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
144화. 종말.
내 고민과 별개로 시간은 흘러갔다.
일주일.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무언가 변화가 있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내가 칩거에 가깝게 집과 수련장만을 반복하며 두문불출 하는 일주일 동안, 세계의 정세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우선 유럽.
모두가 예상한대로 타이탄이라는 구심점을 잃은 유럽은 빠르게 붕괴되기 시작했다.
유럽은 왕을 잃은 제국과 같았다.
정당한 계승권을 가진 후계자가 없는.
남아 있는 신하들이 왕이 사라진 왕국을 차지하기 위해 아귀다툼을 벌이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 결과, 유럽은 수십 개의 국가가 있던 기존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지만 크게 세 개로 쪼개졌다.
일단 타이탄의 정통성은 요한의 측근이자, 타이탄의 사제였던 클레이가 이었다.
타이탄의 유일한 사제로 전투에 참전하지 못한 클레이다.
그 덕에 목숨을 건진 그는 독일을 중심으로 유럽의 북동지역을 아우른 채, 타이탄의 유지를 잇고자 했다.
이에 서쪽에서는 프랑스와 스페인을 중심으로 서쪽에서 타이탄의 반란 세력이 뭉쳤다.
반란세력의 세 명의 수장들은 요한과 기사단의 손에 목숨을 잃었지만 일부 잔존 세력은 음지에 숨어 때를 기다리고 있었고, 지금이 그 때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탈리아와 그리스가 남동에 세력을 두고 유럽의 패권을 노렸다.
그렇게 나뉜 세 개의 세력 중, 타이탄의 유지를 잇는 독일의 세력이 가장 강했고, 이탈리아와 그리스의 남동이 가장 약했다.
그러나 서쪽과 남동 둘 다 타이탄에 반하는 뜻은 같았기에 세 개의 세력이 균형을 이룬 채,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다음은 중국.
여문휘를 밀어내고 국가주석의 자리에 앉은 제갈민이 휘어잡고 있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중국에서도 변화가 있었다.
타이탄과의 전투에서 중국 헌터들의 지휘를 맡았던 S급 헌터 장린이 제갈민의 자리에 욕심을 드러낸 것이다.
최전선에서 생사를 함께한 헌터들 또한 장린을 지지했고, 그로 인해 굳건해 보였던 제갈민의 위치는 위태롭게 흔들렸다.
이에 제갈민은 장린의 세력을 반란군으로 규정하고, 지원군을 보내왔던 러시아와 미국에 도움을 청하며 맞서려했다.
그러나 양국에게 돌아온 반응은 차가웠다.
살수들이 두려워, 힘에 짓눌려 고개를 숙였던 러시아는 오히려 이 기회에 살막의 세력을 완전히 쳐내고자 장린에게 힘을 보탰고, 미국은 무공이라는 이득만 취한 채 발을 쏙 빼버렸다.
제갈민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타이탄과의 전투에서 반으로 줄어든 탓에 이제 오십밖에 남지 않은 살수들과 한 명의 특급 살수, 그리고 허울뿐이게 된 국가주석이라는 이름뿐이었다.
사실, 한 명이지만 특급 살수가 남아 있기에 장린을 암살하는 방법도 있었다.
승전에 고취돼, 순간의 감정으로 모인 세력이다.
누군가 조금 잘했을 때 ‘누구를 국회로!’ 외치는 것과 비슷한 현상.
장린이 죽는 순간 모래성처럼 와르르 무너질 것이다.
그러나 자칫하면, 최악의 결과로 되돌아올 수도 있다.
당장의 전쟁 영웅으로 떠오른 장린에게 살수를 드리운다면, 민심이 자신을 떠나게 될지도 몰랐다.
민심을 잃은 왕의 결말은 대체로 비슷하다.
때문에 제갈민은 선뜻 암살을 택하지 못했다.
세력의 힘부터 국민의 지지까지 밀리는, 여러모로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해 있는 제갈민이었다.
물론, 둘 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김원철이나 유인원 등이 간간히 내 집에 들려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전해주고 있었기에 알고 있었을 뿐.
내가 당면한 고민에 비하면, 중국과 유럽의 내분은 사소하다고도 말할 수 없는 문제였다.
