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
131화. 요한.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하루, 이틀...열흘, 한 달...
“하압!”
수련장에는 무심심법에 이어 본격적으로 무공을 익히기 시작한 화우의 우렁찬 기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직 진검이 아닌, 목검을 들고 휘두르고 있지만 그 기세는 제법 호기로웠다.
내공도 조금씩 쌓이기 시작해, 며칠 전 좁쌀만 한 크기의 단전이 생겨났다.
지구의 보잘 것 없는 기운은 감안하면, 꽤나 빠른 속도다.
뛰어난 근골 이상으로 화우의 무재는 비범했다.
기운이 풍부한 던전에 들어가 수련했다면, 기한을 더 단축시킬 수 있었을 테지만 화우는 이제 막 무공을 익히기 시작한 평범한 아이에 불과하다.
급할 건 없었다.
“빈틈!”
그런 화우의 옆에는 팀원들이 여느 때와 다름없이 수련을 반복하고 있었다.
지금은 세 명이 난전을 벌이는 단체 수련 시간이다.
적도 아군도 없는,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고, 때론 힘을 합쳐 한 명을 공격하기도 하는 난전이다.
“시연아. 나 먼저 가볼게. 여자 친구 화났다.”
그러나 그 반복되는 수련 속에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김영기가 헌터가 아닌, 평범한 여성과 연애를 시작했고,
“그래요. 오늘 단체 수련은 여기까지 해요.”
“시연아. 너도 좀 쉬엄쉬엄해. 끝나고 같이 저녁 먹을까?”
“저녁이요? 뭐 드시게요?”
“파스타?”
“흠... 생각해 볼게요.”
김시연과 형 사이에도 이전보다는 조금 발전한 기류가 흘렀다.
김시연이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도 아직은 형의 노력이 더 필요해 보였다.
“먼저 들어가. 난 좀 더 하다 갈게.”
그 사이에서 장만식만이 묵묵히 도끼를 휘두르며 외로움을 견뎌내고 있었다.
그 덕분인지, 조만간 벽을 넘어설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연애와 무공.
둘 중에 장만식이 진정 원하는 게 무언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주군. 권왕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아길라도 얼마 전, 성공적으로 복수를 끝마치고 돌아왔다.
스물한 명이 떠났던 원정길에서 열세 명만 살아남았지만 분위기가 어둡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마음 한 편을 짓누르고 있던 복수를 끝마친 덕에 후련해했다.
복수와 동료들에 대한 추모가 함께였다.
잡념을 완전히 털어냈고, 나와의 약조를 지키기 위해 호위를 자처하고 있었다.
러시아에서 돌아온 순간부터 뜬금없이 주군이라고 부르는 탓에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지만 계속 듣다보니, 그러려니 하게 됐다.
문제는 아길라와 함께 그의 팀원들까지 모조리 딸려 온 탓에 수련장이 복잡해졌다는 점이다.
네다섯이 수련을 할 때는 비좁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는데, 인원이 스무 명 가까이 되다 보니, 조금은 혼잡스러웠다.
때문에 주변 부지를 사들여 수련장을 넓힐 계획 중이었다.
적지 않은 돈이었지만 걱정할 건 없다.
“권왕께서?”
권왕은 종종 나를 찾아왔다.
산책 삼아 혼자 올 때도 있고, 딸인 수아를 데리고 오기도 했다.
권왕이 혼자 올 때면, 보통 무리에 대해 토론을 나누거나, 직접 몸을 부딪치며 대련을 벌였다.
대련 전적은 7전 1무 6패.
최근 한 번 간신히 동수를 이루긴 했지만 나머지는 전부 내가 패했다.
동수를 이룬 것도 운이 따랐다.
갑자기 뭣도 모르는 몬스터가 끼어드는 바람에 권왕의 신경이 분산됐기 때문이다.
아니, 봐준 거일 수도 있다.
아직 권왕과 나 사이에는 반수 이상의 격차가 존재했다.
“예. 오늘은 수아양도 함께 오신듯합니다.”
