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4
134화. 요한(4).
전투가 시작되고 나는 단 한 번도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한국의 일천 헌터들은 후방에서 지원의 형식으로 전투에 가담하고 있었지만 나만은 아니었다.
전장에 스며든 상태로 기회를 기다렸다.
이번 전투에서 내 목표는 오로지 다섯뿐이다.
요한과 네 명의 기사단장들.
그 다섯이 전부 내손에 죽게 될지, 아니면, 일부만 그렇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외에는 관심이 두지 않았다.
아군이 얼마가 죽어나가던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미혼산?’
그런 내가 전투가 시작되면서 가장 처음 느낀 것은 정신을 몽롱하게 하는 미혼산의 존재였다.
공기 중에 퍼져 있는 것은 아니었다.
미혼산은 적들, 타이탄의 헌터들의 숨결 속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다행히 그 양이 내가 아니면 느끼지 못할 정도로 희미해, 타인에게까지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미혼산의 영향으로 타이탄의 헌터들은 압도적인 수적 열세에도 두려움 없이 전투에 임할 수 있었다.
거기에,
‘광신의 정체가 미혼산이었군.’
미혼산은 타이탄이 신도들의 믿음을 얻어낸 방법이기도 했다.
처음부터 신도였던 이들을 제하고, 귀의한지 얼마 되지 않은 자들까지 어떻게 저토록 광신에 빠져들 수 있었는지 의문이 있었는데, 미혼산이라면 설명이 되었다.
‘결국, 그저 사이비집단이었을 뿐인가.’
신의 창과 방패 등의 가호까지 받는다는 얘기에 진정 신의 힘을 빌린 종교인 줄 알았다.
그러나 드러난 실체는 미혼산으로 사람을 홀리는 사이비에 불과했다.
화경을 넘어 그 이상의 경지에 닿아 있을지도 모르는 자가 행하기에는 치졸하고, 조잡한 수였다.
‘별동대가 움직였다.’
그 때, 별동대가 움직였다.
나는 생각은 잠시 미러두고 그들의 뒤를 따랐다.
별동대의 목표는 방어선을 깨트리는 것.
그들이 목표한대로 방어선을 깨트리면, 무너진 방어선을 지키기 위해 내 목표인 기사단장이 움직일 확률이 높았다.
‘역시.’
예상대로 타이탄 측에서는 기사단장 하나를 움직였다.
별동대의 움직임을 미리 알고 있다는 듯, 그들이 방어선을 깨트리기 전부터 요한의 곁을 떠나 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를 통해 요한이 현경의 경지에 올라있다는 의심이 한층 더 확신에 가까워졌다.
현경의 경지는 되어야, 혼잡한 전장 속에서 별동대의 움직임을 읽어낼 수 있을 테니.
어쨌든,
‘일단 하나.’
별동대가 시선을 끌어준 덕분에 일이 수월해졌다.
헌터들이 아니었다 해도, 초절정의 극에 달한 기사단장 정도를 내가 죽이지 못할 것은 없다.
하지만 중국 헌터들을 휩쓸면서도 항상 요한의 지근거리에 붙어 있는 탓에 지금까지는 손쓰기가 어려웠다.
요한은 아직 내가 경지를 확신할 수 없는 고수.
굳이 내가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나설 이유가 없는 전투다.
당장 보여주는 무위만 해도 화경을 가뿐히 넘어서고 있으니, 정보가 없는 당장은 쉽게 나설 수 없었다.
그 와중에 때마침 헌터들이 방어선 외곽을 들쑤셔 줬고, 이를 눈치 챈 한 명이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덕에 나는 정체도 드러내지 않은 채, 숨통을 끊어 놓을 수 있었다.
서걱.
‘이제 넷.’
이제 넷이 남았다.
요한은 가장 마지막이니, 남은 기사단장 셋을 먼저 끌어내야 했다.
아델의 목을 베어낸 나는 다시 기척을 숨기고 헌터들 사이로 스며들었다.
그 순간까지 누구도 나를 보지 못했고, 내 존재를 알지 못했다.
***
타이탄의 수장, 요한은 이 전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느끼고 있었다.
앞을 가득 메운 적들로 인해 시선은 닿지 않지만 그의 감각은 전장 안에 모든 것을 바로 앞에서 보는 듯 알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자신의 힘이자, 신이 내려주신 힘이다.
