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
130화. 신유연.
눈에 담겨있던 의지가 빛을 발했는지, 화우는 불과 육일 만에 구결을 전부 외워버렸다.
물론, 단순 암기일 뿐, 구결에 담긴 내용을 이해를 한 것은 아니다.
그저 내가 생각한 기한을 절반 가까이 단축한 것뿐이다.
100바퀴 달리기와 같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은 아니었지만 화우의 오성이 보통의 범주를 넘어선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하더라도 변할 건 없다.
“앞으로는 구결 전체를 외며 명상을 하도록 해라.”
화우가 예상보다 구결을 빨리 외우면서 달라진 거라고는 앞으로 삼백 자씩 끊어서 외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외며 명상을 하게 됐다는 것뿐이었다.
구결과 별개로, 화우의 육체가 아직 본격적으로 무공을 익힐 준비가 되질 않았기 때문이다.
매일 반복하는 달리기와 더불어 잘 먹이고 꾸준히 추궁과혈까지 해준 덕분에 일주일 동안 5cm도 넘게 자라긴 했다.
그러나 이제야 제 또래와 비슷해지고 있을 뿐이다.
남은 4일을 다 채우고 난 뒤에야 충분한 준비가 된 육체가 될 것이다.
***
그 때쯤, 던전 공략에 나섰던 팀원들이 돌아왔다.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던전이기에 아예 걱정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는데, 다행히 네 명 모두 무사했다.
나와 대련 직후, 공략에 나섰던 덕분에 약간의 성취도 있었는지, 다들 표정이 밝았다.
“다녀왔습니다.”
“화우야~. 누나왔다.”
“며칠 사이에 키가 좀 큰 거 같은데?”
팀원들은 나에게 짧게 인사와 보고를 마친 뒤, 곧바로 화우를 둘러쌌다.
그리고는 던전 안에서의 무용담을 시작으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기 시작했다.
어쩌면, 성취보다는 단순히 화우를 볼 수 있어 표정이 밝았던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다녀오셨어요.”
화우도 편한 얼굴로 팀원들을 맞이했다.
“죄송하지만 얘기는 나중에 하면 안 될까요? 지금은 수련시간이라...”
그러나 이전처럼 팀원들을 얘기에 이끌려 몇 시간을 허비하는 일은 없었다.
어색해하고 눈치를 보지도 않았다.
냉정하진 못하더라도, 제법 단호하게 팀원들을 쳐냈다.
팀원들과의 시간도 좋지만 강해지기 위해서는 내가 시키는 수련에 집중해야 한다는 사실을 몸소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불과 며칠 사이에 몸이 가벼워지고 키가 부쩍 자랐다.
구결을 외면 몸이 맑아지고, 달리기를 하면, 절로 신체가 건강해진다.
강해지겠다는 목표를 세워놓고, 수련을 게을리 할 수는 없었다.
“그래? 그러자.”
“열심히 해라.”
팀원들도 별 말 없이 곧장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앞서간 경험자로서 수련의 중요성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귀여운 마음에 예뻐할 뿐이지, 화우를 방해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
***
점심 무렵에는 팀원들에 이어 아길라도 돌아왔다.
벽을 넘어설 실마리를 얻고 던전으로 향했던 아길라는 큰 변화가 없었던 팀원들과 달리, 기도가 확연히 달라졌다.
눈동자에는 얼핏 현기마저 맴돌았다.
“감사합니다.”
수련장으로 돌아온 아길라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나를 향한 오체투지였다.
조금은 과해 보일 정도의 예.
아길라가 벽을 넘고, 깨달음을 얻었음을 증명해주는 행동이었다.
“아길라...”
“화우야. 나중에 또 얘기하자.”
아길라의 성장이 팀원들의 마음에 불을 지폈는지, 화우와 이야기꽃을 피우며 천천히 밥을 먹던 팀원들의 손놀림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라졌다.
양 볼이 터질 듯, 입안으로 음식물을 밀어 넣은 팀원들은 곧장 각자 무기를 들고 수련장으로 향했다.
