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6
136화. 요한(6).
나는 아난 기사단이 만들어낸 빛의 중심에 있었다.
아델을 죽이면서 적진 가장 깊숙한 곳까지 들어왔던 탓이다.
이내 빛이 사방을 휩쓸었고, 그 순간 나는 빛의 가진 힘을 파악할 수 있었다.
마나와 비슷하지만 다른 그 기운이 마나를 대신해 일대를 가득 채웠다.
자연에 머무는 마나와 인간의 몸속에 있는 마나를 밀어내면서.
내공을 흩어 놓는 산공독과 같았다.
지독하리만큼 독한.
‘삼십장 이내의 마나를 소멸시키는 자폭이라.’
살상력을 갖춘 것은 아니지만 그 효과는 자신의 몸을 흉기로 주변 오장을 초토화시키는 폭렬공보다 더했다.
적의 몸을 꿰뚫을 때마다 위력이 약해지는 폭렬공과 달리, 아난 기사단의 자폭은 범위 내에만 있다면 수에 구애받지 않았으니까.
뿐만 아니라, 그 범위 또한 폭렬공의 여섯 배에 달했다.
그 결과, 빛의 폭발에 휩쓸린 헌터만 일만.
중국이 지닌 전력의 삼분지 일에 해당하는 수가 무력화 상태에 빠졌다.
기사단을 상대하기 위해 주요 전력 상당수가 전선에 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실제 피해는 그 이상이다.
밀려났던 마나가 곧바로 제 자리로 돌아오고는 있었지만 자연적인 회복을 기대하기에 턱없이 지구의 마나 분포는 낮다.
적어도 한 시간 이상은 본래의 능력을 발휘하기 힘들 것으로 보였다.
‘그것도 내게는 통하지 않았지만.’
일만의 마나를 앗아간 빛이 유일하게 밀어내지 못한 마나가 있었다.
바로 내 단전의 내공.
자연의 마나마저 전부 밀어낸 빛이었지만 더 강대한 힘 앞에선 무력했다.
내 마나에 닿은 빛은 더 눈부신 힘이 덧없이 삼켜졌다.
‘기회.’
오히려 요한과 기사단장들이 공세를 퍼붓는 지금이 내게는 기회였다.
우왕좌왕 도망치는 적들 앞에서 그들은 무방비했다.
방어를 뒤로 한 채, 중국 헌터들을 죽이는데 열을 올리고 있었다.
다시 한 번, 기회가 찾아왔다.
툭.
바닥에 떨어진 검 한 자루를 주워들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겹겹이 쌓은 시체만큼이나 버려진 병장기들 또한 많아졌다.
생기를 잃어버린 전 주인의 몸과 달리, 아직 예기를 잃지 않은 검이다.
암기로 쓰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쐐애액!
내 손을 떠난 검이 허공을 갈랐다.
빛의 꼬리를 그리며 날아간 검의 목표는 아난 기사단장이었다.
일개 기사단원들의 자폭으로 일만의 아군을 무력화시켰다.
기사단장급이 나선다면, 내게도 조금은 영향이 미칠지 몰랐다.
물론 가능성은 낮지만, 위협이 될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미리 싹을 잘라 놓는 게 나았다.
콰직. 콰직.
내 손을 떠난 검은 앞에 놓인 것들을 꿰뚫었고,
서걱.
끝내 아난 기사단장의 신체를 베어냈다.
그러나 아쉽게도 목표를 이루지는 못했다.
검 앞에 놓인 것들.
살육에 눈이 먼 기사단원들이 경로 상에 끼어든 탓이다.
기사단원의 몸을 꿰뚫느라 기세가 꺾였고, 아난 기사단장이 검을 눈치 챈 탓에 왼팔을 잘라내는데 그쳤다.
이기어검의 묘리로 검을 움직였다면, 충분히 심장을 뚫어낼 수 있었지만 기척을 드러내지 않는 선에서는 이 정도가 한계였다.
쐐애액!
나는 도망치는 두세 자루의 검을 날려 약간의 시간을 번 뒤, 헌터들과 함께 물러났다.
양측을 합쳐 일만 가량이 죽어나갔지만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직 남은 기회는 많았다.
***
“아델에 이어 릭까지...”
“누군가 저희들을 노리고 있는 듯합니다.”
“기사단장들은 서로 간의 간격을 유지하고, 긴장을 늦추지 마라.”
타이탄은 다시 방어를 견고히 한 채 몸을 웅크렸다.