이제는 협회 소속으로, 어엿한 헌터가 되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수아다,
A급 이상의 실력에 외모까지 더해져 헌터들 사이에서는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끌고 있기도 했다.
오늘과 같이 권왕과 함께 찾아오기도 했고, 유인원을 대신해 협회의 소식을 전해오기도 했다.
오늘은 둘 다였다.
“협회장님께서 길드 연합 창단식에 와주실 수 있는지 여쭤보라고 하셨습니다.”
유인원과 김원철은 나를 중심으로 묶인 길드들을 한데 모아 길드 연합을 준비 중이었다.
지금까지는 각 지역별로 나뉘어 반복하던 길드들이 연합이라는 이름으로 협력을 도모하고 있는 것이다.
원 길드를 시작으로, 주작, 청룡 길드, 그리고 해산한 신의 길드의 세력까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길드와 헌터들은 모두 모였다 할 수 있었다.
그 연합의 창단식이 모레 있었다.
“참석한다고 전해주십시오.”
특별한 일이 없으면, 갈 생각이었다.
유인원과 김원철이 전면에 나서서 움직이긴 했지만 연합의 중심이 되는 것은 나다.
앞으로도 그들을 이끌어가야 하는 만큼, 참석은 당연했다.
***
이틀 뒤,
수아에게 들었던 대로 길드 연합의 창단식이 열렸다.
협회장 유인원과 김원철, 차주한 등 각 길드의 장들은 물론이고, 한국 대통령부터 초청을 받은 중견 길드장들, 그리고 이름 높은 헌터들까지.
연합에 함께 하게 될 길드 하나하나가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곳들인 만큼, 많은 이들이 자리를 빛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람들을 맞이하며 분주하게 움직이던 김원철이 나를 발견하고는 환한 얼굴로 다가왔다.
동시에 주변의 시선이 나를 향해 집중됐다.
세간에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알 만한 사람들은 내 존재를 다 안다.
특히,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하나같이 한국 헌터 계에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이들이기에 나에 대한 얘기를 한 번쯤은 들어본 사람들이었다.
이상 현상 문제를 해결한 헌터.
SS급 이상의 헌터.
살막을 단신으로 무너트린 헌터.
등등의 수식어가 붙은 내 등장에 시선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했다.
이번 기회에 나와 친분을 쌓으려는 이들로 인해 나는 순식간에 인파에 휩싸였다.
“창단을 축하드립니다.”
나는 그 시선을 담담히 받아 넘기며 김원철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게 익숙하지는 않았지만 굳이 피할 것도 없었다.
다들 내 눈치를 보고 있기도 했고.
“감사합니다. 그럼, 나중에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김원철과는 오래 얘기를 나눌 수 없었다.
연합을 계획하고, 초대 연합장의 자리에까지 오른 김원철이다.
나 이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중심으로 몰려들었다.
김원철이 오늘의 주인공이나 마찬가지기에, 나에게만 집중하기는 여려웠다.
“김태빈 헌터님. 그 때 이후로 처음 뵙는 군요.”
“오셨습니까? 오랜 만입니다.”
김원철 외에 신의 길드장 차주한, 주작 길드의 백현민 등과도 가볍게 인사를 나눴다.
신유연도 있었는데, 아직은 내 눈치를 보는 듯했다.
여하튼, 그들도 김원철 만큼은 아니지만 인사를 하느라 바빴기에 적당히 자리를 비켜주었다.
“지금부터 한국 길드 연합의 창단식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대충 아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나는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사회자의 말과 함께 시작된 창단식을 지켜봤다.
창단식은 협회의 대회의장을 빌려 김원철의 창단사를 시작으로, 각계 인사들의 격려사까지 모인 면면만큼 성대했다.
“그럼, 대통령님의...”
성대함과는 별개로 길고 지루했다.
협회장과 연합장, 그리고 대통령... 등등 저마다 연설을 준비해 온 탓이다.
나는 적당히 자리를 떴다.
다행히 내게 관심을 가지는 이들은 많지 않았고, 붙잡는 사람은 아예 없었다.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이 신경 써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창단식이 끝나고 나중에 연락을 보내왔을 뿐이다.
