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살수다-129화 (129/150)

# 129

129화. 화우(2).

“아직... 허억...절반밖에...하지 못했습니다...”

말 한 마디 하는 것도 힘들어 하면서 화우는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기어가는 것만큼 느릿느릿, 그러나 꾸준하게 발을 옮겼다.

그 모습이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위태로워보였다.

실제로 100바퀴 달리기가 가능하고, 불가능하고를 떠나 포기하지 않는 집념만은 칭찬할 만했다.

“이제 되었다.”

“... 허억... 허억... 우웨에엑!”

내가 양어깨를 붙잡아 멈춰 세우고 나서야 뛰는 것을 멈춘 화우는 곧장 호흡을 고르다 토악질을 해댔다.

내부의 장기가 다 쏟아져 나오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다.

신물이 나올 때까지 몇 번이고 안에 든 모든 것을 게워내는 화우였다.

나는 그런 화우를 가만히 기다렸다.

한계, 아니 그 이상의 체력을 소모했다.

그러니, 지금의 모습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과거의 나 또한 그랬다.

“후우...후...스승님.”

토악질 덕분인지, 호흡이 한결 안정된 화우는 내 눈치를 보며 혹시나 자신을 내칠까 걱정했다.

내가 제시한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고집을 부렸지만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100바퀴를 완주하지는 못했을 거라는 것을.

“고생했다. 애초에 꼭 100바퀴를 돌라고 한 말이 아니었으니, 이루지 못했다 하여 마음에 담아둘 것 없다.”

50바퀴에서 한계에 도달한 것은 발육이 부진해 그런 것일 뿐, 또래 아이들만큼만 성장했더라면 분명 해낼 수 있었다.

지금 화우의 몸으로는 남들이 한 발짝 뛸 것을 두 발짝 뛰어야 될 테니.

물론, 100바퀴를 채웠으면 더 할 나위 없었겠지만 지금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 정신력을 확인 한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발육부진에 의한 체력적인 문제는 충분한 시간만 주어진다면 언제든 해결해 줄 수 있는 부분이었다.

“예.”

내 말에 화우가 걱정으로 굳어져 있던 표정을 풀어보였다.

동시에 간신히 지탱하고 있던 몸이 철퍽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지듯 내려앉았다.

제 자리에 서있는 것도 벅차하며 부들부들 떨리던 다리가 긴장이 풀리면서 같이 풀려버린 것이다.

“죄...죄송합니다.”

풀려버린 다리에 화우는 당한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아무리 한계 이상으로 체력을 소모했다 해도 통제를 벗어난 몸은 익숙지 않은 경험이었다.

두 팔로 몸을 지탱하며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려했지만 다리가 말을 들어줄 리 없었다.

“긴장이 풀려서 그런 것이다. 일어나지 말고 그냥 그대로 쉬어라.”

“예. 감사합니다.”

내가 휴식을 부여하자, 화우는 일언반구도 없이 땅을 짚던 손을 털고 그대로 휴식을 취했다.

아직 사소한 것 하나에도 불안함을 느끼는 화우였지만 나에게만큼은 믿음만 가득했다.

처음 경험하는 일임에도 내 말 한 마디에 당황한 기색이 싹 사라졌다.

“이 쪽은 나와 함께하고 있는 팀원들이다. 앞으로 자주 함께 할 이들이니, 이참에 인사를 나누도록 해라.”

휴식을 취하는 사이, 곁에 있던 팀원들과 인사도 시켰다.

네 명의 팀원들 중, 형은 조금 알고 있지만 나머지는 잘 모른다.

어제 공항에서 얼굴을 보긴 했다.

그러나 어제는 아직 화우의 심신이 안정되지 않은 상태이기도 했고, 내가 중심이었기에 제대로 인사를 나누지 못했다.

오늘도 팀원들은 각자 수련에 열중이었고, 화우가 곧장 달리기를 했기 때문에 이제야 제대로 된 인사를 나누게 된 것이다.

“화우라고 했지. 난 김시연이라고 해. 그냥 시연이 누나라고 부르면 돼. 이 쪽 곰 같이 생긴 형은 장만식, 여기 아저씨는 김영기. 잘 부탁해.”

김시연이 먼저 자신과 팀원들을 소개했다.

“팀장님의 제자라... 열심히 해라.”