이 힘이 있기에 자신이 패하지 않을 거라 굳건히 믿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힘 덕분에 중국의 헌터 몇이 같잖은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델을 보냈다.
타이탄의 강력한 창인 종, 마흘.
마흘 기사단장 아델이라면, 순식간에 적들을 꿰뚫어 버릴 테니까.
요한은 아델의 승리를 추호도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아델?”
막 앞에 있는 헌터의 목을 베어낸 요한의 검미가 꿈틀댔다.
있을 수 없는, 있어서도 안 될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바로 마흘 기사단장 아델의 죽음이었다.
아델과 열 명의 헌터들이 부딪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델의 기운이 전장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기운의 소멸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대체 누가?”
수작을 부리며 모여 있던 헌터들은 S급들.
S급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델의 상대는 아니다.
사나운 개가 열 마리가 모였다 해서 범을 이길 수는 없다.
실제로, 한 차례 격돌만으로 셋을 죽인 아델의 포효가 요한의 귓가에 들려오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 포효가 아델의 마지막이었다.
요한은 감각이 전해오는 그 신호를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요한님.”
옆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해 전선을 이탈해버렸을지도 몰랐다.
깊게 내려앉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세 명의 기사단장들.
자신처럼 전장 전체를 느낄 수 있는 감각은 없지만 모두가 타이탄의 종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기에 그들도 분명 아델의 죽음을 느꼈을 것이다.
“아이언. 루텔. 릭. 오늘, 귀의는 없다.”
요한이 말했다.
지금까지 타이탄은 티탄 교에 귀의해오는 이들을 막지 않았다.
바로 직전까지 창칼을 휘둘렀다 해도, 무릎 꿇고 귀의의 뜻을 밝힌다면, 무조건적으로 받아주었다.
교화의 과정을 거쳐 티탄교의 새로운 신도로 거듭날 테니,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아니다.
더러운 이단자들이 타이탄님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분의 뜻을 행하는 형제를 영원한 안식의 세계로 돌려보냈다.
자신들도 언제고 함께 할 거라는 것은 알지만 더러운 이단들의 손에 동료가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이 요한을 분노케 했다.
타이탄님의 곁으로 가기엔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은 아델이다.
아델 한 명의 목숨은 눈앞에 있는 삼만의 목숨보다 값지다.
삼만이 전부 티탄교로 귀의해 온다 해도 용서할 수 없었다.
피는 피로 돌려줄 뿐이다.
“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세 명의 기사단장들.
그들 역시 요한과 마찬가지로, 함께 하던 동료가 죽었지만 눈에 슬픔은 없었다.
타이탄님의 곁에 한 발 먼저 갔을 뿐이다.
죽음은 새로운 시작.
슬퍼할 이유는 없었다.
대신 그 슬픔까지 대신하는 지독한 복수심이 흘러내렸다.
***
‘무영살. 과연 무림 최고의 살수.’
멀찍이서 전투를 지켜보고 있는 제갈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민은 삼만의 병사들을 장기 말 삼아 철저하게 계획을 세웠지만 태빈 한 명만은 예외로 두었다.
무영살, 태빈에게만은 아무런 역할도 부여하지 않았다.
자신이 시킨다고 할 리도 없거니와, 굳이 역할을 부여할 필요가 없었다.
그가 무엇을 행하든, 검 끝을 거꾸로 향하지 않은 한 아군에게 득으로 돌아올 테니까.
‘그가 있음으로 이 전투는 무조건 승리한다.’
제갈민의 예상은 어김없이 들어맞았다.
지금만 해도 일검에 기사단장 하나의 목을 베어버리지 않았던가.
물론, 제갈민은 태빈이 기사단장의 목을 베어버리는 모습을 직접 보진 못했다.
기사단장의 목이 떨어지고 나서야 태빈이 나섰음을 알아차렸을 뿐이다.
직접 보지 못했기에 다른 누군가 죽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의심할 가치도 없다.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이는 이 전장에서 오로지 한 명뿐이었다.
‘내가 할 일은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뿐.’
방어선에 진격이 막히고, 별동대가 아델에게 막힌 순간, 어둡게 구겨졌던 얼굴이 지금은 환하게 펴져있었다.
