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살수다-146화 (146/150)

# 146

146화. 균형.

오십이었던 살수들은 빠르게 줄어갔다.

잡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밤잠이 없는 몇몇 살수들은 기존해 파악해두었던 위치를 벗어나기도 했고, 간혹 심부름을 시킨 헌터들이나 기녀들과 함께 있는 경우도 있었다.

나는 소란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들을 죽였다.

권왕은 어떻게 처리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를 맞이한 이들은 재수가 없는 이들이었다.

“적이다!”

“적이 침입했다!”

최대한 은밀히 움직였지만 수천 속에 섞여 있는 오십을 죽이는 일이다.

끝까지 발각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어디선가 시신을 발견한 모양인지,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곳곳에서 헌터들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내가 맡은 스물의 살수 중, 제갈민을 제하고 다섯을 남겨뒀을 때였다.

“억...”

사방에서 헌터들의 다급한 발소리가 이어지고, 남은 살수들도 침입자를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나는 내 할 일을 멈추지 않았다.

막사 위에 올라 침입자의 흔적을 찾던 살수 하나가 내가 날린 암기에 맞고,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엇! 위다!”

“암기에 맞았다!”

막사 주위에 있던 헌터들이 뒤늦게 흉수를 찾아 사방을 두리번거렸지만 나는 이미 다음 목표를 향해 떠난 뒤였다.

사라진 살수에 이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날아온 암기까지.

헌터들은 흉수를 찾기는커녕, 혼란만 가중되어갔다.

***

아쉽지만 살수 전부를 처리하지는 못했다.

셋을 놓쳤다.

하나는 헌터들 틈에, 다른 둘은 제갈민의 막사로 향했다.

눈치가 빠르거나, 운이 좋은 이들이다.

나는 세 명의 살수를 뒤로하고 곧장 제갈민의 막사로 향했다.

제갈민의 막사로 향한 둘은 제갈민과 함께 처리하면 되고, 다른 하나는 제갈민을 먼저 처리한 뒤에 손을 써도 늦지 않았다.

“놈들이 주석님을 노려올 것이다! 한 순간도 눈을 떼지 마라!”

침입이 발각된 탓에 제갈민의 막사는 수십의 헌터들이 물샐 틈 없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헌터들뿐만 아니라, 사이렌 소리를 듣고 급히 모여든 살수들도 있었다.

막사 주변과 안에 은밀히 몸을 숨기고 있는 살수는 내가 놓친 둘이 전부가 아니었다.

다섯.

권왕이 미처 처리하지 못한 살수들인 듯했다.

그리고 하나뿐인 특급 살수의 존재도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느껴졌다.

척.

어둠 속에서 제갈민이 있는 막사를 주시하고 있는 내 옆에 누군가 내려섰다.

나는 놀라거나 무기를 꺼내들지 않았다.

“넷을 놓쳤네. 보아하니, 미안해하지는 않아도 될 것 같군.”

권왕이었다.

권왕도 곧바로 막사 안팎의 살수가 자신이 놓친 넷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자신이 놓친 넷 중, 셋에 둘이 더해졌다.

혹, 자신이 일을 그르친 것은 아닌가 했는데, 기우에 불과했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일입니다. 그나저나 살수들과 제갈민을 처리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렵게 생각할 거 있나. 그냥 뚫고 가세나.”

역시, 수천의 정병을 눈앞에 두고도 물러섬이 없던 권왕이다.

하물며 지금은 당시보다 한 단계 올라선 현경의 경지.

다시 그 때의 병사들을 만나도 이길 수 있을 정돈데, 고작 수십의 헌터와 여섯의 살수를 두고 고민 따위는 하지 않았다.

“예.”

권왕이 이러한 대답을 할 거라는 건 예상했다.

놓친 살수들을 무리하게 처리하려 하지 않은 이유기도 했다.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숨거나, 도망치지만 않는다면, 언제든지 처리할 자신이 있었다.

“그럼, 먼저 가보겠네.”

오랜만에 힘을 풀어 놓다 보니, 조금 흥이 오른 것 같은 권왕이다.

권왕은 말과 동시에 한 발 앞서 적들을 향해 달려 나가 주먹을 내질렀다.

콰앙! 쾅!

권왕의 일격에 이중삼중으로 막사를 둘러싸고 있던 헌터들의 포위망이 뚫렸고, 이격에는 막사가 무너졌다.

