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
138화. 요한(8).
문제는 요한을 따르는 그 목소리가 중국 헌터 진형에서 튀어나왔다는 점이다.
“너?!”
“어째서...?”
외침과 동시에 일부 헌터들이 몸을 반대로 돌려 동료 헌터들을 찔러갔다.
숨어있던 배신자들은 약 오백.
많은 수는 아니었지만 그들의 존재는 이만 헌터들을 혼란에 빠지게 만들었다.
갑작스럽게 등 뒤를 찔러오는 동료의 검에 수백의 헌터들이 손 쓸 틈도 없이 허망하게 목숨을 잃거나, 위태로울 정도의 부상을 입었다.
“장안! 정신 차려!!”
“이 개 같은 새끼...”
단숨에 절명하지 않은 헌터들은 자신을 찌른, 친했던 헌터의 이름을 안타깝게 부르기도 하고, 반대로 저주 섞인 거친 욕설을 내뱉기도 했다.
반응은 제각기 달랐지만 그들의 눈 속에 담긴 감정은 큰 차이가 없었다.
등 뒤에서 날아온 검에 혼란에 빠지고, 그 검의 주인이 지금껏 등을 맡겨왔던 동료임에 경악했고, 이내 믿었던 동료의 배신을, 자신의 죽음을 부정했다.
그들은 그렇게 죽어갔다.
“잘 가라. 이단 놈아.”
“네 놈은 지옥에서 영혼마저 고통 받을지어다.”
그에 대한 배신자들의 반응은 싸늘한 비웃음뿐이었다.
타이탄을 광신하는 배신자들이다.
타이탄에 대한 믿음만 있을 뿐, 아군을 넘어 친구, 가족마저도 그들에게는 중요치 않았다.
수년, 혹은 수십 년을 같이 해온 동료의 등을 찌르면서도 한 치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네 놈이야 말로.”
일부 변절자들의 눈이 불신으로 물들었다.
아군의 등 뒤를 찌를 때부터 죽음은 각오했다.
전투가 한창이라고는 하나, 배신을 한 순간 아군의 틈 속이 아닌, 적진 한 가운데에 던져진 것이다.
적진 한복판에서 살기를 바라는 것은 사치였다.
“어떻게... 알았지?”
그러나 이렇게 빠르게 죽음을 맞이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요한의 외침에 따라 바로 앞에 있던 동료의 등을 찌른 순간, 찔러 넣은 무기를 채 회수하기도 전에 암습이 있었다.
마치 아군 사이에 배신이 있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서걱.
“네 놈의 신에게 직접 물어 보거라.”
물음에 대한 대답은 없었다.
배신자들이 했던 것과 같은 조롱만 있을 뿐.
죽음 뒤에는 타이탄이 만든 안식의 땅이 있다고 믿는 이들이다.
그 믿음이 옳다면, 그들은 그곳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대체 어떻게.”
요한이 죽어가는 신도들만큼이나 믿을 수 없다는 듯, 전장을 바라봤다.
주변의 기사단장들이 흠칫 놀랄 정도로 깊은 분노와 함께.
기사단의 방어선이 뚫린 것부터 지원군이 막히고, 배신자들이 예상보다 빠르게 색출당한 것까지.
이번 전투에서 뜻대로 된 일이 없었다.
전세는 이제 돌이킬 수 없을 정도가 되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병사들이 빠른 속도로 스러져 나갔다.
“네 번 중, 한 번.”
요한이 중얼거렸다.
전세를 뒤흔들만한 네 번의 순간이 있었다.
모두 요한이 만들어낸.
그러나 그 네 번 중, 계획대로 흘러간 것은 단 한 번뿐이었다.
오십의 아난 기사단을 희생시켰던 순간.
그 외에 세 번은 모조리 실패했다.
단순히 실패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참담하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사실, 요한도 알고 있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자신에게 위화감을 느끼게 만들었던 존재.
이제야 자신과 같은 존재일 거라 확신한 한국의 헌터를 간과한 게 요한의 가장 큰 실수였다.
전황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버렸을 정도의 실수.
“아델... 아델의 죽음부터인가.”
시작은 프긴 기사단의 가호부터였다.
지금까지 프긴의 가호는 뚫리지 않을 철벽이었다.
요한이 고작 오천만으로 삼만의 헌터들에게 승리를 자신하게 만들 정도로 완벽한 방어.
그 방어가 처참히 깨져나갔다.
