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5
145화. 종말(2).
“전남 화순에 생성된 게이트가 막 재앙급임이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문제는 난데없는 몬스터들의 출현만이 아니었다.
몬스터들의 출현과 동시에 갑자기 하위등급 던전이 줄어들고 상위 던전이 대거 생성됐다.
지금까지 하위던전과 상위던전이 7:3의 비율로 생성되던 것이 반대로 3:7의 비율로 생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B급, A급은 말할 것도 없고, 과거에는 하나만 생성 되도 한국 전체가 긴장해야 했던 재앙급 던전이 이제 서넛쯤은 우스울 만큼, 동시다발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과거였다면, 멸국을 걱정해야 했겠지만 다행히 내가 풀어놓은 마나 제어법 덕분에 헌터들의 전체적인 능력치가 상향되었기에 아직까지는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말 그대로 아직까지일 뿐이다.
갑자기 쏟아지는 몬스터와 제 때 공략을 하지 못할 만큼 많은 던전까지.
헌터들은 이를 막기 위해 쉼 없이 전투를 치러야 했고, 빠르게 한계에 내몰리고 있었다.
그로 인해 헌터들의 대처에 하나둘 구멍이 발생하고 있었고, 전체가 무너지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시작된 건가...”
나는 연이어 발생한 사태가 종말의 징후임을 느끼고 있었다.
벌써부터 신음하고 있지만 사실, 몬스터들과 상위 던전의 출현은 끝이 아닌 시작에 불과할지 몰랐다.
“예?!”
유인원과 김원철이 연이어 내게 이러한 소식들을 가져온 이유는 혹시 이상 현상 등의 여러 문제들을 해결해왔던 나라면,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해서다.
정 방법이 없다면, 홀로 길드 이상의 힘을 가진 내 손이라도 빌리기 위해서고.
“아닙니다. 그보다 잠시 한국을 떠나야 할 듯합니다.”
‘일단 한국이 안전해지기 위해서는 내가 한국을 떠나야 한다.’
처음은 아무도 모르는 아프리카 수림에서 시작됐지만 이후에 두드러진 곳은 세 곳이었다.
유럽과 살막, 그리고 한국.
모두 균형을 해치는 존재들이 있었거나, 지금도 있는 곳들이다.
알고 있다면, 서로 연관이 있음을 유추해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지켜보면 알 수 있겠지.’
확실한 답은 아니었기에 실험은 필요했다.
권왕에게도 도움을 빌릴 생각이다.
나와 권왕이 한국을 비움으로써, 몬스터의 출현 빈도와 던전의 난이도가 하락하는지. 아닌지.
내가 세운 가설이 맞다면, 한국은 지금보다 안전해 질 것이다.
균형을 무너트리는 가장 큰 이유는 일류, 혹은 절정의 무인들이 아닌, 나와 권왕일 테니.
‘그리고 살막과 타이탄을 지운다.’
유인원과 김원철이 나를 찾아온 의도와는 다르지만 나는 결단을 내려야했다.
무너진 균형을 어떻게 다시 맞출 것인지.
사실, 오랜 시간 고민하면서 이미 생각해 둔 바는 있었다.
가장 확실하다 생각되는 방법.
그 방법은 바로 타이탄과 살막, 그리고 나 등, 이 세계에 허락되지 않은 존재들의 말살이었다.
‘권왕이 함께 해준다면.’
나와 권왕이 움직인다면, 타이탄과 살막의 잔존세력을 처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미 만천하에 드러나 있는 타이탄보다는 정체를 숨기고 있는 살막의 살수들이 문제이긴 하지만 대상에 대한 추적은 살수의 기본이다.
살막에 몸담고 있었던 권왕도 어느 정도의 정보는 가지고 있을 테니. 무에서 시작하는 것도 아니다.
걱정을 해야 할 만큼, 문제될 건 없었다.
***
“알겠네.”
권왕은 이유도 묻지 않고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고, 나와 함께 한국을 떠났다.
나와 권왕이 향한 곳은 중국이었다.
타이탄 측의 요한과 기사단이 죽으면서 균형은 무림 측으로 기울어졌다.
