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
135화. 요한(5).
빛이 사라진 자리에는 순식간에 삼사십 년을 늙어버린 오십의 기사단원만이 남았다.
기사단을 상징하는 갑옷이 아니었다면, 어느 누구도 그들을 좀 전의 기사단원들이라고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것 없는 오십의 노인들이 가쁜 숨을 내쉬며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난.”
그들을 바라보는 타이탄 측의 헌터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지만 나머지 삼백오십의 기사단원들은 단 한 명도 빼놓지 않고 아난 기사단의 희생에 경의를 표했다.
아난 기사단이 바친 것은 생명력.
지금은 노인의 모습으로 숨 쉬고 있지만 생명력이 다한 그들은 곧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죽음 뒤에는 영원한 안식이 있기에 슬퍼할 이유는 없지만 남은 삶을 바친 희생은 존중받아 마땅했다.
“프긴 기사단, 돌격!”
“마흘 기사단, 적들을 꿰뚫어라!”
“차디 기사단, 프긴과 마흘을 지원한다!”
지금까지는 방어를 굳건히 한 채, 다가오는 적들만을 참살하던 타이탄이다.
그러나 아난 기사단의 희생 뒤, 오히려 기사단장들을 필두로 중국 헌터들을 덮쳐 왔다.
오천에 불과한 타이탄이 삼만을 상대로 역으로 공세를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만용에 가까운 행동이었지만 기사단원들 눈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어리석은.”
“신에게 눈이 멀어 판단력마저 잃은 건가.”
중국 헌터들은 타이탄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리 아난 기사단의 희생으로 사기충천했다 해도 중과부적이다.
오천과 삼만은 사기를 끌어올리는 것만으로는 절대 뒤집을 수 없는 차이였다.
그러나
“힘이?!”
“내공이!”
잠시 멈췄던 전투가 다시 재개되고, 곳곳에서 당혹, 경악의 감정이 담긴 외침이 터져 나왔다.
아난 기사단이 보인 희생의 의미가 드러나면서 상황이 반전됐다.
빛이 집어삼킨 일대에 마나가 사라졌다.
각성자는 마력의 형태로, 무인은 기라는 이름으로 자연에 머무는 마나를 축적해 힘을 발휘한다.
그 마나가 사라진 상태에서는 제 아무리 상위 헌터, 절세 고수라 해도 제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빛에 휩쓸린 일만에 가까운 헌터들이 순식간에 평범한 범인으로 변해버렸다.
“도망쳐...”
마나라는 힘이 사라지자, 중국 헌터들은 자신들을 향해 짓쳐드는 타이탄의 기사단을 보며 두려움을 느꼈다.
스스로를 지킬 힘을 잃어버린 헌터들은 더 이상 두려움을 이겨내고 전장에 서있지 못했다.
하나둘 등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고, 삼만의 진형이 한순간에 허물어졌다.
마나의 소멸 앞에 여섯 배에 달하는 수적 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어째서 우리까지...”
사실, 타이탄 측의 헌터들도 일부 마나를 잃었다.
일대의 마나를 한순간 빛이 대신하는 힘에는 피아의 구분이 없었다.
앞서 나가는 기사단의 기세에 절로 몸이 뒤따르고 있을 뿐, 혼란에 빠진 것은 중국 헌터들과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모두가 힘을 잃고 혼란에 빠져 바동대는 때에,
“이단을 척결하라!”
“어리석은 이단에게 타이탄의 심판이 있을지니.”
기사단만은 달랐다.
기사단은 마나 외에도 가진 힘이 있었다.
신성력.
신께 부여받은 기운이 그들의 진정한 힘이었다.
아난 기사단의 희생에서 비롯된 힘은 과거 타이탄의 기사단이 마법사들과 다른 기사들을 무력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
마나가 사라진 자리에는 신성력만이 남았고, 더 이상 기사단을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없었다.
신성력이 아니었다 해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기사단. 그 이름에 걸맞게 그들은 마나를 잃어도 훈련을 거듭해온 정예 중의 정예였다.
갑자기 각성한 힘을 가지고 몬스터와 싸워왔을 뿐, 제대로 된 훈련을 받아본 적이 없는 헌터들이 기사단을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두두두두!
후퇴하는 적들을 보며 타이탄의 기사단이 속도를 높였다.
