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7
137화. 요한(7).
타이탄 기사단이 움직였다.
남은 네 개의 기사단도 그 여세를 몰아 전선을 몰아치기 시작했다.
다섯 개 기사단을 다 합쳐도 고작 사백이 되지 않았지만 그들이 만들어 낸 기세는 총공세를 펼치던 중국 헌터들을 주춤하게 만들 정도였다.
“좌측 방어선 거의 뚫었다! 화력 집중해!”
“우측도! 정면 좀만 더 버텨!”
그러나
이미 기울어진 전세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기사단이 묶어 두고 있는 적은 일만 남짓.
사백이 무려 이십 배가 넘는 수를 상대로 오히려 우세하게 느껴질 정도의 활약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한계는 명확했다.
남은 일만의 중국 헌터들이 계속해서 타이탄의 양옆을 공략하고 있었고, 정면을 제외한 방어선이 점점 더 빠른 속도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좌우만 무너트리면 끝이다.
기사단이 아무리 강력하다 해도, 사방에서 쏟아지는 공격을 버텨낼 수는 없을 테니...
그렇게 전투의 끝이 보이는 듯했다.
그 때,
두두...
비명과 절규가 가득한 전장에 미세한 떨림이 일었다.
전투가 한창인 탓에 전장에 있는 대부분, 아니 단 한 사람을 제외하면 아무도 느끼지 못할 만큼, 작은 떨림이었다.
‘지원군?’
나만이 그 떨림의 존재를 느꼈다.
최소 일천이상의 인마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땅의 울림.
전투가 한창인 전장 주변에서 그만한 인원이 움직일 일은 지원군뿐이었다.
‘이 또한 숨겨둔 수인가.’
삼만의 군세를 이끌고, 우세를 점하고 있는 중국이다.
고작 일천 정도의 지원군이 필요한 상황은 아니었고, 제갈민으로부터의 전언도 없었다.
타이탄의 지원군이다.
아난 기사단의 자폭과 같이 요한이 숨겨두었던 수.
타이탄 기사단이 움직이고, 웅크리고 있던 타이탄이 태세를 전환한 이유였다.
두두두두!
땅을 울리는 떨림은 점차 커져갔고, 이내 시끄러운 전장 속에서도 모두가 알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해졌다.
하나둘 시선을 돌려 떨림의 근원지로 향했다.
“뭐...뭐야?!”
“헌터?!”
시선의 끝에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모래폭풍을 만들어내며 일반인의 발걸음으로는 불가능할 정도로 빠르게 달려오는 무리.
정체불명의 무리는 금세 피아식별이 가능해질 정도로 가까워졌고,
피아의 식별이 가능할 정도로 가까워진 순간,
“우와와!”
타이탄 측 헌터들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나젤린?”
무리의 선두에는 한 여인이 있었다.
자신의 피부와 같은 검은 빛깔의 갑주를 입은 여인.
블랙 드래곤의 비늘로 만들어진 갑주의 주인은 나젤린.
과거 아프리카의 검이었으나, 지금은 타이탄의 기사가 된 여인이었다.
“죽은 줄 알았거늘.”
멀리서 지원군의 등장을 지켜본 제갈민의 중얼거림이었다.
과거 살막은 세를 불리기 위해 세계 각국의 헌터들을 포섭해 나갔고, SS급 헌터였던 나젤린도 당연히 접촉 대상 중 하나였다.
하지만 살막이 나젤린을 찾았을 때는 이미 타이탄이 선수를 친 뒤였다.
그리고 수년.
나젤린은 단 한 번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때문에 세간에는 상위 던전을 공략하다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고, 그 소문은 좀 더 시간이 흘러 기정사실화 되었다.
그런 나젤린이 타이탄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순간, 지원군을 이끌고 나타난 것이다.
“이미 늦었다.”
나젤린은 SS급 헌터.
갑작스럽게 강력한 적이 등장했지만 제갈민은 놀라지 않았다.
일천.
적지 않은 수였지만 이미 기울어진 전세를 뒤집기는 어려웠다.
“그래도... 몰랐다면 조금은 위험했겠지.”
제갈민은 지원군을 막기 위해 곧장 삼천의 병력을 움직였다.
앞서 태빈에게 전해 들었기 때문에 할 수 있던 기민한 대처였다.