보이지 않는 흉수의 손길에 가장 큰 전력인 기사단장들의 움직임이 제약된 탓에 방어라는 선택지밖에 택할 것이 없었다.
“기세를 이어갔어야 하거늘.”
“비겁한 이단 놈들.”
눈앞의 헌터들을 신경 쓰면서 암습까지 걱정해야 하는 기사단장들이다.
한시 빨리 적들을 치워버리고 싶건만, 그럴 수 없으니 답답함을 느꼈다.
은연중에 교황이 나서줬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이를 내색할 수는 없으니 불평만 쏟아내고 있는 것이다.
“...”
요한은 전투에서 아예 발을 뺀 채, 흉수를 찾기 위해 감각을 집중했다.
그러나 그의 기감에 걸리는 것은 기사단장급에도 못 미치는 벌레들 뿐, 흉수의 존재는커녕 흔적조차 찾지 못했다.
“으음...”
저도 모르게 요한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자신의 온 신경을 집중해도 찾을 수 없는 흉수의 존재.
“그 자인가...?”
떠오르는 얼굴은 있었다.
며칠 전 봤던 한국의 헌터.
자신으로 하여금 위화감이라는 낯선 느낌을 받게 만들었던 헌터가 지금의 전장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한국에 있었군.”
요한이 작게 중얼거렸다.
여문휘라 생각했던, 자신과 같을지 모르는 존재가 보이지 않는 흉수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
“마나를 없애는 힘이라니.”
“기사단의 움직임을 주시해라.”
이만에 달하는 중국 헌터들이 후방을 제외한 반원 형태로 타이탄의 헌터들을 포위하고 있었지만 적극적인 공세는 없었다.
중국은 공세를 퍼붓기 보다는 마나를 잃은 헌터들이 회복되기를 기다리며 언제 또 자폭해올지 모르는 기사단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타이탄도 몸을 잔뜩 웅크린 상황.
치열했던 전투가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그도 잠시.
“살수들을 투입한다.”
먼저 움직인 것은 중국이었다.
네 배가 넘는 수로 적들을 포위하고 있는 상황이다.
주요 전력이 후방으로 물러난 데다, 기사단의 자폭이 걱정되긴 하지만 제갈민은 몸을 사리기보다 승부를 택했다.
설령 기사단이 다시 자폭을 해오더라도 이미 한 번 당한 수에 또 당할 만큼 어리석진 않다.
피해를 완전히 피할 수는 없겠지만 처음과 같이 오합지졸마냥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공격하라!”
제갈민이 보내온 신호에 따라 소극적이던 헌터들이 총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사기가 급격히 떨어진 상태였지만 공격명령이 떨어지자, 헌터들은 망설이지 않았다.
탱커와 딜러들은 성난 황소와 같이 돌격했고, 수천 발의 마법과 화살이 적진을 향해 쏘아졌다.
“프긴의 방패는 적들의 공격을 허하지 않을 것이다!”
“마흘의 창이 적의 심장을 꿰뚫으리라,”
타이탄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각 기사단이 스스로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공세에 맞서나갔다.
열세에 처해있음에도 신을 광신하는 타이탄에게서 두려움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콰콰콰쾅!
잠시간의 소강상태를 비웃기라도 하듯, 다시 한 번 대지가 울부짖기 시작했다.
***
전투가 재개되고, 아니 다시 치열해지고,
백 명의 살수들과 두 명의 특급 살수가 은밀히 행동을 개시했다.
스윽.
열 명씩, 열 개조로 이루어진 백 명의 살수들이 특급 살수들의 신호에 따라 다섯 개 조씩 나뉘어 좌우로 향했다.
기사단이 중국 헌터들의 공세에 집중하는 사이, 타이탄의 헌터들을 노리기 위함이다.
기사단을 죽이는 게 전세에 더 많은 영향을 끼치긴 하겠지만, 특급 살수 둘을 제외한 백 명의 살수들은 고작해야 일류.
기사단 개인의 역량이 살수들보다 뛰어날 뿐 아니라, 기사단장들의 눈을 피하기도 쉽지 않다.
때문에 기사단을 노리기에는 위험부담이 컸다.
반면, 헌터들이 버티고 있는 좌우는 정면에 비하면, 그 방어가 헐거웠다.
정면으로 전선이 길게 늘어섰던 초기와 달리, 지금은 아군이 적들의 좌우까지 포위한 형태.
방어가 헐거운 좌우는 금세 난전으로 변할 테고, 살수가 움직이기에 난전만한 곳이 없었다.