아길라의 행동에 담긴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의 기도를 느끼지 못하는 화우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차치하고,
“그대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다.”
“김태빈 헌터님이 아니었다면, 노력만으로는 결코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길라는 자신의 노력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 했으리란 것도 알았다.
그렇기에 나에게 감사를 표하는데 아낌이 없었다.
“그래.”
나는 더 이상 아길라의 인사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가 실마리를 얻는데, 내 도움이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물론, 그의 말대로 결코 얻지 못했을 깨달음은 아니다.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정진했다면, 언제고 얻었을 수도 있다.
평생 얻지 못하고 정체되었을 수도 있지만.
“그럼, 이제 복수를 하러 갈 생각인가?”
“예. 그 뒤에 약속을 지키러 돌아오겠습니다.”
아길라가 복수하려는 대상은 마룡 체르노보그.
아길라의 가족과 친우, 그리고 고향.
러시아 사하 공화국 절반을 집어삼킨 몬스터다.
“자신은 있나?”
“모르겠습니다.”
그 몬스터를 상대로, 아길라는 화경에 준하는 깨달음을 얻었음에도 승리를 자신하지 못했다.
그 만큼 아길라의 마음속에는 그 때 느꼈던 공포와 두려움이 굳게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아길라는 도망치지도, 피하지도 않았다.
“허나, 팀원들과 함께라면, 할 수 있습니다.”
고개를 젓던 아길라가 다시 말했다.
아길라가 나에게 가르침을 받는 동안 그가 데려왔던 스무 명의 팀원들도 놀고만 있던 것은 아니다.
마나 제어법을 통해 스스로 가진 힘을 이끌어내고자 노력했다.
그 결과, 아길라와 같은 괄목상대할만한 성장은 아니지만 유의미한 성과를 얻었다.
아길라의 말대로 팀원들이 더해진 전력이라면, 확실히 승산이 있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아길라는 곧장 팀원들을 추슬러 러시아로 떠났다.
돌아오지 못할 지도 모르기에 다녀오겠다는 말이 아닌, 가보겠다는 말을 남겼다.
“무운을 빌지.”
나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
사실, 내가 조금만 도와주면 쉬운 일이다.
마룡이라 해봤자, 드래곤의 일종.
내 앞에서는 조금 커다란 도마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아길라는 단 한 번도 그러한 얘기를 한 적이 없었다.
이전에 팀원들과 협회까지 나서서 도와주겠다했지만 전부 단칼에 거절한 아길라였다.
자신의 일이기에 관계가 없는 이들의 도움은 받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내 도움이라 해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렇기에 내가 할 일은 그가 성공적으로 복수를 끝마칠 수 있도록 무운을 빌어주는 것뿐이었다.
나중에 김원철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안타깝게도 러시아 정부는 이미 사하 공화국을 포기했다.
마룡을 물리친다 해도 복구할 여력도 없기에 아길라의 행보를 그저 관망하는 입장이었다.
오직 아길라와 스무 명의 팀원들만이 나서는 조금은 쓸쓸한 원정길이었다.
***
아길라가 떠나고 며칠 뒤, 나는 유인원의 요청으로 협회로 향했다.
한국으로 귀국한 날, 얘기했던 신유연과의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함이다.
“김태빈 헌터! 오랜만입니다.”
유인원과 김원철에 이어 신유연이 나를 맞이했다.
나름 힘 있게 인사를 하려 한 모양인데, 생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재앙급 던전 이후로 오랜만에 마주한 신유연은 사람이라고 부르기 힘든 몰골을 하고 있었다.
“예...”
유인원과 김원철은 단순히 마음고생 때문이라고 했지만 나는 신유연의 상태를 한 눈에 알아봤다.
산혼독.
혼을 녹인다는 이름처럼, 사람을 천천히, 그러나 고통스럽게 죽게 만드는 독이었다.
깊이 생각해보지 않아 잊고 있었는데, 과거 살막은 충성을 강제하기 위해 독을 이용하고 있다 했었다.
신유연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길드를 해산하고 은퇴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예...”
“정말 은퇴하고 싶으신 겁니까?”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신유연의 처우를 놓고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다.