단 한 명에 의해서.
“만약 내가 생각하는 존재라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아델을 죽인 흉수는 요한이 기척을 잡아낼 수 없을 정도로 은신이 뛰어난 자였다.
무위 또한 기사단장인 아델을 일격에 죽일 수 있을 정도.
흉수가 자신이 생각하는 존재가 맞다면, 아델의 죽음은 오히려 당연했다.
자신과 같은 존재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니.
“그 때라도 후퇴했어야 했나,
아니. 아델은 잃었지만 기사단은 건재했다. 아난 기사단의 희생도 성공적이었고...
그럼?
나젤린을 허망하게 잃어서?”
두 번째 실패는 나젤린이 이끄는 지원군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무너졌다는 점이다.
사실, 중국의 지휘관이 머저리가 아닌 이상 눈에 뻔히 보이는 지원군을 보고도 손 놓고 있을 리는 없다.
병력을 나눠 지원군을 막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반응이었다.
가만히 놔두면, 적의 세가 불고 무너져가던 좌우 날개가 다시 견고해 질 테니.
굳이 따지자면, 제갈민의 대처가 예상을 훨씬 뛰어넘을 정도로 기민하긴 했다.
그러나 그 외에 특별한 대처를 한 것은 아니었다.
기껏해야 지원군의 세 배나 되는 헌터를 투입했다는 정도.
삼천의 헌터들을 보내긴 했지만 아프리카라는 대륙을 홀로 짊어졌던 검, 나젤린을 상대로는 한참이나 부족한 수였다.
그렇기에 요한은 나젤린이 적들의 저지선을 순식간에 뚫어낼 수 있을 거라 여겼다.
그러나 결과는...
“한국으로 귀화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그 또한 그 자의 손이 닿았던 것인가.”
같은 SS급인 아길라에게 참패.
마법사가 다수의 적을 상대할 때, 진가를 발휘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압도적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본대의 전투만 봐도 수많은 마법사들의 마법이 끊임없이 서로를 향해 쏟아지고 있지만 아길라와 같은 파괴력을 보여주는 마법사는 없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막혀 상쇄되거나, 헌터들의 마나가 실린 공격과 방어에 소멸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돌이켜보면, 아길라의 마법은 단순히 SS급 헌터라는 말로는 설명이 되질 않았다.
“마지막으로 오랜 시간 공들여 심어놓은 신도들까지.”
마지막으로 적들 사이에 심어 놓았던 신도들.
타이탄은 오랜 세월에 걸쳐 세계 각국의 인간들을 교화해나갔다.
성공한 인간보다 실패한 인간이 더 많았지만 분명 성과는 있었다.
요한은 그 중, 당장 필요하다 여겨지는 이들만 성역으로 불러들이고, 나머지는 본래의 자리를 지키도록 했다.
그렇게 남겨진 이들 일부는 타이탄의 신도이면서 세계 각국의 주요 인사가 되었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오늘과 같이 동료의 등을 노리면서 그 쓰임을 다했다.
둘 다 타이탄이 유럽 전체를 순식간에 집어삼킨 힘이 되어주었다.
당연히 중국과 미국, 그리고 러시아에도 그렇게 심어둔 신도들이 있었다.
그 수가 유럽만큼 많지는 않았지만 숨겨둔 한 수가 되기에는 충분했다.
아군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오백의 적.
하물며 그 적에 방금 전까지 같은 아군이었던 이들이라면,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놈들은 이미 신도들이 존재함을 알고 있는 듯했다.”
오백의 신도 중, 수십이 암습과 동시에 죽어 나갔다.
나머지가 정리되는 것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좌우에서 기사단을 암살하던 살수들이 움직인 탓이다.
타이탄 기사단이 움직이면 몸을 빼낸 그들은 신도가 움직이기 직전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신도의 정체를 정확히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존재는 알고 있었어야 가능한 대처였다.
“...”
도합 세 번의 실패.
요한의 머릿속에 ‘패배’라는 두 글자가 드리워졌다.
둘, 아니 하나만 제대로 성과를 거뒀다면 상황이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위화감을 느낀 순간 물러났어야 했는지도...’
위화감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져온 경고를 무시한 대가는 너무나도 크고 썼다.
“요한님.”
“교황 성하.”
기사단장들이 요한의 상념을 깨웠다.
지원군도, 신도들도 전부 무너졌다.