지지대가 부서지고, 덮개가 날아간 막사 안에서는 제갈민과 살수들이 놀란 눈으로 나와 권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

적의 침입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려왔다.

제갈민은 장린 쪽에서 시도한 기습이라고 생각했다.

예상치 못한 일격이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도, 걱정하지도 않았다.

‘운이 좋았군. 장린, 네 놈에게는 악운이겠지만.’

사실 이 기습이 하루 전에만 이루어졌어도, 큰 곤욕을 치렀을지 모른다.

내부 깊숙이 침투한 뒤에야 발각됐고, 헌터들의 고함이 계속해서 터져 나오는 것으로 보아 주도면밀했고, 기습해온 적들의 전력도 제법 강한 듯했으니.

그러나 오늘은 아니다.

지금 이 자리에는 현경의 고수가 둘이나 있다.

그것도 아군으로.

장린이 전 병력을 몰고 왔다 해도 충분히 해볼만 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고작 기습 정도에 걱정할 이유가 없었다.

“기습입니다!”

“적들의 규모는?”

급히 보고를 위해 달려온 헌터 앞에서 제갈민은 태연함을 잃지 않았다.

생각보다 소란스럽긴 하지만 그저 기습의 규모가 제법 클 뿐이라 여겼다.

“모르겠습니다. 아직 적의 흔적도 잡지 못했습니다. 정확히 확인된 것은 아니나, 소수의 암살자들이 투입된 듯합니다.”

“암살자?”

“예. 지금까지 파악된 바로는 스물 이상의 무인 분들이 당했습니다.”

“뭐라?!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

제갈민의 입에서 비명과도 같은 고성이 튀어나왔다.

헌터가 말한 무인은 살수들을 뜻했다.

장린이 보유한 헌터들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살막의 살수들을 해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하물며 암살이라면.

암살에 특화된 헌터들은 평생을 갈고 닦은 살수들을 이겨낼 수 없다.

그런데, 스물이 넘게 당했다니.

보고가 있고 나서야 제갈민은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문주님!”

살수들이 막사로 들이닥쳤다.

습격에 제갈민을 지키기 위해 온 것이다.

그러나 원래 와야 할 스물이 아닌, 다섯뿐이다.

“왜 너희들뿐이냐?”

“모르겠습니다.”

헌터들의 소란에 곧바로 막사로 달려왔다.

이유를 파악하고 할 겨를이 없었다.

다섯 살수들도 나머지 열다섯이 어떻게 됐는지 알지 못했다.

“무슨...!”

제갈민이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쾅!

폭발이라도 난 듯, 아니, 실제로 일어난 일은 폭발과 같았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막자를 지키고 있던 헌터들이 튕겨져 들어왔다.

쾅!

이어 두 번째 굉음이 울림과 동시에 막사가 무너져 내렸다.

국가주석이자, 총지휘관인 제갈민의 막사인 만큼, 일반 헌터들이 머무는 막사에 열 배에 달하는 크기임에도 완전 박살이 났다.

“권왕...! 김태빈 헌터?!”

시야를 가리던 막사가 사라지며 제갈민은 이 소란을 일으킨 흉수를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둘의 등장에 제갈민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막아!”

자신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는 권왕을 보며 제갈민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주변의 헌터와 살수들.

그 수십 배가 있어도 눈앞의 둘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 앞에 그런 걸 계산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주석님을 지켜라!”

헌터 수 명을 주먹질 한 번으로 피떡으로 만들어버린 권왕.

헌터들은 떨리는 다리를 억지로 옮겨 권왕의 앞을 막아섰다.

권왕의 무위를 직접 봤음에도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헌터들의 용기는 칭찬 받을만 했다.

물론, 그 가상한 용기와는 별개로 권왕의 앞을 막아선 결과는 참혹했다.

헌터들이 마법을 뿌려대고, 창칼을 휘둘렀지만 그들 모두가 권왕의 주먹 앞에서는 무력했다.

수십의 헌터가 쓰러지기까지, 단 세 번의 주먹질, 그리고 고작 수초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나마 헌터들이 위안으로 삼아야 할 것은 아무도 죽지 않았다는 것뿐이었다.

권왕은 무자비한 살육을 즐기는 마인이 아니다.

살수들을 상대로는 가차없이 살수를 펼쳤지만 헌터들에게는 일말의 자비를 베풀었다.

그 덕에 팔다리가 부러졌을지언정, 목숨을 잃은 헌터는 없었다.

