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
140화. 비밀.
나는 천천히 포위를 좁혀가는 헌터들 틈에서 기회를 기다렸다.
이어진 전투와 도주로 온 몸을 더럽힌 피와 흙먼지로 기사단이다.
본래의 새하얗던 갑옷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을 정도.
그만큼 지칠 대로 지친 적들이지만 단 하나, 눈빛만은 처음의 빛을 잃지 않았다.
전투에서 패하고 꼴사납게 도망쳤을지언정, 마음만은 꺾이지 않았다.
신념에 결의가 더해진 적.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무는 법이다.
하물며 기사단은 쥐가 아니라, 늑대 정도는 된다.
자칫하면, 승리가 무색해 질정도의 피해를 입을 수도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교황 성하만은 지킬 것입니다.”
“저희가 길을 열겠습니다.”
기사단장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물론, 그 희망이 자신들의 생존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단 한 명.
요한 한 명만 있다면, 타이탄은 최소한의 명맥을 이어갈 수 있다.
그렇기에 남은 기사 모두가 자신보다 요한이 살아남기를 바랐다.
비록, 그 대가로 자신들 모두가 죽을지라도.
끄덕.
요한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자리를 벗어난다고 무사히 도망칠 수 없다는 보장은 없지만 요한은 자신을 생각하는 기사들의 바람을 받아들였다.
아니, 사실 요한은 당장이라도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다시 한 번, 전에 느꼈던 위화감이 전신을 엄습해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 위화감의 정체를 정확히 안다.
평생 두려움을 모르고 살았던 요한에게 두려움이란 감정을 가르쳐주고, 생에 두 번째, 패배를 겪게 만든 존재로 인해 느껴지는 위화감이었다.
“프긴 기사단은 교황 성하를 지켜라!”
그 사이, 서로간의 거리가 10m까지 좁혀졌고, 중국 헌터들이 사방에서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콰콰콰쾅!
원거리 공격이 먼저 타이탄의 방패를 두드렸다.
궁지에 몰리긴 했지만 프긴 기사단의 방패는 건재했다.
수백의 마법과 화살이 빛의 방패에 막혀 흩어지고, 떨어져 내렸다.
콰콰콰쾅!
그러나 공격은 끝나지 않았다.
곧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헌터들이 방패를 내려쳤고, 연이은 공격에 빛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한 점에 집중했다면 모를까, 사방에서 쏟아지는 공격을 고작 수십의 힘만으로는 막을 수 없었다.
쿵!
쩌저적!
헌터들의 공세에 이어 방패를 때린 아길라의 마법.
마치 태양을 응축해 놓은 듯, 강렬한 열기를 내뿜은 화염구가 금이 간 방패를 확실하게 부숴버렸다.
화염은 방패를 부순 것만으로는 모자라다는 듯, 기사 몇까지 집어삼키기까지 했다.
“우리가 길을 열겠다!”
헌터들의 공세가 있었지만 사실, 방패가 깨어진 것은 기사단의 의도였다.
프긴 기사단의 방패가 한 차례의 공세를 막아낸 것으로 깨어진 순간, 기사단 전원이 일제히 몸을 날렸다.
기사단은 각기 중국, 러시아, 미국이 맡고 있는 삼면에 시간을 끌 최소한의 인원만 남긴 채, 비교적 포위망이 약한 우측에 남은 전력을 전부를 투입했다.
우측은 한국 헌터들이 지키고 있는 방향이다.
SS급 헌터는 고작 하나에 S급 헌터도 한 자리 수에 불과한 동방의 작은 나라.
어째서 그들이 포위망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기사단은 다른 곳보다 취약하다 여겼다.
실제로도 미국과 러시아가 맡은 좌측과 후방에는 십여 명의 S급과 천 이상씩의 A급 헌터가 있었고, 정면의 중국은 그 둘을 합친 것보다 많은 헌터로 틀어막고 있다.
그에 비해 한국 헌터가 있는 후방은 삼백 남짓으로, 기사단과 수까지 엇비슷한 수준이었다.
“크악!”
그러나 직접 부딪친 결과, 한국 헌터들의 포위는 결코 취약하지 않았다.
아길라, 단 한 명의 존재가 취약을 강인으로 바꿔놓았다.
나젤린을 경악하게 만들었던 불의 장벽이 다시 한 번 기사들 앞에 펼쳐졌다.
SS급을 넘어, 기사단장들까지 아래로 보는 화경의 경지에 오른 마법사.