그 덕분에 지원군의 등장에도 놀라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태빈이 자신에게 알려온 수단에 더 놀랐다.
혜광심어.
상대방의 위치만 안다면, 공간에 제약 없이 뜻을 전하는 혜광심어는 현경의 고수만이 가능한 지고의 전음술이다.
물론, 태빈이 현경의 고수라는 사실은 짐작하고 있었다.
여문휘에 이어, 혈검과 독괴, 그리고 수백의 무풍대를 쓸어버리면서 그 무위를 증명했으니.
그러나 짐작하고 있던 것과 직접 알게 되는 것은 달랐다.
갑자기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줄로만 알았다.
뒤늦게 말로만 들어오던 혜광심어임을 깨달았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추태를 보일 뻔 했다.
지원군을 바라보던 제갈민의 시선이 다시 본대의 전선으로 향했다.
***
지원군의 앞을 막아선 것은 아길라를 비롯한 한국의 헌터들이었다.
비교적 안전한 후방에서 중국 헌터들을 보조하던 한국이다.
제갈민은 그들에게 타이탄의 지원군을 맡겼다.
나머지 헌터들은 아직 회복 중이거나, 본대와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에 급히 움직일 만한 병력이 그들뿐이었다.
또한 당장 나젤린을 막을 수 있는 겉 같은 SS급 헌터로 알려진 아길라뿐이었다.
물론, 제갈민은 같은 SS급이라도 마법사인 아길라가 나젤린을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위 등급의 헌터들 사이에서는 접근전이 아닌 이상에야 마법사가 유리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상위 등급으로 올라갈수록 마법 계열의 헌터들은 근접 계열 헌터들에게 취약해지니까.
헌터의 빠른 몸놀림으로 인해 조준하기도 어렵고, 범위 마법을 쓴 다 해도 높아진 저항력으로 버텨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한국 헌터들에게 맡긴 건, 이 기회에 한국의 전력을 갉아 먹으려는 계산도 깔려 있었다.
속셈을 숨기기 위해 이천을 더 붙여 준 것이다.
삼천쯤 되면, 피해가 있더라도 막아낼 수 있을 테니, 한국에 피해도 입히고, 지원군도 막아낸다면, 일석이조였다.
“아길라.”
나젤린이 자신의 앞을 막아선 아길라를 알아 본 듯, 중얼거렸다.
그러나 달려오던 속도를 늦추지는 않았다.
오히려 단숨에 저지선을 뚫어내기 위해 더욱 속도를 높여왔다.
“파이어월!”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아길라가 아니었다.
자신이 한 발 내딛었다고는 하나, 기사인 나젤린에게 거리를 내주는 것은 위험했다.
끊임없는 단련으로 보통의 마법사들과 달리, 체력도 뛰어난 아길라였지만 SS급인 나젤란을 뛰어남을 정도는 아니다.
거대한 불길이 지원군의 앞길을 틀어막았다.
길을 막고 솟아오른 아길라의 파이어월뿐만 아니라, 헌터들이 쏟아낸 갖가지 마법과 화살 등이 퍼부어졌다.
“고작 파이어월이라니?! 나를 우습게 보는 구나!”
나젤린이 소리쳤다.
파이어월은 B급 헌터부터 만들어 낼 수 있는 불의 장벽.
헌터의 등급이 높아져도 마법의 위력이 높아지는 게 아닌 만큼, B급 헌터만 되어도 어렵지 않게 뚫어낼 수 있는 마법이다.
고작 파이어월 정도로는 자신과 휘하 병사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한 번 넘어 보거라!”
나젤린의 생각과 다르게 아길라는 자신만만했다.
과거였다면 나젤린의 말대로 고작 파이어월로 적들을 막아서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적들이 고작 B급 마법이라 경시하는 파이어월이지만 자신의 손에서 펼쳐진 이상, 저들이 알던 것과는 많이 다를 것이다.
화르륵.
“큭...무슨?!”
나젤린은 자신했던 것처럼 검은 강기로 불의 장벽을 갈라버렸다.
그럼에도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마나를 두르고 있었음에도 열기가 전신을 뜨겁게 달궜다.
뭔가 잘못됐다.
고작 B급 마법이 강기에 소멸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SS급 헌터인 자신이 뜨겁다 느낄 정도라니.
“멈춰!!!”