종말이 도래한다면, 그들의 다툼 또한 무의미해질 테니 말이다.
***
“무영살.”
누군가 집과 수련장에 틀어박혀 두문불출하는 나를 찾아왔다.
여전이 나를 무영살이라 부르는 이는 이 세계에 단 한사람뿐이다.
제갈민도 이제는 무영살이라는 이름 대신 태빈이라 부르고 있으니.
권왕 고영.
나와 같은 현경의 경지에 오른 고수다.
한 때 적으로 만났지만 지금은 같이 무리에 대한 담화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나보다 한 발 먼저 현경의 경지에 들기도 했고, 연배나 무림의 배분 또한 높기에 선배로 모시고 있었다.
어쨌든, 김원철과 유인원이 간간히 나를 찾아오긴 했지만 내가 그들을 만나고자 하지 않았기에, 둘은 팀원들에게 소식을 전하는 선에서 돌아가곤 했다.
그러나 권왕 고영은 나와 직접 만나기 위해 기다림을 마다하지 않았다.
무려 반나절의 기다림.
마냥 길다고 할 수는 없지만 권왕과 같은 이를 계속해서 세워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가 계속해서 만남을 거부한다면, 몇날며칠이고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을 양반이니.
무림에서 숱한 문파들의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은 만큼, 한 고집 하는 인간이 권왕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선배님.”
갑자기 찾아온 권왕을 대하는 내 말투는 딱딱하면서 조금은 퉁명스러웠다.
내가 두문불출하며 틀어박혀 있던 이유는 특별한 것이 아니다.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머릿속이 복잡했기 때문이다.
그 복잡함 속에 원치 않는 기다림으로 나를 괴롭히니, 선배라 하여 마냥 반겨주지는 못했다.
“별일은 아니네. 그냥, 얘기나 할까 해서 찾아왔네.”
권왕은 특별한 이유가 있어 나를 기다린 것은 아니었다.
적적함을 풀고자 한 발걸음이었을 뿐이다.
아니, 내가 몇날며칠을 고민에 빠져 있으니, 주변에서 슬며시 언질을 해줬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내 생각과는 상관없이, 나와 상하관계가 아닌 동격의 관계는 권왕을 비롯해 몇 되지 않았으니.
“타이탄의 수장을 죽였다지?”
“사로잡긴 했지만 죽인 건 아닙니다. 제 스스로 죽어버렸으니.”
나에게 지금의 고민을 떠안긴 요한의 얘기에 내 인상이 살짝 찌푸려졌다.
놈만 아니었으면, 지금처럼 머리가 복잡할 이유도 없었다.
사실, 고민하고 대비할 시간을 얻게 됐으니, 다행으로 여겨야겠지만 홀로 그 짐을 짊어지고 있다는 것은 생각이상으로 짜증이 나는 일이었다.
“꽤나 복잡한 문제가 있었나 보군.”
권왕은 내가 깊은 고민에 빠져 있음을 눈치 챘다.
누군가에게 말한 적은 없지만 권왕 정도의 고수라면, 내 얼굴에 드리운 음영을 봤을 테니, 모를 리가 없었다.
“아닙니다.”
그럼에도 나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가진 고민은 권왕에게 말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지 말고 허심탄회하게 한 번 말해보게. 혹시 아는가. 내가 고민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될지.”
“으음...”
내가 망설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요한이 말한 균형.
요한이 지구에 현신하면서 균형이 깨어졌고, 그 균형을 맞추기 위해 나를 비롯한 무림의 존재들이 이 세계에 불려왔다.
그렇게 맞춰졌던 균형은 요한이 죽으면서 다시 한 번 깨졌다.
그럼, 이를 다시 맞추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내린 답은 무림의 존재들 또한 사라져야한다는 것이다.
사실, 개인적인 생각일 뿐, 정답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가장 타당하다 여겨지는 답이었다.
그리고 그 답은 내가 일주일 동안이나 고민에 빠져 있도록 만들었다.
만약 내가 세운 가설이 맞다면, 종말을 막기 위해선 남아있는 타이탄의 존재들과 무림의 존재들을 지구상에서 모두 지워야 한다.