마법사의 경지도 화경이라 부를 수 있는가는 의문이긴 하지만, 그 강함만은 결코 화경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어떻게 이런 힘을?!”
기사단은 나젤린과 같은 감정을 느끼며 기함할 듯,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놀람과는 달리, 포위망을 뚫어내고자 하는 움직임을 멈추지는 않았다.
이미 선택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포위를 뚫어내려는 의도를 들킨 이상, 다른 쪽을 노리기에는 늦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부딪쳐야 했다.
“하압!”
프긴, 차디, 타이탄 기사단까지.
세 개 기사단과 두 명의 기사단장들이 일제히 불의 장벽을 때렸다.
여타 헌터들의 마법보다 강력하기는 하나, 나젤린도 베어냈던 마법이다.
두 기사단장의 공격에 불의 장벽은 한순간에 수증기로 기화되며 사라져 버렸다.
“지금이다!”
기사단장들의 외침을 신호로 이백의 기사들이 한국 헌터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미 전원 희생을 각오했다.
아길라의 마법과 헌터들이 공격이 쏟아졌지만 기사들은 망설이지 않았다.
“놈들이 도망친다!”
뒤늦게 기사단의 의도를 깨달은 다른 삼면의 헌터들이 급히 움직였지만 그들 앞을 막아서는 기사들이 있었다.
이제는 오십밖에 남지 않은 아난 기사단이었다.
우측과 후방에 각기 열다섯, 중국 헌터들이 있는 정면으로는 기사단장을 포함한 스물이 몸을 던져왔다.
의도는 명확했다.
앞선 전투에서 무려 이만에 달하는 헌터들을 무력화 시켰던 자폭.
“자폭이다! 피해!”
“전부 물러서!”
삼면의 헌터들은 다가섰던 것보다 몇 배는 재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이미 한 번 경험한 일이다.
범위 내에 있었던 헌터들은 처음보다는 한결 질서정연하게 영향을 받지 않은 헌터들과 교대하는 등 기민한 대처를 보였다.
거리가 너무 가까운 탓에 전원이 자폭이 영항이 닿는 범위를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덕분에 처음과 같은 막대한 피해는 피할 수 있었다.
다만, 기사단장 아난이 있었던 정면은 예상보다 큰 피해를 입었다.
오십에서 이십으로 인원이 절반이상 줄어들었음에도, 기사단장의 영향인지 폭발의 범위가 오히려 넓어졌기 때문이다.
중국 헌터들은 무려 절반이상이 무력화됐다.
그럼에도 천 이상의 헌터들이 남았고, S급 헌터들은 전부 건재했기에 걱정은 없었다.
“이 미친 광신도 새끼들.”
“제기랄.”
피해의 규모를 떠나 폭발로 조각 조각난 사람의 육신이 덮쳐오는 것은 욕설이 절로 튀어나오는 일이다.
헌터들을 저마다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포위망을 재구축했다.
피해가 전무한 것은 아니었던 만큼, 포위망이 헐거워지는 것은 막을 수 없었지만 각자가 맡은 방위를 지키고, 공격을 재개하기에는 충분했다.
“막아!”
“놓쳐선 안 돼!”
그러나 아무리 대처가 빨랐다 하더라도, 한 번 물러났기에 시간이 지체될 수밖에 없었다.
재빨리 놈들의 뒤를 노렸지만 기사단의 행동이 더 빨랐다.
기사단은 아길라의 마법을 베어내고, 한국 헌터들을 향해 짓쳐들고 있었다.
삼면의 헌터들이 돕기에는 늦은 상황.
한국 헌터들이 그들을 막아 내던가, 시간을 끌어주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중국 헌터들의 눈에는 포위망이 뚫릴 위기였고,
“무슨 일이 있어도 길을 연다!”
기사단에게는 역으로 포위망을 뚫어낼 기회였다.
전장의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고, 실제 눈에 보이는 전황도 그랬다.
아길라가 알려진 것 이상의 힘을 발휘하고 있었지만 죽음을 불사하고 달려드는 두 명의 기사단장을 막아내는 게 한계였고, 나머지 기사들은 한국 헌터들을 몰아치고 있었다.
내 팀원들과 S급 헌터 등, 일부 헌터들이 분투하고 포위망이 뚫리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기회!’
기사단이 포위망을 뚫어내는 게 빠르냐, 중국 헌터들의 합류가 빠르냐의 싸움.