“권왕님. 김태빈 헌터님. 왜... 왜 이러십니까...?”

추풍낙엽과 같이 쓸려나가는 헌터들의 모습에 제갈민의 머릿속에 ‘죽음’이라는 두 글자가 스쳐지나갔다.

자연 나오는 목소리는 덜덜 떨려왔다.

누군가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말하지만 제갈민은 아니었다.

세상 그 무엇보다 두려운 것이 바로 죽음이었다.

한 번 죽어봤기 때문이다.

제갈민이 겪은 죽음은 표현하자면, 무(無).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제갈민은 다시 찾아온 죽음이 너무나도 무서웠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무엇이든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제발...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제갈민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곁을 지키는 살수들과 소란을 듣고 몰려든 헌터들의 눈은 생각지도 않았다.

두려움에 집어 삼켜진 제갈민은 권왕과 내가 가까워짐에 따라, 무릎을 꿇고 있는 두 다리 사이로 누런 물을 질질 흘리기까지 했다.

“제발... 제발...”

눈물에 콧물까지.

아시아를 제패한 중국 국가주석이 보이기에는 볼썽사나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제갈민은 제 목숨을 지킬 수만 있다면 지금보다 더 추해지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듯했다.

“허?!”

권왕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저항의 의지도 잃고, 그저 제 목숨을 구걸하는 제갈민이다.

한 때는 무림 삼대 살수 단체의 군사였고, 지금은 아시아를 아우르는 중국의 국가주석인 자가.

한심하다는 말조차 아까운 제갈민의 모습에 권왕은 주먹을 휘두를 가치도 느끼지 못했다.

“한국을 다시는 쳐다보지도 않겠습니다. 아니, 중국을 원하신다면, 바치겠습니다... 돈을 원하면 돈을, 권력과 명예 모든 것을 드리겠습니다.”

이미 제정신이 아닌 듯, 횡설수설 되는 대로 지껄이는 제갈민이다.

“너 또한 숱한 목숨을 해해 왔으니, 너무 원망하진 말거라.”

그러나 내게는 통하지 않았다.

내 앞에서 목숨을 구걸했던 이가 제갈민이 처음도 아니고, 목숨을 구걸한다 해서 살려줄 거라면, 애초에 살수가 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물며 상대는 언제고 죽이려 했던 제갈민이다.

그 시기가 조금 앞당겨 졌을 뿐.

서걱.

내 검이 무정히 제갈민의 목을 스쳐지나갔다.

***

제갈민을 목을 벤 나는 곁에 있던 살수들도 차례로 죽였다.

다섯 살수는 제갈민의 허망한 죽음에 멍하니 넋을 놓고 있다 죽음을 맞이했다.

유일하게 특급 살수만 도주를 시도했지만 미처 발을 떼기도 전에 권왕의 일격에 몸이 터져버렸다.

저벅.

나와 권왕이 걸음을 옮겼다.

아직 일이 끝난 것은 아니다.

아직 헌터들 틈에 숨어 있는 살수들이 남았다.

내가 놓친 하나와 권왕이 놓친 둘.

“놈들을 죽여!”

헌터들 틈에서 살수 하나가 소리쳤다.

제갈민이 죽은 지금, 최고 명령권자가 된 살수들이었다.

움찔.

“막아서는 자는 죽이겠다.”

살수의 명령에 움찔했던 헌터들이 일제히 굳어졌다.

헌터들은 내가 뿜어내는 살기를 이겨내지 못했다.

아니, 이겨내고자 하는 의지도 없었다.

도망치는 것만 간신히 참고 있을 뿐, 헌터들은 나와 권왕의 걸음에 따라 후다닥 물러나며 길을 열었다.

“죽여! 놈들을 죽이라고!”

“고작 둘뿐이다!”

헌터들이 터놓은 길 사이에 덩그러니 놓인 살수들이 절규와도 같은 외침을 토해냈다.

그러나 그의 말을 따르는 이는 없었다.

“으으..!”

헌터들을 등 떠밀었을 뿐, 막상 자신들이 맞설 용기는 없던 살수들이다.

아마 헌터들이 막아서는 틈에 기회를 봐 도망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바라던 기회는 오지 않았다.

서걱.

마지막 남은 세 살수의 목이 바닥에 떨어지며 지구상에 무림의 존재는 나와 권왕, 둘만 남기고 모두 지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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