나를 포함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그 대상에는 눈앞이 권왕도 포함된다.
그렇기에 마냥 솔직하게 털어 놓을 수는 없었다.
내 결정에 따라 다시 적으로 마주해야 할 수도 있었다.
비록 비무일지언정, 단 한 번도 승리를 점하지 못한 고수를 말이다.
“강요하려는 것은 아니네. 혹, 생각이 들면 언제든 얘기하게. 내 항상 귀를 열어놓고 기다리겠네.”
나이나 무림에서의 연배는 내가 한참이나 어리지만 권왕은 나를 자신과 동등한 존재로 대했다.
아니, 한층 더 나아가 자신과 수아가 은혜를 입었다 여겼다.
나 또한 현경에 대한 실마리를 얻으며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입었건만, 권왕은 아직도 부족하다 여겼다.
그렇기에 조금이나마 내게 도움이 되고자 했다.
“알겠습니다.”
그 마음을 모르지 않기에 나는 어렵게 미소를 지어보이며 답했다.
***
세계가 권력을 탐하며 다툼을 벌이고 있을 때, 종말은 은밀하지만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처음 그 징조가 시작된 것은 아프리카의 한 수림이었다.
키륵. 키륵.
몬스터들이 수림에 튀어나왔다.
그 등장은 지금까지와 달랐다.
던전이 생성되고 동기화를 거쳐 지구에 발을 디딘 것이 아니라, 한순간에 공간이 갈라지며 그 틈새로 곧장 몬스터들이 튀어나온 것이다.
몬스터들뿐만이 아니었다.
수풀이 가득하던 수림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몬스터들이 살던 설원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했다.
수림 전체로 따지면, 극히 일부일 뿐, 고작 수 킬로미터의 넓지 않은 땅이었다.
하지만 아프리카 수림 한가운데에 난데없이 설원이 생겨났다.
이는 분명 정상적인 던전을 통해 몬스터들이 지구에 모습을 드러내던 현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실 던전 자체도 정상적이다 말할 순 없지만 던전과 몬스터는 이미 정상의 범주로 인식될 만큼, 익숙한 현상이 되었다.
어찌됐건,
키르륵!
그렇게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 튀어나온 몬스터들은 낯선 환경이 아닌, 익숙한 설원이 만족스러운 듯 괴기스러운 괴성을 연신 질러댔다.
그리고는 새로운 세계에서의 생존을 위해 설원을 나서 수림을 헤집어 나갔다.
주변의 동식물들은 모조리 몬스터들의 먹잇감이었다.
이전까지 최상위 포식자였던 사자도 몬스터들의 상대는 되지 않았다.
몬스터들의 등장과 함께 아프리가 수림 속에는 새로운 생태계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기에, 아프리카는 이미 몬스터의 땅으로 전락해 버린 지 오래기에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한 변화였다.
***
“몬스터들이 튀어나오고, 환경이 바뀌어버린 탓에 곳곳에서 혼란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수림 속의 일은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그와 같은, 혹은 유사한 일들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도심 한 가운데에서, 혹은 외곽의 어느 지역에서 아무런 징후도 없이 튀어나온 몬스터와 난데없는 환경의 변화로 인해 세계는 혼란에 빠졌다.
몬스터는 던전을 통해서 나온다는 기존 상식이 송두리째 깨졌을 뿐만 아니라, 놈들의 서식지까지 그대로 옮겨졌다.
갑자기 집 안에 나무가 솟아나고, 땅이 물에 잡기는 등의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인간으로서는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된 것과 동시에 삶의 터전까지 빼앗겨 버린 것이다.
“현재로선 마력 탐지기를 비롯해 몬스터의 출현을 파악할 수 없어 피해가 큰 상황입니다.”
그 대처 또한 쉽지 않았다.
세계 각국은 헌터들을 24시간 항시 대기시키고, 각 길드들에 협조 요청을 하는 등, 피해를 줄이기 위해 갖가지 노력을 기울였다.
하짐나 아무리 대책을 세운다 한들,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고, 땅에서 솟아나는 몬스터들을 아무런 피해 없이 막아낼 방법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