전선에 뒤섞여 있던 모두가 마나를 잃은 상황에서 여전히 인간을 초월한 힘을 가진 기사단의 존재는 재앙과도 같았다.
중국 헌터들이 등 돌려 도망치기도 전에 먼저 기사단의 창칼이 쏟아졌다.
“커억!”
비명이 터져 나왔다.
기사단원의 일검에 하나씩, 기사단장들은 그 이상.
수백이 한순간에 목숨을 잃었다.
“우왕좌왕하지 말고 침착하게 후퇴해!”
“후열은 빨리 전열과 교대한다!”
몇몇 지휘관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며 혼란을 수습하려 했다.
아난 기사단이 희생하며 만들어낸 영역이 모두에게 닿았던 것은 아니다.
선두를 제외하고, 그 영향을 받지 않은 이만이 넘는 헌터들이 후열을 받치고 있다.
침착하게 교대만 이루어진다면, 기사단의 창칼을 막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저리 비켜!”
“막지 마!
마나를 잃으며 이미 한 차례 혼란에 빠진 헌터들이다.
죽음의 그림자까지 등 뒤를 바짝 쫓아오자 제 정신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그들은 사라졌던 마나가 다시 되돌아오고 있음을 느끼지도 못한 채, 기사단을 피해 정신없이 달리고 있을 뿐이었다.
“살려...악!”
통제되지 않은 상태로 후퇴하는 헌터들은 기사단에게 좋은 먹잇감에 불과했다.
중국 헌터들은 도미노마냥 픽픽 쓰러졌다.
수백이 천 단위로 늘어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기사단원 삼백이 각기 서너 번만 창칼을 휘둘러도 천 번이 훌쩍 넘는다.
그리고 평범한 사람으로 변해버린 헌터들이 그 창칼을 막아낼 방법은 없었다.
진정한 학살의 시작이었다.
***
“허...”
아비규환의 참상에 제갈민이 탄식을 쏟아냈다.
고작 삼백.
삼백의 기사단에게 삼만의 헌터들이 무너지고 있었다.
처음 아난 기사단원들이 튀어나왔을 때는 무슨 수작인지 알지 못했다.
뒤늦게 헌터들의 외침을 통해, 그들의 희생이 내공을 흩어놓은 산공독과 비슷한 효과를 발휘했음을 알았다.
빛에 휩싸였던 아군은 일만 가량.
방어선을 뚫어내면서 아군이 막 적들을 파고들던 시점이었기에 빛의 영역에 닿은 수가 적지 않았다.
사실,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일만이 무력화됐다고 해도, 아직 이만이나 남았다.
기사단을 제외한 타이탄의 헌터들도 당황을 숨기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혼란을 잘 수습하기만 한다면, 오히려 기회가 될 수 도 있다 여겼다.
그러나 드러난 결과는 참혹했다.
중국 헌터들을 늑대에게 쫓기는 양떼마냥 우왕좌왕하고 흩어져 도망치다 쓰러져가고 있었다.
“제대로 당했군.”
손쓸 방법이 없었다.
선두에 서있던 일만은 이미 제 정신이 아닌 탓에 지휘가 먹히지도 않았다.
후방의 헌터들이 급히 움직이고 있긴 했지만 그 잠깐사이에 입은 피해가 상당했다.
대충 눈으로 헤아려 봐도 삼천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아직 교대가 완전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늘어날 피해를 더하면, 그 규모는 오천, 아니 육천 가까이 늘어날 것으로 보였다.
“뭐,.. 여러 번 쓸 수 있는 수는 아니니.”
아난 기사단 오십이 희생한 방법이다.
순식간에 늙어버린 기사단원들의 모습이 선명했다.
고작 오십으로 육천을 죽일 기회를 만들어냈고, 남은 기사단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상당히 남는 장사였다.
그래도 이제 남은 아난 기사단은 오십뿐이니, 앞으로 많아야 한두 번 더 쓸 수 있을 거다.
남은 오십과 기사단장 한 명분 정도.
물론 최악의 경우, 다른 기사단도 가능할 수 있다.
그럴 경우에는 정말 패배를 걱정해야 할 수도 있지만 희생에 따라 기사단원의 수는 계속 줄어들 테니, 마냥 비관적인 것만도 아니다.
팔천을 잃게 되었지만 승리할 수만 있다면, 아직은 충분히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의 피해였다.