다시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는 우선 살막의 존재들을 처리해야 했다.
남아 있는 살막 소속은 제갈민을 비롯한 오십의 살수들.
무림의 존재에서는 나와 권왕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긴 하겠지만 살막을 완전히 지워버리고 나면, 지금보다는 균형이 맞을 것이다.
나와 권왕은 우선 살수들에 대한 정보를 얻고자 했다.
은밀하게 정보를 캐낼 필요는 없었다.
전처럼 바다를 이용해 잠입한 것이 아니라, 당당히 입국 절차를 거쳤다.
이미 나와 권왕의 방문은 제갈민의 귓가에 들어갔고, 그는 나와 권왕을 반기며 직접 마중까지 나왔다.
나는 제갈민에게 직접 살수들에 대한 정보를 얻어낼 생각이었다.
“김태빈 헌터. 권왕 선배님도 오랜만에 뵙습니다.”
자신을 향한 도움의 손길로 알고, 한껏 예의를 갖추는 제갈민이다.
나와 권왕이 자신을 저승으로 인도할 사신이라는 것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그 또한 전생과 현생에 세치 혀와 펜 대만으로 숱한 사람을 죽여 왔으니, 억울하지는 않을 것이다.
“상황이 좋지 않다는 얘기는 들었다.”
“큼... 그렇게 됐습니다.”
제갈민이 헛기침을 내뱉으며 답했다.
아시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황제와 같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스스로 느끼기에도 자신의 처지가 우습게 되었다.
“현재 적과 아군의 전력을 소상히 알고 싶은데.”
“전력을 말입니까?”
제갈민이 의아하다는 듯 물어왔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현경의 고수 둘이라면, 전 세계를 적으로 돌리더라도 두렵지 않을 정도의 전력이다.
구태여 적과 아군에 대해 알 필요가 없었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가 아닌가.”
지피지기(知彼知己) 백전불태(百戰不殆).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나는 이를 이유로 들며 자연스럽게 질문을 이어갔다.
“손자병법 모공편의 말이군요. 맞습니다.”
제갈민의 의문은 의심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자신이 처한 상황이 워낙 급박하여 이것저것 따지고 있을 새가 없기도 했고, 오랜 시간 살막에 몸담아 오면서 살수들은 신중함이 도가 지나친 족속들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털끝만큼 사소한 실수가 임무의 성패를 넘어 자신의 생사와 직결되는 삶이다 보니, 절로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완벽을 추구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태빈만이 현 상황을 묻을 뿐, 권왕은 관심조차 두지 않는 것만 봐도, 살수와 보통의 무인 간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세상을 오시할 수 있을 만큼, 지고한 경지인 현경에 이르렀지만 태민은 본래 살수.
지금의 과한 신중함을 충분히 이해 할 수 있었다.
“현재 장린은 일만오천의 헌터들과 서안 인근에 진을 치고 있습니다. 지금은 일만오천이지만 그 세가 계속해서 불어나고 있는 실정입니다.”
서안은 타이탄을 추격 섬멸했던 지역이다.
장린은 그 전투를 바탕으로 세력을 일으킨 만큼, 의미를 가진 땅에 근거지를 두고 세를 불리고 있었다.
그 기세는 무서웠다.
중국의 모든 헌터들이 그를 지지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저희측은 살막의 살수 오십과 북경에 주둔하고 있던 헌터 이천이 전부입니다.”
이어진 아군의 상황을 설명하는 제갈민의 목소리가 힘이 없이 느껴졌다.
일만오천 대 이천.
수적으로 확연히 기우는 상황이다.
게다가 계속해서 세가 불어나고 있는 장린과 달리, 제갈민의 세력은 오히려 기존의 헌터들마저 조금씩 이탈하고 있었다.
일당백의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살수들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전력이 압도적으로 밀렸다.
장린이 세를 불리고 기세를 한계까지 끌어올리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것을 오히려 고마워해야 할 정도다.
“내가 어떻게 도와주길 원하지?”
“장린과 그의 친위대 격인 일천의 헌터들을 처리해주십시오. 그럼, 뒷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제갈민은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
장린과 일천의 헌터.
