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
126화. 정리(2).
“나와라.”
“...”
내 말을 듣고 몸을 움직이는 아이는 없었다.
감정이 실린 내 말투가 차갑기도 했지만 그보다 아이들은 알고 있었다.
누군가 이곳에 와 자신들을 데려갔을 때, 단 한 번도 좋은 기억이 없었음을.
“집으로 보내주마.”
집으로 보내주겠다는 말에도 반응은 없었다.
오히려 더 오들오들 떨며 서로를 의지한 채, 구석으로 파고들 뿐이었다.
어느 누구도 내가 하는 말을 믿지 않았다.
“집에 가기 싫은 거냐?”
“거짓말이잖아요...”
한 아이가 용기를 냈다.
용기를 낸 아이는 화우.
고작 열 명 남짓한 아이들 속에서 우두머리 역할을 하고 있는 아이였다.
우두머리라고 해봐야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음식을 공평하게 배식하고, 최소한의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대소변을 치우는 등의 역할을 분담해주는 것뿐이었지만 이 지옥 같은 공간에서 아이들은 화우를 의지하고 있었다.
“거짓말?”
“...예...”
내가 되묻자, 화우는 벌벌 떨면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화우와 다른 아이들의 눈에는 두려움과 불신만이 가득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화우뿐만 아니라, 모든 아이들이 눈앞의 사내와 같은 말을 듣고 따라간 곳이 집이 아님을 알고 있었으니까.
처음에는 진짜 집에 갔다고 생각하고, 기대했던 때도 있지만 아이들 모두 자신의 차례가 온 순간 깨달았다.
앞서 간 아이들이 간 곳은 집이 아닌 지옥이었음을.
심지어 모두가 다시 돌아온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돌아온 아이보다는 영영 돌아오지 못한 아이가 더 많았다.
살아 돌아왔다고 해도 나갈 때의 모습 그대로 돌아온 아이는 손에 꼽았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돌아와 시름시름 앓다 죽은 아이가 부지기수였고, 몇몇은 고통 속에서 정신을 놓아버렸다.
지금도 열 중, 두셋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말을 하고 있는 화우도 마찬가지.
원래의 색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더러운 하의를 자세히 살펴보면 단순히 때로 검게 얼룩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피가 말라붙어 검게 물든 것이다.
그렇기에 생전 처음 보는 사내의 말을 믿지 못하고 두려움과 불신 섞인 시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사실, 눈앞의 사내가 지금까지의 사내들과는 다를 수도 있음을 느꼈다.
고저 없는 말투가 시릴 정도로 차갑지만 강압적이지 않았고, 대충 둘러보다 우악스러운 손길로 한 아이를 끌어내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간 쌓인 어른에 대한 불신은 말 몇 마디로 녹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럼 이대로 죽을 테냐?”
“...”
이번에는 용기를 냈던 화우도 대답하지 못했다.
당연히 죽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이렇게 고통을 참으며 억지로 생을 부여잡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곧 불길이 덮쳐올 거다.”
누군가 밖에 불이 났다고 소리치던 것도 들었다.
이전과 달리, 소란스러움도 느꼈다.
그러나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불길보다는 몸이 기억하고, 두 눈으로 보아왔던 사내들의 시선과 손길이 더욱 두려웠다.
화우가 낼 수 있는 용기는 내 말에 한 대답, 딱 거기까지였다.
“후...”
다시 한숨이 흘러나왔다.
나는 아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잘 알지 못했다.
살행을 위해 무림을 오가며 눈앞의 아이들 같은 경우는 보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지금과 같이 시선을 주지 않았다.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왔기에 주변에 쏟을 신경은 없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내가 왜 이러는지는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할 일이다.
나는 내 할 일을 마쳤고,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면 그만인 것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죽음 따위에 왜 이리 신경을 쓰고 있는지.
“제가...제가 갈게요.”
내 한숨에 말없이 고개 숙이고 있던 화우가 무언가 결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까지의 어른들과는 차이를 느꼈지만 다르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스스로 나선 것은 다른 아이들을 위한 희생이었다.
누군가 겪어야할 고통이라면, 자신이 겪는 게 나았다.
몸은 괴로울지언정, 마음은 편할 테니까.