“너네는 누나고 형이면서 왜 나만 아저씨야. 화우야. 영기 형이다. 형.”

장만식은 조금 무뚝뚝하게, 김영기는 발끈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인사를 건넸다.

받아온 상처들로 인해 언뜻 소심해 보이는 화우였기에 팀원들은 한 마디씩 건네며 먼저 다가가 준 것이다.

“예. 잘 부탁드려요. 선배님들.”

이에 화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어설프게나마 포권을 취해 보였다.

아까 팀원들이 내게 인사하는 모습을 보고 따라하는 듯했다.

고작 여덟 살 자리 아이가 취해보이는 어설픈 포권에 팀원들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삶과 죽음이 오가는 거친 헌터 계에서 삭막한 헌터들과 부대껴온 팀원들에게 화우의 존재는 신선 그 자체였다.

다들 늦둥이 막냇동생을 보는 것 마냥, 보는 것만으로 입이 귀에 걸렸다.

“여덟 살이라고?”

“한국에서 계속 살 거야?”

“지금은 팀장님이랑 같이 살고?”

질문이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예. 여덟 살이고, 스승님 집에 신세지고 있어요. 그런데, 나중에는 중국으로 돌아갈 거예요. 거기 동생들이 있거든요.”

화우도 어색하긴 하지만 자신을 향한 다정함이 싫진 않은지 하나하나 대답해주고 있었다.

긴장감으로 굳어 있던 얼굴도 조금씩 편안해졌다.

생각해둔 휴식시간을 훌쩍 넘겼지만 나는 그들을 잠시 내버려두었다.

화우가 싫은 기색을 보였다면 모를까, 막 친해지는 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화우를 제자로 들이긴 했지만 나처럼 살수로 키우려는 것도 아니고, 천하제일인을 만들고 싶은 것도 아니다.

변덕으로 제자로 받아들였을 뿐, 성취를 위해 몰아붙이듯 가르칠 생각은 없었다.

***

“화우야, 공략 끝나고 보자. 맛있는 거 사줄게.”

“형도 같이 가자.”

팀원들과 화우의 시간은 점심때까지 이어졌고, 그대로 식사까지 함께한 뒤에야 끝이 났다.

마지막에 김시연이 화우에게 먹을 걸 사주겠다고 하자, 형도 끼는 게 보였다.

던전 공략 일정이 잡혀있지 않았다면, 분위기로 보아 지금 바로 가자고 했을지도 몰랐다.

팀원들이 공략에 나서는 던전은 A급 던전으로, 공략보다는 수련이 목적이다.

자연지기가 풍부한 던전 내부에서의 수련은 기가 혼탁한 지구에 비해 내공을 쌓는 속도가 열 배 이상의 효과가 있다.

때문에 적어도 열흘에 한 번씩 공략에 나서 사나흘을 던전 내에서 보내는 팀원들이었다.

“네. 누나. 형. 조심히 다녀오세요.”

잠깐 사이에 화우도 많이 편해졌는지, 팀원들을 대하는데 어려워하는 기색이 사라졌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화우는 훈련 열심히 하고.”

“이거 화우 보고 싶어서 일찍 나오고 싶으면 어떡하지?”

팀원들은 편한 얼굴로 인사에 농담을 곁들이며 던전으로 떠났다.

간혹, 재앙급 던전 문제로 길드들과 협력해 공략을 준비할 때는 긴장감이 흐르기도 하지만 지금은 고작 A급 던전이다.

전원 S급에 올라선 팀원들에게, 소풍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입장 전부터 긴장한 모습을 보여야 할 정도로 위험한 곳이 아니었다.

팀원들이 떠나고, 수련장에는 나와 화우만 남았다.

원래 얼마 전, 귀화 수속을 마친 아길라도 매일 같이 수련장 한 편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벽을 허물 실마리를 얻고 던전에 들어가 있었다.

벽을 넘어섰는지, 넘어서지 못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벌써 열흘 가까이 됐으니, 슬슬 나올 때가 되었다.

그 외에 권왕도 간간히 들르고, 김원철, 유인원도 자주 찾는 곳이 수련장이었다.

권왕은 산책 삼아, 김원철과 유인원은 국내외의 소식과 함께 내게 무언가 얻을 게 있을까, 직접 찾아오곤 했다.

