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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살수다-141화 (141/150)

# 141

141화. 비밀(2).

쩍. 쩌저적.

정적 속에 무언가가 부서져 나가는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빛이 대지마저 집어 삼키는가 하는 의심이 드는 찰나, 빛으로 이루어진 검이 반으로 갈라졌다.

반으로 쪼개진 검의 윗부분은 빛무리가 되어 흩어졌고, 그 빛무리 속에는 빛의 검과 대조되는 작은 검 한 자루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린 태빈이 있었다.

빛의 검이 태빈의 검에 막혀 잘려버렸다는 것쯤은 지켜보고 있는 모두가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허...?”

요한의 검을 마주한 내 입에서는 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나를 위협할 만큼, 강한 일격이었다 하는 건 아니다.

내 탄성의 이유는 감히 짐작 할 수도 없을 정도로 막대한 요한의 내공 때문이었다.

방금 전의 일격이 전력을 다한, 젖 먹던 힘까지 끌어낸 것이라면 이렇게 놀라지도 않았을 것이다.

화경의 고수가 한 톨의 내공도 남기지 않고, 만들고자 하면 만들지 못할 검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요한은 전혀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날 때부터 영약만 처먹고 자란 것도 아니고.’

당장의 공격뿐만 아니라, 요한은 앞서 전투에서 수백을 베어 넘기고, 신도들에게 광범위 버프를 걸어 준 것까지 생각하면. 아무리 경지를 넘어선 고수라 해도, 조금의 지친 기색이라도 있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요한은 방금 막 싸움에 가담한 것만 같았다.

일순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무지막지한 강기의 검을 휘두르고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자신을 바라보는 요한이었다.

‘자연경?!’

잠깐 자연과 완전히 하나가 되는 자연경의 경지를 의심했다.

유구한 무림 역사를 통틀어도 단 세 명밖에 오르지 못한 경지.

무한에 가깝게 느껴지는 요한의 내공은 현경 다음의 경지라 알려진 자연경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아니... 그럴 리가 없지.’

그러나 정말 잠깐이었다.

요한이 자연경의 고수였다면, 내가 이렇게 살아서 생각을 이어갈 수 있을 리 없다.

방금 전 일격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을 테니까.

또한 마주한 요한의 검은 담긴 힘이 무한한 내공에 미치지 못했다.

화경의 고수가 일격에 전심전력을 다한 정도?

물론, 화경의 고수가 그렇게 무리한 일격을 펼치는 경우는 없기에 정확히 비교할 수는 없었다.

일격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살수조차도 실패와 도주를 고려해 전력의 삼할은 남겨두곤 하니.

“허...?!”

이번에는 좀 더 큰 탄성이었다.

요한이 부러진 검에 아랑곳 않고 똑같은 검을 다시 한 번 내지르고 있었다.

나조차도 저렇게 무지막지하게 내공을 뽑아다 쓰면, 몇 번 검을 휘두르지도 못할 텐데...

요한은 여전히 지친기색은커녕, 악만 가득한 얼굴로 강기를 뿜어댔다.

쾅!

거대한 강기는 내 검에 다시 한 번 막혔다.

이해할 수 없는 막대한 내공으로 강대한 힘을 담아내긴 했지만 깨달음이 미치지 못하는 요한의 검은 그에 백분의 일도 되지 않는 내 작은 검을 넘어서지 못했다.

쾅! 쾅! 쾅!

검과 검이 부딪쳤다.

주변 사정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충돌의 여파가 기사와 헌터들을 휩쓸었다.

특히, 이미 시체로 변한 기사단장들의 곁, 요한과 나의 충돌에 가장 가까이 있던 기사들과 헌터들은 첫 일격에 휩쓸려 터져나갔다.

어느 정도 떨어져 있던 기사들과 헌터들이라 해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서로 포위망을 뚫고, 막기 위해 가까이 엉켜 있던 탓에 충돌이 만들어낸 소음만으로 고막이 터져나가고, 내상까지 입었다.

또한 그 중, 일부는 부서져 흩어진 검 조각들을 피하지 못해 크고 작은 부상을 입거나, 심지어 목숨을 잃기도 했다.

‘이런!’

기사들이 뚫고자 했던 곳은 한국 헌터들이 지키고 있던 곳이었다.