덥석.
시시각각 화마가 덮쳐오고 있는데, 고민할 시간도, 망설일 시간도 없었다.
당장 움직여도 아이들의 걸음걸이로는 쫓아오는 불길을 벗어나기에 촉박했다.
나는 덜덜 떨리는 다리로 내 앞에 간신히 서있는 화우를 집어 들고 밖으로 옮겼다.
화우는 지금까지보다 몇 배로 몸을 떨면서도 내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불...?”
밖으로 끄집어내져 모든 걸 집어삼키며 다가오는 불길을 확인한 화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미 죽음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자의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그 얼굴에 걱정이 더해졌다.
“애들...”
안에 남아있는 아이들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화우가 뒤를 돌아봤지만 부탁 할 어른은 존재하지 않았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다섯 아이들만 보일뿐이었다.
“아저씨...”
양 어깨에 아이들을 둘씩 둘러멘 내 모습에 화우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화우조차 다시는 웃을 일이 없어 잊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미소였다.
내 어깨에 아이들은 하나 같이 거동이 불편한 아이들이었다.
“가자.”
내 말투는 여전히 차가웠다.
그러나 아이들은 지금 이 순간 따스함을 느꼈다.
다가오는 불길 때문에 든 착각이 아닐까 싶은, 가슴 깊은 곳까지 데워주는 따스함이었다.
나는 아이들의 얼굴에 피어오른 온기를 무시한 채, 발길을 옮겼다.
***
살막의 근거지를 벗어나, 불길의 영향을 벗어나는 즉시 이동을 멈췄다.
거동이 불편한 아이들은 내가 챙기고 있지만 그렇지 않은 아이들이라고 해서 상태가 멀쩡한 것은 결코 아니다.
몸을 제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수준일 뿐, 산행까지는 무리였다.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고작 수십 미터를 걸었다고 바닥에 쓰러져 버린 아이들이다.
여기까지 빠져나온 것만 해도 다행으로 여겨야할 정도였다.
두두두두.
다행히 화재를 발견하고 출동한 소방 헬기 소리가 들려왔다.
불길로 인해 살막의 근거지를 가리고 있던 진법이 무너진 덕분이다.
“여기 사람이 있다! 성인 한 명에 아이 열.”
“괜찮습니까?
이어 화재 진압을 위해 투입된 소방 인력의 도움을 받아 아이들은 산을 무사히 내려 올 수 있었다.
아이들이 소방관들의 손길에 경기를 일으키는 등의 소란이 있긴 했지만 내가 곁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 금세 안정을 되찾았다.
“어떻게 된 거에요?”
내가 향산으로 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인지, 산 아래에는 이은수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방관에 만약을 대비한 헌터들까지, 주변을 통제하고 있었지만 A급 헌터인 그녀를 제재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 자리에 온 몸과는 달리, 이은수의 얼굴에는 나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어쨌든,
“여문휘는 죽었습니다.”
“정말요?!! 혈검과 독괴가 향산을 올랐다는 보고를 받았는데...”
이은수가 믿기지 않는 다는 듯, 중얼거렸다.
마음과는 별개로 일은 열심히 하고 있었던 모양인지, 이은수는 혈검과 독괴의 동향도 파악하고 있었다.
“그 둘뿐만 아니라 향산에 있던 살막의 살수들은 전부 죽었습니다.”
“...그렇군요.”
내 단호함에 이은수는 의심을 거두어들였다.
어차피 화재 진압이 끝나는 대로 확인할 수 있을 터.
괜한 의심으로 캐물어 나와의 관계를 불편하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근데... 얘들은 누구에요?”
이은수가 내 뒤에 따닥따닥 붙어 있는 아이들을 보며 물었다.
“살막에게 잡혀 온 아이들입니다.”
나는 소방관들의 도움을 받아 산을 내려온 뒤, 그대로 그들에게 아이들을 맡기려 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의료진의 치료도 거부한 채,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떨어지지 않았다.
오직 나만이 자신들을 지켜줄 수 있는 존재로 여기는 듯했다.
“어떻게...”
아이들의 상태를 보고 대강의 사정을 눈치 챈, 이은수의 얼굴에 아이들을 향한 동정과 살막에 대한 분노가 동시에 깃들었다.