또한 좌우가 무너지면, 결국 기사단이 움직일 터.
전체가 움직이지는 않을 테니, 떨어져 나온 일부 기사단을 노릴 계획이었다.
“커억!”
보이지 않는 사각에서 튀어나온 검에 타이탄의 헌터 하나가 비명을 토하며 쓰러졌다.
그와 비슷한 비명이 타이탄의 헌터들이 만든 방어선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비명이 난 곳은 기사단이 버티고 있는 정면이 아닌 좌우.
“좌측. 열 지원.”
“우측. 스물.”
기사단장들이 즉각 기사단원을 보내며 밀리는 헌터들을 지원했지만 고작 열, 스물의 기사단원으로는 수백수천의 헌터들을 막아내는 것만도 급급했다.
살수의 존재를 알고 있다면 모를까,
이만 중, 백.
한줌도 되지 않는 수다.
타이탄은 아직 살수의 존재를 깨닫지 못했고, 타이탄의 헌터들은 은밀하면서도 확실하게 그 수가 줄어들고 있었다.
***
“이런!”
“암살자다!”
기사단장들이 눈치 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수백 단위의 헌터들과 살수들의 손에 목숨을 잃었고, 헌터들에게 당한 것까지 더하면 천이 넘었다.
오천도 되지 않던 수가 사천 언저리로 줄어들었다.
그 속에는 헌터들의 죽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기사단원도 수십이 죽어나갔다.
수가 적어지는 것 이상으로 방어선이 취약해지고, 한명의 헌터, 한명의 기사단원이 막아내야 할 적의 수는 늘어난다.
기사단이 웅크리고 있는 사이,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져있었다.
기사단이 고군분투 하고 있는 덕분에 중국 헌터의 수도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었지만 같은 수를 잃어도 타이탄 측은 그 피해가 더 뼈아프게 다가왔다.
“요한님.”
기사단장들의 시선이 일제히 요한에게로 향했다.
암살자들이 암약하고 있는 좌우가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신념으로 똘똘 뭉친 기사단장의 머릿속에 패배라는 두 글자가 떠오를 만큼, 전세는 위태로웠다.
“타이탄님의 사자인 우리에게 패배란 없다.”
타이탄.
그 이름을 언급한 것만으로 기사단장들의 눈빛이 변했다.
잠시 잊고 있었다.
자신들이 누구의 이름 밑에서 싸우고 있는지.
신의 사자인 자신들이 이단에게 무너질 리 없다.
지금은 위태롭지만 지나가는 시련일 뿐이다.
언제나 그랬듯, 신이 자신들이 가는 길을 밝혀줄 것이다.
“타이탄 기사단.”
요한이 지금까지 움직이지 않고 있던 기사단의 이름을 불렀다.
타이탄 기사단.
교황 요한이 직접 이끄는 타이탄 최강의 전력이다.
전 기사단을 더해도 타이탄 기사단 하나에 미치지 못할 정도.
아델이 죽고, 잠시 요한의 곁을 지키고 있었지만 그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요한이 그저 흉수에 대한 두려움으로 몸을 웅크리고 있던 것이 아니다.
때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다.
그 때가 바로 지금이었다.
기다림 속에 백이 넘는 기사단의 피해는 안타깝지만 나머지 헌터들은 소모품.
눈앞의 이단을 전부 치워버릴 수 있다면, 전혀 아깝지 않았다.
***
“끝났나.”
죽어가는 타이탄의 헌터들을 보며 제갈민이 말했다.
오천 대 삼만.
아무리 개개인의 무력에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압도적인 차이다.
예상하지 못한 수에 잠시 주춤하긴 했지만 더 이상 반전의 여지는 없어 보였다.
“고수를 양성해야 한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요한과 기사단장을 먼저 처리하겠다는 계획은 실패했다는 점이다.
절정 무인 열 명, 백 명보다 한 명의 초절정 고수가 아쉬웠다.
오랜 시간 공들여 준비했음에도 고수의 부재를 메울 수는 없었다.
불과 몇 달 사이에 기사단장들의 무위가 전보다 더 강해진 탓이다.
무인이 헌터들과 달리, 높은 경지로의 발전이 가능하듯, 타이탄의 기사단 또한 강해진 것이다.
다행히 태빈이 그들의 발을 묶어준 덕분에 우세를 점할 수는 있었지만 이번 전투가 끝이 아니다.
태빈은 지금의 전투가 끝나고 나면, 언제든지 적으로 돌아설 수 있는 존재.
중국만의 고수가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