당연히 요한과 나의 충돌에 피해를 입은 것도 한국 헌터들이었다.

실력이 뛰어난 이들은 눈치껏 뒤로 물러나거나, 충격을 어느 정도 해소해 냈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이 더 많았다.

“거리를 벌려라!”

“물러서!”

뒤늦게 헌터와 기사들은 거리를 벌렸다.

죽음을 각오했든, 각오하지 않았든 다른 싸움에 휘말려 허무하게 목숨을 잃고 싶은 이는 없었다.

기사와 헌터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에는 나와 요한만이 남아 검을 맞댔다.

콰콰쾅!

몇 번의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자, 요한의 검에 힘을 더해졌다.

이미 하늘을 뒤덮을 듯, 커져있던 검이 한 단계 더 몸집을 키웠다.

담긴 힘 또한 더 강대해졌지만 깨달음의 한계를 넘어서진 못했다.

천지가 울부짖었지만 나만은 그 속에서 홀로 오연하게 서있었다.

“역시... 네 놈이었구나.”

자신의 검을 아무렇지 않게 막고, 흘려보내는 나를 보며 요한이 낮게 중얼거렸다.

짧은 탄식과도 같은 중얼거림에 담긴 의미를 내가 이해할 수는 없었다.

“무슨 말이지?”

“...”

대답은 없었다.

아까와 같은 공격도 없었다.

무식하게 힘으로 밀어붙이려던 요한은 공격이 통하지 않음을 깨닫고 방법을 달리했다.

빛의 강기가 한 점으로 모여, 한 자루 검이 되었다.

한데 응축된 탓에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시릴 정도로 눈부신 빛을 내뿜는 검이었다.

“죽어라!”

다시 한 번 요한의 공격이 이어졌다.

이번에는 힘으로 억누르는 검이 아니었다.

요한은 타이탄 기사단의 단장이라는 자리에 걸맞게 검술이 뛰어났다,

지금까지는 기술 없이도 자신의 검을 막아내는 상대가 없었기에 드러낼 기회가 없었을 뿐.

요한의 검은 마흘의 창보다 날카로웠다.

쐐애액!

시작은 섬전과 같은 찌르기였다.

공간마저 찢어발기며 다가오는 검은 눈으로는 따를 수 없을 만큼 빨랐다.

요한과 나 사이의 거리가 한순간에 좁혀졌고, 그와 함께 검이 내 몸을 향했다.

콰앙!

내 검이 정확히 요한의 검 끝을 찔렀다.

검 끝이 부딪치며 일어나 여파에 대지가 움푹 파이고, 서로의 머리가 흩날렸다.

가로막힌 요한의 검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큭!”

요한의 입에서 나온 침음이다.

마흘보다 낫다는 것이지, 내 상대는 아니었다.

자신의 검 끝을 막고 있는 내 검을 보는 요한의 눈이 살짝 커졌다.

기예와도 같은 내 검에 흔들리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나와 요한, 누구 하나 망설임 없이 다음 동작을 이어갔다.

카카카캉!

요한이 어깨를 살짝 틀었다.

그에 따라 요한의 검은 내 검신을 긁으며 본래의 목표로 향했다.

기어코 내 몸에 검을 찔러 넣고 말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쿠직!

나는 검을 지그시 밀어냈다.

일견 가벼운 움직임이었지만 천근추의 묘리가 담았다.

내 검신을 타고 내려오던 요한의 검은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의도한 검로를 벗어나 내 왼쪽 가슴 옆, 허공을 스쳐지나갔다.

촤아악!

나는 곧장 반격을 가했다.

요한의 검을 흘려낸 내 검은 곧바로 가로로 요한의 가슴을 베어갔다.

“윽!”

요한이 질겁하며 다급히 몸을 뒤로 날렸다.

콰드득.

빠르게 물러났지만 갑옷이 잘려나가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다.

드래곤의 가죽을 연마해 만든 갑옷이었지만 내 검 앞에선 종잇장이나 다름없었다.

길게 베어진 갑옷 사이로 옅은 핏물이 베어 나왔다.

사락.

그 와중에 요한은 검을 비틀어 내 옆구리를 베어냈다.

옷가지만 살짝 잘려나갔을 뿐이지만 제법 예리했던 수였다.

채채채챙!!

몇 차례 더 공방이 오고갔다.