이내 분노의 대상이 전부 죽었다는 것을 상기해내고는 오직 동정만이 남았다.
“아이들의 부모를 찾아주셨으면 합니다.”
순간의 변덕 때문에 구한 아이들이라 할지라도, 한 번 손을 댄 이상 끝까지 책임질 생각이다.
그리고 그 책임은 아이들을 부모의 품을 돌려주는 것까지였다.
내가 부모 역할을 대신 해줄 수도 없거니와, 할 줄도 몰랐다.
“알겠어요.”
이은수는 맡겨만 달라는 듯, 힘차게 대답했다.
꼭 내 부탁이 아니었더라도 눈앞의 불쌍한 아이들을 외면하지 않았을 듯했다.
***
아이들을 이은수에게 맡기고 나는 제갈민에게로 향했다.
나에게 도통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아이들이었지만 금방 다시 돌아온다는 말에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숱한 상처를 입어 왔을 텐데도, 한 번의 도움으로 마음을 열고 믿을 만큼, 순수한 아이들이었다.
이은수는 졸지에 아이 열 명의 보모가 되어버렸지만 전혀 불평하지 않았다.
나와 함께 있는 것보다는 아이들을 돌보는 쪽을 마음 편해 하는 것 같았다.
내가 떠날 때도, 내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아이들을 씻기고 먹이는데 열중이었다.
어쨌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갈민을 만나는데, 앞서와 같이 몰래 침입할 필요는 없었다.
관저에서 만난 제갈민은 문을 활짝 열어 놓고 나를 맞이했다.
“생각보다 일을 크게 벌이셨더군요.”
나를 보자마자 제갈민은 비난하듯 말했다.
하긴, 여문휘를 비롯해 살막의 주요 전력을 삼백 이상 날려버렸으니, 화가 날 법도 했다.
솔직히 내색하지 않고 있지만 가능하다면 나를 죽여 버리고 싶을 거다.
최소 일류에 오른 무인만 삼백이다.
거기에 앞으로 자신의 오른팔, 왼팔이 되어 부족한 무력을 대신해주어야 하는 혈검과 독괴도 잃었다.
분노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있는 것만 해도 인내심이 대단하다 할 수 있었다.
“후... 이미 지나간 일을 탓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이번 일을 마지막으로 살막과의 은원은 잊어주시기 바랍니다.”
긴 호흡으로 마음을 가다듬은 제갈민은 부탁어린 말과 함께 고개를 숙여보였다.
나와 제갈민, 단 둘밖에 없는 자리라고는 하나, 만인지상의 자리에 있는 그가 고개를 숙이기까지는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혈괴와 독괴라는 방패를 잃은 제갈민은 비굴해지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지금은 평화롭지만 저 멀리 유럽에서 타이탄이 힘을 기르고 있고, 미국도 점차 외부로 시선을 돌리고 있습니다. 한국 홀로는 그들의 힘을 결코 버텨내지 못할 겁니다. 중국은 훌륭한 방파제가 되어 줄 겁니다.”
“...”
“아무리 당신이 있다 해도 한국이 중국과 전쟁을 치를 수는 없을 겁니다. 물론, 지휘부를 암살하는 것쯤은 가능하겠지만 핵미사일 한 발이면, 끝날 전쟁입니다.”
내가 대답이 없자, 제갈민이 협박을 곁들였다.
위협적이진 않았다.
당장 이 자리에서 제갈민의 목을 따버리는 수도 있으니까.
밖에 수십의 헌터들이 대기 중이지만 그들까지 전부 죽이고 유유히 벗어날 자신도 있다.
지금 내가 두려워 할 건 없었다.
“결코 협박은 아닙니다. 그저 제 목숨을 건사하고 싶은 마음에 드린 말일 뿐입니다.”
내 생각대로 혹, 자신의 말이 내 심기를 건드렸을까, 노심초사하는 제갈민이다.
“그러지.”
나는 잠시간 그의 삶을 유예해주었다.
제갈민과 살막은 언제든지 치워버릴 수 있는 상대다.
그의 말대로 타이탄 등과 대신 싸워줄 훌륭한 장기 말이 될 테니, 이용하는 편이 나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