청하노니....”
예배당 안에는 클레이가 책 하나를 손에 든 채, 알 수 없는 말을 끊임없이 중얼거리고 있었고, 일천의 인간들이 클레이를 중심으로 둥글게 원을 그린 채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나와 권왕이 안으로 들어섰음에도 클레이는 중얼거림을 멈추지는 않았고, 인간들의 기도도 계속 이어졌다.
기사들 또한 마찬가지.
분명 몇몇은 우리를 봤음에도 지금의 행위가 더 중요하다는 듯, 열중했다.
“무슨 일을 꾸미는지는 모르겠지만 빨리 처리합시다!”
“알겠네.”
나는 어느새 내 곁에 선 권왕에게 소리치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뭔가 좋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클레이의, 저들의 행위를 막아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의 앞을....크악.”
“밝혀...커억!”
일천의 인간들은 내 검과 권왕의 주먹이 자신의 목을 베고, 심장을 부수는 순간까지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뒤늦게 이십 가량의 기사들이 우리 앞을 가로막았지만 일초지적도 되지 않았다.
무방비한 인간을 죽이는 것이나, 저항하는 기사를 죽이는 것이나 들이는 힘과 시간은 별반 차이가 없었다.
“...길을 비춰주소서.”
나와 권왕이 인파를 뚫고 클레이의 앞에 섰을 때, 결국 그는 기도를 끝마쳤다.
“하하하. 늦었구나. 내가 가는 길에 제물이 되거라.”
내가 자신을 죽이러왔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두려워하는 기색은 없었다.
기도를 마친 클레이는 오히려 웃음을 터트리며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동시에 클레이의 손에 들린 서책이 저절로 휘리릭 소리를 내며 넘어가며 책장 사이로 찬란한 광채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
나와 권왕은 경계심을 잔뜩 끌어 올린 채, 광채를 바라봤다.
클레이가 나와 권왕을 앞에 두고도 마지막 순간까지 희망을 가질 수 있던 이유다.
그 만큼,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을 터.
방심할 순 없었다.
“기가!!!”
광채가 폭발하거나, 그 사이로 무언가 튀어 나오거나 하지는 않았다.
서책은 주변의 기를 무서운 기세로 빨아들였다.
자연의 상태에 머무는 기뿐만 아니라, 생명체 본연이 가진 생명력까지.
기라면, 가리지 않고 모조리 집어 삼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기도를 올리던 일천의 인간의 피부가 바싹 마르고, 머리가 희게 새었다.
생명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서책은 기운을 빨아들이기를 멈추지 않았다.
노인이 되었던 인간들은 수초 만에 미라처럼 말라버린 시체가 되었다.
“일다 빠져나가세!”
무한에 가까운 내공으로 버텨내곤 있었지만 뭉텅뭉텅 뜯겨져 나가는 기에 권왕이 소리쳤다.
더 있다가는 미라가 된 인간들과 같은 꼴이 될 수도 있었다.
“잠시.”
나는 지금의 광경을 환희에 찬 얼굴로 바라보는 클레이의 목덜미를 잡았다.
예배당 안에서 유일하게 기를 빨아들이는 서책의 영향을 받지 않는 클레이였다.
“악! 안 돼!”
클레이가 비명을 질러댔지만 사제에 불과했던 그가 내 힘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쾅!
왔던 길을 되돌아 갈 새는 없었다.
권왕이 단숨에 벽을 부숴냈고, 나와 권왕은 뚫린 벽을 통해 단숨에 교황청 밖으로 내달렸다.
내 손에는 계속해서 비명을 질러대는 클레이가 개처럼 끌려오고 있었다.
***
다행히 서책의 영향은 교황청 안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내 등에는 싸늘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수갑자의 내공을 지니고 있음에도 고작 수초 만에 삼분의 일 가량을 빼앗겼다.
조금만 더 지체했다면, 위험했을지도 몰랐다.
“허...”
권왕이 작게 탄식을 흘렸다.
무림에도 별의 별 기사가 다 있지만 지금과 같은 일은 듣도 보도 못했다.
일천의 생명을 집어삼키는 서책이라니.
서책의 여파는 우리가 빠져나오고 삼십 초 가량 더 지속된 뒤에야 사라졌다.