단 한 명의 죽음으로 전세가 역전됐다.
아직 요한을 비롯한 세 명의 기사단장이 더 남았고, 완벽하게 우위를 점한 것은 아니었지만 방금 전까지만 해도 벽에 가로막혀 수백이 죽어나간 걸 생각해면, 유의미한 변화였다.
***
“기사단장이 죽었다!”
별동대의 리더가 아델의 잘린 머리를 높이 치켜들며 소리쳤다.
자신이 베어낸 것은 아니었지만 중요한 건 아니었다.
“와아아!!!”
이미 전투에서 승리한 듯, 중국 헌터들의 환호성이 하늘을 찔렀다.
지금까지 수백이 죽어나갔지만 그들의 죽음은 기사단장의 죽음에 잊혔다.
기사단장의 죽음은 적들의 방어선이 뚫렸음을 의미했다.
그 벽을 뚫지 못했다면, 더 많은 아군이 죽어나갔을 테니, 슬픔보다는 기쁨이 더 큰 게 당연했다.
“방어선을 지켜라!”
“진형을 유지해!”
남은 세 명의 기사단장들이 병사들을 독려하며 방어선을 지키고자 했다.
그러나 독려뿐, 아델이 죽은 왼편을 막기 위해 움직이지는 않았다.
이미 같은 기사단장인 아델이 죽었다.
둘 이상의 기사단장이 움직이지 않는 한, 또 다시 기사단장을 잃을 가능성이 높았다.
결국 타이탄 측은 뚫린 왼쪽부터 파고드는 중국 헌터들의 공세를 막아내지 못했고,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타이탄의 성벽이 빠르게 붕괴되기 시작했다.
“적들의 방어선이 무너졌다!”
중국 헌터들은 무너진 벽을 통해 타이탄의 진형으로 파고 들었다.
왼쪽부터 시작해 점차 전선 전체의 경계가 희미해졌고, 곳곳에서 피아가 뒤섞였다.
“크윽.”
“컥!”
타이탄의 헌터들이 내뱉는 비명이 빠르게 늘어갔다.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앞에만 있던 중국 헌터들이 좌우에서 창칼을 들이밀었고, 어느새 등 뒤를 찔러왔다.
개인적인 실력은 정예만이 모인 타이탄 측이 몇 번의 전투로 중요 전력을 잃어버린 중국보다 우위에 있었다.
하지만 압도적인 수로 밀어붙이는데, 장사 없었다.
난전으로 변한 전쟁에서 여섯 배에 가까운 수적우위가 그 힘을 발휘했다.
“신이 내 곁에 함께...큭!”
“타이탄이시여...”
여전히 다섯 개의 기사단이 선두에서 고군분투했지만 죽여도, 죽여도 끊임없이 밀려드는 중국 헌터들의 손에 하나둘 바닥에 몸을 뉘였다.
“고작 오천이다! 물러서지 마!”
“큭!”
방어선은 뚫어냈지만 여전히 피해의 규모는 중국 측이 더 컸다.
두셋이 죽고 하나를 죽인다.
개인 기량의 차이도 있고, 무엇보다 요한과 세 명의 기사단장이 건재했다.
그러나 양측의 수차이는 무려 여섯 배.
중국 헌터들 두셋을 죽여도, 여전히 두셋이 남았다.
전투의 승패는 중국 쪽으로 천천히 기울어 가고 있었다.
그 때.
“아난의 희생은 앞을 가로막는 어둠을 물리치고 세상을 밝히리라.”
다른 기사단과 달리, 지금껏 후방에서 지원해오던 백 명의 아난 기사단 중, 절반이 앞으로 나섰다.
아난 기사단원의 몸이 순백색 빛으로 물들었고, 그 빛은 점차 덩치를 키워나가 선두에서 치열하게 싸우던 타이탄과 중국 헌터들을 감쌌다.
퍼엉.
이내 아무런 소리도 없이 빛이 폭발했다.
폭발한 빛은 주변 모든 것을 집어 삼켰다.
...
순간 정적이 찾아왔다.
빛이 시야까지 가려버린 탓에 전투를 속행할 수 없었다.
몇몇은 그 빛을 꿰뚫어볼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모두가 멈춰버린 세상 속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빛이 사라졌을 때, 드러난 광경은 모두를 경악케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