저마다 사과를 해왔지만 그들도 각자의 위치가 있기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 연락도 한둘이 아닌 탓에 조금 귀찮긴 했다.
***
유인원, 김원철과는 창단식 다음 날 따로 만남을 가졌다.
뒤풀이를 거하게 했는지, 숙취가 풀리지 않은 둘이었지만 창단식 때문에 못한 할 말이 있다며 직접 찾아왔다.
살막과 타이탄에 대한 이야기였다.
“살막은 약속대로 한국에서 완전히 철수했습니다.”
제갈민은 나와 약속한 대로 한국에 대한 관심을 끊었다.
거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살막은 협회가 파악하고 있던 것 이상으로 한국 사회에 뿌리 깊게 파고들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살막과의 모든 연결고리가 끊어지면서 살막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던 자들이 혼란에 빠진 것이다.
“사실, 큰 문제가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알아두시는 편이 나을 거라 생각해 말씀드리는 겁니다.”
김원철은 협회와 협력해 꾸준히 살막에 포섭된 이들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이번에 지금까지 파악된 것보다 많은 이들이 살막에 가담했음이 드러나긴 했지만 앞서의 노력이 무의미하지는 않았다.
그간의 노력을 기반삼아 혼란으로 인해 발생한 공백을 그보다 빠르게 수습해 나가는 중이었다.
“다행입니다.”
“그보다는 타이탄이 아시아를 노릴 거라는 정황이 포착됐습니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닙니다만...”
살막보다는 잠시간 조용하던 타이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게 유인원과 김원철이 나를 찾아온 실직적 이유였다.
살막은 나로 인해 막주인 여문휘가 죽고, 혈검과 독괴를 비롯한 상당수의 전력을 잃었다.
그로 인해 타이탄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재차 아시아를 도모하기 시작한 것이다.
***
정황이 포착한 대로, 타이탄이 병력을 움직였다.
목표는 살막의 세력권이 된 아시아였다.
제갈민이 헌터들을 규합해 맞섰지만 연전연패의 소식이 전해졌다.
주요 전력을 잃은 살막은 타이탄의 기사단장조차 막아내지 못했다.
중국의 인해전술로 막아내고 있긴 했지만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 시린 법입니다.”
제갈민의 연락이었다.
직접적으로 얘기하진 않았지만 도움을 갈구하는 것이다.
나는 참전을 결심했다.
제갈민의 말이 틀린 게 없었다.
중국이 무너지면, 한국의 힘만으로는 타이탄의 공세를 막아낼 수 없다.
“이번에는 저희도 함께 하겠습니다.”
“연합도 힘을 보태겠습니다.”
“알겠다.”
이번에는 팀원들과 길드 연합도 함께였다.
나를 주군으로 모시는 아길라와 팀원들은 당연했고.
나를 포함해 천여 명의 헌터들이 중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동원할 수 있는 전력은 수천에 달했지만 한국을 비워둘 수는 없었다.
유인원과 박동석 등이 남았다.
무공이 더해져 이제는 SS급에 근접해 있는 박동석이다.
그 한 명만으로 한국의 안전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중국에서는 제갈민이 직접 마중을 나왔다.
여문휘 이후의 새로운 국가주석이자, 군사로서 직접 전장에 참전하는 게 아니기에 지원군을 직접 맞이한 것이다.
“죄송하지만 바로 전장으로 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나와 헌터들은 곧장 전장으로 투입됐다.
파키스탄을 시작으로, 중국 헌터들이 시체를 쌓으며 계속해서 저지선을 뒤로 물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악!”
“밀리면 끝이다!”
내가 전장에 참여 했을 때는 그 저지선이 란저우까지 밀린 상태였다.
이번 저지선이 뚫리면 중국의 수도인 북경이 코앞일 때였다.
전투가 한 장인 전장에는 비명과 절규가 끊이지 않았다.
“타이탄님을 위해!”
그 선두에는 요한을 비롯한 다섯 개 기사단이 있었다.
내가 처음으로 타이탄의 교황인 요한을 마주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