절규와 같은 나젤린의 절규가 튀어나왔지만.
“크아악!”
보통의 파이월과 다른 불길의 힘을 이겨내지 못한 헌터 몇이 불에 타는 끔찍한 고통을 겪으며 죽어갔다.
나젤린의 바로 뒤를 따르던 S급과 A급 몇 명만이 검기로 벽을 뚫어내고 뒤따랐을 뿐, 그 외에는 접근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당장 수계마법을 펼쳐라!”
“워터볼!”
“아이스월!”
“어떻게...?”
수계 마법으로 불길을 꺼트리려 했지만 A급 헌터들의 마법에도 쉽게 잡히지 않았다.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불의 장벽을 바라보는 나젤린이다.
어떻게... 고작 B급 마법이.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상식을 송두리째 깨버리는 아길라의 마법이었다.
“놀라긴 이르지. 라바필드! 볼케이노!”
파이어월은 시작에 불과했다.
파이어월의 상위 마법인 라바필드부터, S급 마법, 볼케이노 까지.
용암의 대지가 지원군의 발밑에 펼쳐졌고, 솟아오른 땅에서 화산이 폭발했다.
불의 향연이 지원군을 끊임없이 덮쳐갔다.
“아길라... 이게 SS급 마법사인가...”
나젤린의 얼굴이 참담할 정도로 어두워졌다.
자신은 버텨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헌터들에게 아길라의 마법은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
지원군은 아길라의 마법에 허망하게 쓸려나갔다.
“놈!”
나젤린이 뒤늦게 아길라를 향해 달려들었지만 삼천의 헌터들이 구경꾼은 아니었다.
내 팀원들을 비롯한 S급 헌터들이 앞장서서 나젤린을 막아섰다.
내 팀원 넷과 차예린, 신유연까지 여섯 명.
그들이 평범한 S급 헌터들이었다면, 고작 여섯으로는 나젤린을 막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중 넷.
팀원들은 나와 수시로 대련을 해왔다.
그만큼 강자와의 싸움에 익숙했다.
나젤린이 SS급의 강자라고 하지만 나에 비할 바는 아니다.
초식, 검술의 기본도 없이 갑자기 주어진 힘을 휘두를 뿐인 나젤린은 팀원들에 차예린과 신유연이 더해진 합진을 뚫어내지 못했다.
“투항하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곧이어 몇 번의 마법으로 백 이상의 적들을 죽이고, 나젤린을 완전히 고립시킨 아길라가 합류하면서 상황이 역전됐다.
“개소리 집어치워라.”
나젤린은 검을 놓지 않았다.
타이탄의 신도로 거듭난 나젤린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끝까지 항전했다.
지원군 전원이 마찬가지였다.
몸으로, 시체로 불을 꺼트리면서 아길라와 한국 헌터들에게 맞섰다.
결과가 보이는 싸움이었지만 그들은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
지원군은 걱정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아길라를 비롯한 한국 헌터들은 지원군을 상대로 압도적인 우세를 점하고, 적들을 착실하게 섬멸해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지원군의 등장에 잠시 기세를 올렸던 타이탄의 본대도 지원군이 지리멸렬하는 모습에 마지막 희망이 꺾이며 사기가 곤두박질쳤다.
유일하게 기사단만이 공세를 늦추지 않았다.
기어코 정면을 무너트리겠다는 듯, 몰아쳤다.
잠깐 사이에 이천 이상이 헌터들이 기사단의 공세에 무너졌다.
그러나 그 뿐,
시간이 흐름에 따라 아난 기사단의 자폭에 무력화 됐던 헌터들이 차례로 전선으로 복귀했고, 그에 따라 간신히 버티고 있던 타이탄의 좌우가 동시에 무너졌다.
방어선이 뚫리자, 타이탄의 헌터들은 몰려드는 중국 헌터들의 파도에 이리저리 휩쓸리기 시작했다.
그 때,
“타이탄의 종들이여! 신의 뜻을 따르라!”
요한의 외침이 전장을 울렸다.
전투의 결과가 드러남에 따라, 옥쇄를 준비하는 느낌의 외침이었다.
그러나 요한의 눈은 죽음을 각오한 눈이 아니었다.
그의 눈은 여전히 승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타이탄의 뜻을 따르라!”
동시에 전장 곳곳에서 요한의 외침을 따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