유일하게 내 시선만 달랐다.
한데 똘똘 뭉쳐 있던 요한과 기사단장들이 제각기 움직이며 갈라져 있는 상황.
아난 기사단장은 자폭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남은 기사단장 둘이 길을 열기 위해 떨어져 나왔다.
요한도 뒤에서 움직이고 있긴 하지만 빠져나갈 기회를 노리느라, 기사단장들과는 거리가 있다.
즉, 내가 기사단장의 숨통을 노리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기회였다.
남은 두 명의 기사단장마저 죽이고 나면, 요한은 혼자 남는다.
일반 기사들이 있긴 하지만 그들은 신경 쓸 필요 없고.
홀로 남은 요한 앞에서는 더 이상 존재를 감추고 있을 필요는 없을 테니.
‘프긴 기사단장부터.’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프긴과 차디.
두 명의 기사단장 중, 먼저 프긴 기사단장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지금까지 지켜본 바, 프긴의 방어를 뚫고 일격에 상대의 숨통을 끊어 놓기는 쉽지 않다.
시간이 지체 될수록 요한이 합류해올 가능성이 높아지는 만큼, 일격 일격에 확실히 기사단장들을 죽여야만 했다.
“크윽!”
“조금만 더 버텨라!”
위태롭게 흔들리는 한국 헌터들의 방어선 속에서 한 줄기 강기가 뿜어져 나왔다.
타이탄의 기사들과 같이 새하얀 빛의 강기는 아니다.
내 지난 삶과 닮아있는, 붉은 피와 검은 죽음이 뒤섞인 검붉은 빛.
나는 그 검붉은 강기와 하나가 되어 쏘아졌다.
신검합일.
피와 죽음의 강기는 정확히 프긴 기사단의 단장, 아이언의 심장을 꿰뚫었다.
“...?!”
아이언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구멍 뚫린 가슴을 내려다봤다.
이미 가슴을 꿰뚫었던 검은 보이지 않았다.
가슴을 찌른 검은 자신의 죽음을 확신한 듯, 등 돌려 차디 기사단장, 루텔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루... 쿨럭...”
아이언이 루텔에게 위험을 알리려 했지만 뒤늦게 심장에서부터 역류한 피가 소리를 밀어내고 한 움큼 쏟아져 나왔다.
‘아..아... 신이시여...’
그 피와 함께 생기마져 빠져나가버렸는지, 아이언은 마지막 말을 잇지 못한 채, 그대로 눈을 감았다.
“아이언!!!”
아이언의 죽음을 느낀 루텔이 비명과도 같은 절규를 토해냈다.
죽음을 각오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적어도 포위망을 뚫고, 요한님이 빠져나간 뒤여야 했다.
또한 아이언의 죽음을 보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이 먼저가 되길 원했다.
“으아아!!!”
그러나 바람은 처참히 부서졌다.
포위망은 아직 뚫어내지 못했고, 아이언은 죽음을 맞이했다.
이제 남은 기사단장은 자신뿐.
루텔의 눈이 흔들리며 절망이 찾아왔다.
푸욱.
죽음이 절망보다 한 발 빨랐다.
루텔이 이성을 잃고 날뛰려는 순간, 내 검이 그의 고통을 끝내주었다.
루텔은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안식의 땅으로 향했다.
“놈!!!”
내 검이 빛살이 되어 기사단장들의 검을 꿰뚫었듯, 하늘에서 새하얀 빛이 나를 덮쳐왔다.
그 빛의 정체는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거대한 강기의 검이었다.
쾅!
창공에서부터 떨어져 내리는 검은 정확히 내가 서있는 자리를 때렸고, 짧은 파열음만이 전장을 울렸다.
거대한 힘의 충돌은 소리마저 집어삼켰다.
그 빛에 짓눌린 일대의 땅이 푹 꺼져나갔고, 이내 조용한 폭발이 일었다.
...
기사단은 포위망을 뚫어야 한다는 것을 잊었고, 중국 헌터들은 기사단을 막아야 한다는 사실을 잊었다.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듯, 모두가 움직임을 멈췄다.
전장에 정적이 찾아왔다.
“팀장님...”
“김태빈 헌터...”
모두가 내 죽음을 떠올렸다.
내 팀원들 마저.
신이 인간에게 내린 천벌과도 같은 일격에 불안한 눈으로 빛이 가시지 않은 자리를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