그리고 기의 폭풍이 몰아치던 교황청은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해졌다.
내 시선이 내 손에 잡혀있는 클레이에게로 향했다.
클레이는 득의양양하던 표정은 사라지고, 망연자실한 얼굴로 교황청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짓을 한 거지?”
“아아...”
으드득.
클레이는 대답대신 표독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의 분노와 원망이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짜악!
내 손이 클레이의 뺨을 때렸다.
“컥!”
단 번에 입술이 터지고 하얀 알갱이 몇 개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 고통이 클레이의 정신을 일깨웠다.
짜악!
다시 한 번 피가 튀었다.
“자까아...”
터진 입과 잃어버린 이빨들로 인해 발음이 이상했지만 클레이의 말을 알아듣는데 문제는 없었다.
“마하게다.”
고통 앞에서 한 없이 약해지는 게 인간이다.
인간이 강인한 정신력을 지녔다면, 애초에 고문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도라가려 해따. 타이타느로...”
클레이는 어눌한 발음으로 방금 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 입을 열었다.
***
서책이 보인 기사는 놀랍게도 클레이가 원래 살던 세계, 타이탄으로 돌아가기 위해 벌인 일이었다.
요한의 사후, 그의 유품을 정리하던 클레이는 평소 요한이 중요한 것들을 모아놓은 곳에서 어울리지 않는 낡은 서책 하나를 발견했다.
클레이는 호기심에 서책을 펼쳐보았고, 놀랍게도 차원을 넘을 수 있는 방법이 담겨 있었다.
요한이 살아 있었다면, 결코 클레이가 볼 일이 없었을 내용이었다.
그러나 클레이는 보았고, 그 순간 고민에 빠졌다.
요한의 의지를 이어 이곳에서 타이탄의 뜻을 펼칠 것인지, 아니면 고향으로 돌아갈 것인지.
고민은 길지 않았다.
신, 타이탄만큼이나 믿었던 요한은 죽었고, 기사단도 전멸과 다름없는 피해를 입었다.
남은 것은 일개 사제에 불과한 자신과 기사단이라 칭하기도 부끄러운 이십의 기사들 뿐.
그렇기에 클레이는 타이탄으로 돌아가길 원했다.
하지만 서책에는 방법만 담겨 있을 뿐, 곧바로 차원을 넘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차원간의 통로를 열어야 했고, 그 통로를 열기 위해서는 정확히 일천의 생명력에 버금가는 막대한 힘이 필요했다.
요한은 혼자 힘으로 통로를 열고 지구로 넘어 왔지만 클레이에게는 그와 같은 힘이 없었다.
그렇기에 어쩔 수 없이 일천의 생명을 제물로 삼은 것이다.
본래 기사들도 함께 돌아갈 계획이었지만 나와 권왕이 나타나며 틀어졌고, 자신마저 실패했다.
“너희마 아니어쓰면...”
설명을 마친 클레이가 원망 섞인 눈빛을 보내왔다.
“차원 이동이라니. 그게 사실이냐?!”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나는 놀라움에 그 눈빛 따위는 신경도 쓰지 못했다.
클레이가 한 말의 진위여부만이 중요했다.
“놀랍군.”
권왕도 말투는 덤덤해보였지만 표정은 그가 얼마나 놀랐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일단 서책을 가져와 보겠네.”
“부탁드리겠습니다.”
클레이의 말을 신뢰할 순 없다.
교황청에 남아 있는 서책을 직접 확인해봐야 했다.
***
“한 번 보세나.”
권왕이 서책을 가지고 오는데는 일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권왕은 말과 동시에 서책을 펼쳐 보았다.
나도 그의 옆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음...”
아쉽게도 서책의 내용을 읽을 수는 없었다.
중원의 언어는 당연히 아니었고, 흔히 보던 이 세계의 언어로도 보이지 않는 글자가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페이지마다 섞여있는 그림들을 통해 대강의 내용을 유추할 수는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원을 올리고.
세계로 보이는 두 개의 원이 문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이를 오가는 사람 형상의 그림들이 차례로 이어졌다.
글자는 읽을 수 없지만 클레이의 말이 거짓이 아닌 듯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