차치하고,

“이리 오너라.”

나는 화우를 불렀다.

자신이 오래 쉬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다시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는 화우였다.

그러나 나는 오늘 화우에게 육체적으로는 무언가를 더 시킬 생각이 없었다.

육체를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것은 꾸준히 수련을 해온 무인들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다.

하물며 어린아이임에야,

당장은 무언가를 더 한다 해도 몸만 망가질 뿐, 도움 될 게 없었다.

“좀 아플 거다.”

내가 한 것은 추궁과혈이었다.

아까 했어야 할 일이었지만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해치고 싶지 않아 놔뒀다.

늦어진다고 해서 심각한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으...읍.”

혈도를 자극할 때마다 화우가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나 신음은 입 안에서만 맴돌다 막혔다.

어디서 들었는지, 내가 시킨 것도 아닌데 억지로 참고 있는 것이다.

화우에게는 안타깝지만 지금은 단순히 육체의 피로를 풀어주는 것이기에 굳이 신음을 참을 필요가 없었다.

뭐, 고통에 익숙해질 필요는 없지만 몰라서도 안 되니, 나는 굳이 말해주지 않고 내 일에만 집중했다.

“다 되었다.”

“...후아.”

추궁과혈이 끝나자, 화우가 억눌러놓았던 신음과 함께 숨을 토해냈다.

고통을 참은 보람이 있었는지, 밥을 먹은 후에도 풀어지지 않던 얼굴이 한결 개운해졌다.

“못다 한 50바퀴도 채우겠습니다.”

가벼워진 몸 상태에 제가 먼저 나서서 오전에 채우지 못한 절반을 달리겠다고 나서기까지 했다.

“아니다.”

나는 의욕 넘치는 화우를 만류했다.

육체를 쓰는 것은 오전의 달리기로 끝이다.

기껏 회복시켜놓은 몸을 다시 망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달리기가 아니더라도 할 일이 있었다.

심법.

나는 지금부터 화우에게 심법을 가르칠 생각이었다.

“앞으로 네가 배울 것은 무심심법이라 한다.”

아쉽지만 내가 익힌 살혼심법은 살기를 근간으로 삼는 심법이다.

살기란 남을 죽이려는 기운.

뿐만 아니라, 살혼심법을 익혀나가기 위해서는 살인이 필수다.

몬스터가 아닌, 인간을 죽여야 완성할 수 있는 심법인 것이다.

이 지구에서 살아갈, 고작 여덟 살짜리 아이에게 가르칠 만한 무공은 아니었다.

그러한 살혼심법을 대신에 화우가 익히게 될 무심심법은 내가 창안한 심법으로, 살혼심법을 바탕으로 현경의 경지에 오를 때의 깨달음을 정리해 만들어 가고 있는 심법이었다.

기존의 살혼심법에서 살기를 제하고, 자연지기를 담았다.

거기에 무에 대한 내 생각을 더했다.

살수인 내가 만들었다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정공 중에 정공이다.

또한 천하제일은 아니더라도, 명문, 아니 중견 문파의 비전심법과 비할 바는 되리라 자부할 수 있을 만큼 뛰어났다.

지구에서는 당연히 천하제일이고.

“무심(武心). 무를 생각하는 마음이다...”

첫 구절을 시작으로 나는 화우에게 삼천삼백 자를 천천히 읊어주었다.

“한 번에 다 외울 필요 없다. 여기 구결을 정리해 두었으니, 오늘은 삼백 자만 외워보도록 해라. 열하루 뒤에 확인해보도록 하겠다.”

아직 완성된 심법이 아니기에 깨달음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고, 구결이 길어졌다.

오성이 뛰어나다 해도 삼천삼백 자는 한 번에 외기에 길다.

하루에 삼백 자씩 왼다면, 열흘 하고도 하루.

오전에는 심법을 외고, 오후에는 달리기로 체력을 기른다.

열하루는 본격적으로 무공을 익힐 준비로 적당한 시간이었다.

물론, 그보다 늦어진다 해도 상관없다.

대단한 무인을 키워내고자 하는 것은 아니니, 제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알겠습니다.”

내 생각은 아는지, 모르는지 화우는 짧지만 힘있게 답했다.

무조건 해내겠다는 의지가 담긴 눈을 하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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