독성이 퍼져 죽어가면서도 다시 살막의 손을 잡지 않은 신유연이다.
물론, 살막에서 한국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신유연이 내민 손을 거절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과정이 어찌됐든, 한 번 버림받고 틀어진 살막과 신유연이 다시 손을 잡을 리는 없다.
또한 더 이상 한국 헌터 계는 신유연 정도의 변절자가 생긴다 해도 흔들릴 만큼, 약하지 않다.
그에 비해, 이용가치는 확실하니, 지금은 유인원이나, 김원철의 뜻을 따라주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아닙니다.”
신유연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예상대로 그는 진심으로 은퇴를 바라는 게 아니었다.
나를 만나기 전, 유인원이나 김원철이 설득 했을 수도 있지만 크게 중요하지는 않았다.
“그럼 계속해서 청룡 길드를 이끌어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신유연은 내 말에 난색을 표했다.
그의 몸을 좀 먹는 독 때문이다.
길드를 이끌어가기는커녕 이대로 며칠 더 시간이 흐른다면, 원하지 않더라도 강제로 은퇴를 해야 할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다.
“독은 제가 해독해드리겠습니다.”
“예?! 정말입니까?!”
신유연이 믿지 못하겠다는 듯, 되물었다.
쉽게 믿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제 딴에는 병원과 힐러 등에게 치료도 받고, 몸에 좋다는 영약도 먹으며 해결해 보려 했을 거다.
각고의 노력에도 치료하지 못했으니, 지금까지 온 것일 테고.
그렇게 쉽게 해독할 수 있는 독이라면, 살막이 충성의 도구로 쓸 리 없지 않겠는가.
“예.”
그러나 나는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산혼독은 지독하지만 해독이 어려운 독은 아니다.
오히려 어지간한 살수라면, 다 다룰 수 있는 독이었다.
“일단 맥을 좀 보겠습니다.”
신유연의 상세가 위중했기에 나는 미뤄두지 않고 바로 그의 맥을 확인했다.
직접 확인한 맥은 힘없이 흐르고 있긴 했지만 다행히 겉보기보다 심각하지 않았다.
신유연의 외향은 독에 심적 고생이 더해져 만들어진 듯했다.
“지금부터 진기를 불어넣어 독성을 태울 겁니다. 거부하지 마십시오.”
나는 곧바로 진기를 불어 넣었다.
진기가 신유연의 맥을 타고 그의 몸속으로 향했다.
중요 혈도 곳곳에 점액질처럼 늘러 붙어 흐름을 방해하는 독이 느껴졌다.
지금은 절반 정도 틀어막고 있지만 산혼독은 주변의 탁기를 계속해서 끌어들여 세를 불린다.
그렇게 점차 커져 혈도가 전부 막히면, 죽게 되는 것이다.
“큭!”
진기가 독에 닿으며 느껴지는 고통에 신유연이 신음을 흘렸다.
그래도 치유의 과정이라는 것을 아는지, 혈도가 타는 고통이 보통은 아닐 텐데도 잘 참아냈다.
하긴, 산혼독이 주는 죽음에 시시각각 가까워지는 고통에 비하면, 지금의 고통쯤은 별거 아니다.
치이익.
산혼독이 타들어가며 남긴 잔재가 신유연의 몸 곳곳에서 흘러내렸고, 지독한 악취가 함께 풍겨왔다.
독과 함께 주변의 탁기도 같이 타고, 빠져나왔다.
탁기를 전부 배출해낸 것은 아니지만 독이 머물던 주요 혈도는 제법 깨끗해졌다.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기연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신유연 스스로는 모르겠지만 연이 닿는 다면, 이번 일이 한 단계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될지도 몰랐다.
“오오.”
그렇게 독을 전부 제거하자, 한결 가벼워진 몸에 신유연이 탄성을 터트렸다.
“신 길드장. 우선 씻고 오시는 게 낫겠습니다.”
“옷도 좀 갈아입으시고요.”
그런 신유연에게 유인원과 김원철이 한 마디씩 했다.
체면을 생각하더라도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악취가 신유연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