요한의 공격은 대부분 실패했고, 내 공격은 대부분 성공했다.

단숨에 숨통을 끊어 놓지는 못했지만 요한의 몸에 크고 작은 상흔들이 생겨났다.

요한의 방어가 견고한 탓이다.

마흘의 창보다 날카로운 검만큼이나 방어 또한 프긴의 가호보다 단단했고, 나는 상흔을 남기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어째서... 신의 사자인 내가.”

분노로 일그러져 있던 요한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힘으로도, 기술로도 눈앞의 적을 넘어서지 못했다.

신의 사자인 자신이 겪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큭. 신의 사자라.”

나는 경지의 차이를 인정하는 대신 신을 찾는 요한을 향해 비웃음을 흘리며 검을 들어 올렸다.

몇 번의 공방 속에서 요한에 대한 파악은 끝났다.

그의 역량은 화경.

지금까지 그를 경계했던 게 우스울 지경이다.

무한한 내공의 원천은 여전히 알 수 없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길었던 싸움의 종지부를 찍을 때가 되었다.

***

툭.

늘어가는 상처에도 끝까지 맞서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요한의 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오른손은 여전히 검을 굳게 움켜쥐고 있었지만 그 오른손이 요한의 몸에서 떨어져 나왔다.

떨어진 오른팔이 검과 함께 바닥에서 부르르 떨었다.

“끝인가...”

오른팔을 잃은 요한이 체념한 얼굴로 말했다.

방금 잘려나간 오른팔만 문제가 아니다.

입고 있던 갑옷은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고철덩어리로 변했다.

신성함마저 들게 만들었던 새하얀 빛깔은 주인의 피로 얼룩져 더럽혀졌다.

망가진 갑옷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몸 상태도 좋지 않았다.

반쯤 잘린 왼팔이 덜렁거렸고, 다리 한 짝도 힘줄이 잘려나갔다.

옆구리와 가슴팍에도 주먹만 한 구멍이 뚫려 있다.

살아있는 게 신기할 정도.

신성력 덕에 숨이 붙어 있긴 하지만 더 이상의 전투는 불가능했다.

저벅. 저벅.

가까워지는 발자국 소리에 요한은 고개를 들었다.

한걸음, 한걸음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태빈이 보였다.

당연한 승리였다는 듯, 무심한 표정이었다.

“...네 놈이 믿는 신은 누구냐?”

말없이 내 눈을 응시하던 요한이 물었다.

짙은 어둠만이 가득한 태빈의 눈을 보다 문득 떠오른 의문이었다.

“믿는 신? 없다.”

“없다고?!”

“신은 허상뿐이 존재가 아니던가.”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신이 존재했다면, 과거의 나를 그렇게 내버려 두지는 않았을 테니.

“그럴 리가...”

요한의 눈은 불신으로 가득 찼다.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불신자들은 많이 봐왔다.

그러나 태빈은 아니어야 했다.

비록 그 신이 타이탄은 아닐지라도, 그가 자신과 같은 존재인 이상, 신에 대한 믿음이 없어서는 안 됐다.

“할 말은 그게 다 인가?”

“...”

요한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불신어린 눈으로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나는 대답 없는 요한을 향해 검을 들어 올렸다.

요한은 이미 죽음을 받아 들였는지,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았다.

이미 두 팔이 병신이 되고, 힘줄이 잘린 다리로는 도망도 칠 수 없었지만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미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니, 자신을 향한 검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그저 내 눈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쐐애액.

나는 망설임 없이 들어 올렸던 검을 내려쳤다.

검은 내 손길을 따라 공기를 가르며 요한의 목을 향해 나갔다.

그 순간,

“그럼, 어떻게 이 세계에 온 거지?”

굳게 닫혀 있던 요한의 입이 열렸다.

뚝!

그 말이 죽음 앞까지 다가섰던 요한을 살렸다.

내 머릿속에 전에 들었던 비슷한 얘기가 떠올랐다.

여문휘가 죽기 전 남겼던 말이다.

분명 여문휘는 죽기 전, 내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말했다.

이 세계에 우리가 되돌아 온 이유를...

그 후, 여문휘는 숨이 끊어졌고, 나는 그 말에 답을 지금까지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요한을 죽이지 못했다.

요한의 말로 말미암아, 그는 그 답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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