기사단과 헌터들이 버텨내고는 있었지만 제 발로 서있는 이들이 죽은 이들보다 더 적다.
더 이상 전황을 뒤집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까드득.
“이 수모는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요한이 붉게 핏발이선 눈으로 전장을 바라봤다.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명확했다.
훗날을 도모한다는 것은 지금의 패배를 의미했다.
요한이 패배를 시인한 것이다.
“전군 후퇴하라!”
기사단장들이 요한을 대신해 목소리를 높였다.
차마 요한의 입에 후퇴라는 글자까지 담게 할 수 없었다.
“기사단은 현 진형 유지하면서 물러난다.”
“제 3성전사단이 후방을 맡는다!”
퇴각 소리에 고군분투하던 기사단이 빠르게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헌터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헌터들은 최전방에 있던 기사단이 빠져나올 시간을 벌어야 했고, 후방을 맡게 된 3성전사단은 목숨으로 남은 헌터들의 후퇴를 도울 것이다.
이미 삼면이 포위당하고, 좌우 양 날개마저 무너져 버린 상황에서 얼마나 버텨줄 지는 미지수지만, 설령 헌터 전부가 죽는다 해도 기사단은 최우선적으로 보존해야 할 전력이었다.
“적들이 후퇴한다!”
“와아아!”
중국 헌터들이 도망치는 타이탄의 기사단을 보며 환호했다.
“적들을 추격하라!”
아직 추격이 남아 있었지만 전투와 추격은 다르다.
더 이상 적들의 창칼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었다.
사기충천한 중국 헌터들이 후퇴하는 타이탄의 헌터들을 추격 섬멸하기 위해 움직였다.
***
기사단도 간신히 버틴 자리를 헌터들만으로 메울 수는 없었다.
타이탄의 헌터들은 기사단이 물러서는 것만큼 빠른 속도로 무너져나갔다.
“제 2성전사단, 3성전사단을 지원하라.”
3성전사단에 이어 2성전사단.
타이탄은 차례로 헌터들을 버렸다.
‘타이탄의 뜻에 따라’, ‘타이탄을 위해’ 등의 거창한 말로 포장하긴 했지만 수백의 기사단을 살리기 위해 수천의 헌터를 버린 것이다.
“예.”
자신들을 버리는 명령이었지만 성전사단의 헌터들은 망설임 없이 중국 헌터들 앞을 가로 막았다.
죽을 자리임을 알고 있음에도 광신에 빠진 그들은 단 한 명도 도망치거나 항복하지도 않았다.
종교에 환각이 더해져 만들어낸 광기였다.
“기사단을 쫓아라!”
성전사단의 초개와 같은 희생에도 시간은 많이 벌지 못했다.
정말 눈 깜짝 할 새.
중국 헌터들의 공세는 그들을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갈기갈기 쓸어버렸다.
그 사이, 기사단이 거리를 벌리기는 했지만 아직 시야에 잡힐 정도다.
중국 헌터들은 끝까지 추격을 포기하지 않았다.
“저희가 시간을 벌겠습니다.”
아난 기사단장 릭이 말했다.
점차 중국 헌터들과의 거리가 좁혀지고 있다.
이대로라면, 따라잡히는 건 시간문제였다.
“헛소리! 시간을 끄는 것이라면, 프긴에게 맡겨라.”
질세라 프긴 기사단의 아이언의 말이 이어졌다.
각자가 이유는 있었다.
아난 기사단의 희생, 프긴 기사단의 방어라면, 요한과 다른 기사단이 무사히 퇴각 할 만큼의 시간은 충분히 벌 수 있었다.
그렇게 각자의 이유를 들며 릭과 아이언이 설전은 벌이려는 순간,
“저희에게 기회를 주십시오. 아델님과 마지막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기사단장 아델을 잃은 마흘 기사단의 부단장이 끼어들었다.
“음...”
“부단장.”
릭과 아이언이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남아야할 이유를 꼽자면, 기사단장을 잃은 마흘 기사단의 마음을 따를 것이 없었다.
“체이스. 믿겠다. 훗날, 안식의 땅에서 다시 만나자.”
요한이 결정을 내렸다.
어차피 한 개의 기사단은 포기해야 한다.
아깝지 않은 기사단이 없지만 기사단장 자리가 빈 마흘 기사단을 잃는 게 나았다.
철저한 계산이 깔려있는 선택이다.
그럼에도 요한의 눈은 계산보다는 믿음으로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