고작 두 명에게 일천을 맡기는 게 과하다 여겨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두 명이 현경의 고수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무림에서도 현경의 고수에게는 마‘신’, 혹은 일‘선’과 같은 인외의 별호가 붙곤 했으니.
일만오천 전부를 맡긴다 해도 오히려 상대가 부족했다.
그렇기에 제갈민은 말을 하면서도 일말의 걱정도 하지 않았다.
“그러지.”
나 또한 마찬가지.
내 목표는 장린이 아니기에 일천과 부딪칠 일도 없지만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혹시, 클레이와 남아 있는 타이탄의 기사들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게 있나?”
살수들의 위치뿐만 아니라, 나는 제갈민을 통해 남은 타이탄의 존재들을 파악해 놓은 명부도 얻을 수 있었다.
나는 타이탄의 유지를 이으려는 클레이라는 사제를 죽이기 위함이라며 정보를 요구했고, 제갈민은 자신이 파악한 명부를 기꺼이 내주었다.
지금은 장린에게 온 신경이 쏠려 있었지만 그 이전까지만 해도 타이탄을 무너트리기 위한 준비를 해왔던 제갈민이다.
타이탄의 조직도는 한참 전부터 꿰고 있었고, 내가 든 목적이 사실이 아니다 해도 자신에게 해가 될 일은 없다 여긴 것이다.
요한과 기사단은 사라졌지만 명부에 남아 있는 이들의 수는 적지 않았다.
요한을 대신해 교황의 자리에 앉게 된 사제 클레이를 포함해 약 이십 여명.
일단 살막을 처리한 뒤에 상황의 추이를 살펴 움직일 테지만 후에 그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야 하는 수고는 덜었다.
***
“제가 막사를 중심으로 우측의 살수들과 제갈민을 맡겠습니다.”
나는 제갈민이 내어준 정갈한 막사에서 권왕과 조용히 말을 나눴다.
주둔지에 모여 있긴 했지만 마흔다섯의 살수가 한 막사에 있는 것은 아니다.
살수들은 다섯 명씩 아홉 개 조로 나뉘어 헌터들 틈에 섞여있었다.
때문에 주둔지를 좌우로 쪼개 나와 권왕이 절반씩 처리하기로 했다.
권왕이 스물다섯의 살수를, 내가 스물의 살수와 제갈민, 그리고 특급살수를 맡았다.
“지금부터 일각 뒤에 시작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주둔지 내에 퍼져있는 살수들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속도가 생명이다.
마흔 다섯을 한 번에 죽일 수는 없으니, 암습이 알려지기 전에 최대한 수를 줄여 놓아야, 숨거나 도망치는 자들을 찾고, 뒤쫓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알았네. 일이 끝난 뒤에는 설명을 해줘야 할 걸세.”
권왕은 갑작스럽게 살막을 세상에서 지우고자하는 내 의도를 정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당장은 별말 없이 따라주었다.
살막은 자신과는 이미 척을 진 자들.
자신은 몰라도, 딸 수아에게는 위험요소가 될 수 있는 만큼, 손속에 사정을 둘 이유도 없었다.
“그럼.”
상대는 전문적인 살수들이지만 나는 말할 것도 없고, 권왕에게도 그들을 죽이는 것쯤은 어린 아이 목 비트는 일만큼 쉬운 일이다.
단지 한데 모여 있는 것이 아니기에 번거로울 뿐.
무운을 비는 등의 인사 따위는 필요 없었다.
스르륵.
나와 권왕은 은밀히 막사를 빠져나갔다.
제갈민이 만일을 대비해 막사 주변에 붙여놓은 살수와 헌터들이 있긴 했지만 그들은 외부로부터의 경계를 위함이지, 내부를 경계할 목적은 아니었기에 나와 권왕의 움직임을 파악하지 못했다
물론, 그들이 내부의 동태를 살피고자 했더라도, 직접 막사 안에 들어와 보지 않는 이상, 마음먹고 빠져나간 나와 권왕의 기척을 잡아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나와 권왕이 막사를 빠져나가고 정확히 일각 후,
“...!!”
나와 권왕이 있던 막사의 좌우 끝을 시작으로 주둔지에 소리 없는 피바람이 불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