“이쪽도 슬슬 움직여줘야겠지.”
지금까지 타이탄 측의 피해는 방어선이 무너지기까지의 과정에서 입은 오백가량과 희생한 아난 기사단 오십.
고작 육백오십으로 중국 측의 십분의 일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기사단의 방어를 뚫어내고 좋아했는데, 되로 주고 말로 받은 격이다.
그래도 이제 타이탄의 수는 오천 밑으로 떨어졌고, 중국은 방어선을 뚫어내며 입은 피해까지 감한하더라도 아직 이만이 넘게 남았다.
여전히 다섯 배에 달하는 차이.
그 차이는 쉽게 뒤집을 수 없을 정도로 컸다.
***
혼란에 빠진 중국의 전열이 간신히 뒤로 물러나고 후열이 앞으로 나섰다.
선두에 섰던 이들에 비해 수준이 떨어지는 후열만으로는 불이 붙은 기사단의 기세를 막기 어려웠지만 당장은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인해전술은 굳이 다른 방법을 찾지 않아도 될 만큼, 그 자체로도 상당히 효과적인 전술이었다.
챙!
거침없이 중국 헌터들을 베어 넘기던 삼백의 기사단은 어느새 인의 장벽에 막혔다.
중국의 인의 장벽은 타이탄의 프긴 기사단이 만들어냈던 방어처럼 굳건한 성벽은 아니었다.
비유하자면, 도저히 길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울창한 숲.
앞을 가로막고 있는 나무와 수풀을 베어내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무턱대고 계속 나아가다보면, 그 울창함에 길을 잃고 잡아먹힐 수 있었다.
“정지.”
요한의 말에 기사단이 전진을 멈췄다.
기사단의 앞을 막아선 것도 모자라 서서히 주변을 포위해 오기까지 하는 중국 헌터들이다.
뒤따르던 헌터 일부가 그들의 공격에 쓰러지기까지 했다.
빛이 대부분 중국 헌터들을 향했다 하지만 타이탄 측에도 아직 회복되지 않은 헌터들이 상당했다.
더 이상의 전진은 무리였다.
“릭.”
단시간에 오천이상의 적을 죽이는 성과를 이뤘지만 요한의 표정은 어두웠다.
일방적인 학살의 현장 속에서 아군의 피해 또한 발생했기 때문이다.
“크...예.”
아난 기사단장. 릭의 대답은 신음과 함께 흘러 나왔다.
“설명해라.”
헌터라면, 도주하는 적들 속에 섞여 있는 눈먼 공격에 맞을 수도 있다.
그들도 마나를 잃은 상태였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다.
실제로, 기사단이 오천을 참살하는 동안, 타이탄 측도 수십 가량의 피해를 입었다.
살기 위해 검을 집어 던지고, 활을 쏘아대는 등의 저항에 입은 피해였다.
그러나 신성력으로 보호받고 있는 기사단에 피해가 있어서는 안 됐다.
마나도 실리지 않은 공격에 부상을 입고, 목숨을 잃는 다는 것은 기사단이란 이름에 있어서는 안 될 수치였다.
일개 기사단원마저 그런데, 기사단장인 아난이 부상을 입었으니, 요한의 얼굴이 굳어질 수밖에없었다.
“마나가 실린 공격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막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릭이 대답은 간결했지만 그의 왼쪽 어깨 밑이 휑하게 비어있는 이유를 설명하기에는 충분했다.
고통을 참아내며 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릭은 자신을 향한 암습을 보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릭이 살아있을 수 있던 건, 운이 좋았기 때문이다.
암습이 멀리서 이뤄지기도 했고, 자신에게 닿기 전, 운 좋게도 기사단원 둘이 방패 역할을 해준 덕분에 왼팔을 잃긴 했지만 간신히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만약 앞서 기사단원 둘이 죽어나가지 않았다면, 릭 또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또...”
으드득.
요한이 심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이를 갈았다.
아델의 죽음에 이어 릭까지.
누군가 이 전장 속에 숨어 자신들을 노리고 있었다.
자신의 감각조차 잡아내지 못한 누군가가.
그 사실이 오천의 적을 죽이고도 요한이 승리를 만끽할 수 없는 이유였다.
승리를 만끽하기는커녕,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두려움이 등골을 타고 스멀스멀 기어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