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살수다-125화 (125/150)

# 125

125화. 정리.

“군사에겐 얘기 들었소. 혈검이라 하오.”

“독괴요.”

내 상념을 깬 것은 혈검과 독괴였다.

여문휘라는 족쇄를 끊어낸 그들의 얼굴에는 얼핏 희열이 엿보였다.

그 뒤에는 나를 향한 경계심도 있었다.

여문휘를 수세에 몰리게 할 정도의 고수.

자신들이 합세하지 않았더라도, 결국 눈앞의 사내가 승리했을 것임은 자명했다.

내가 어떤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 자신들도 위험할 수 있는 만큼, 그들은 거리를 벌린 채 경계심을 숨기지 않았다.

“왕진이라 합니다.”

둘은 무림의 별호로 자신을 소개했지만 나는 내 별호와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을 죽인 살수가 나, 무영살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죽었지만 살막에게서 들었을 수도 있다.

내 이름도 알 수 있으니,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물론 그들이 이제와 나를 향해 검을 들이민다 해서 당할 리는 없지만.

“우선 주변을 정리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여문휘는 죽었지만 살수와 무풍대원들이 남았다.

물론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도망칠 궁리를 하는게, 당장 위협이 될 만한 자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흉수인 나를 보았고, 혈검과 독괴의 배신도 보았다.

동시에 살막의 전력을 줄일 수 있는 기회였다.

제갈민과 불가침의 언약을 맺었다고는 하나, 무림에서 웃음 속에 칼을 감추는 소리장도(笑裏藏刀)는 숨 쉬는 것과 같이 당연한 일이다.

잠시 한 배를 탔을 뿐이지, 영원한 동지는 아니다.

여문휘의 죽음 뒤에도 살막을 와해시켜야 한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었고, 이 기회를 그냥 흘려보낼 생각도 없었다.

“독괴. 퇴로를 차단해 주시오.”

“그러지.”

내 말에 혈검이 독괴를 바라봤고, 독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둘도 자신들의 배신이 새어나가기를 원하지 않았다.

살막의 힘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들이 아무리 초절정 고수라 해도 살막의 살수들이 마음먹고 노려온다면, 앞으로 편히 발 뻗고 자는 것은 포기해야 한다.

그러니, 그들로서도 목격자를 살려둘 수는 없었다.

독괴의 손에서 녹색의 독무가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나와 여문휘의 싸움에 수십의 살수와 무풍대원이 갈려나가긴 했지만 아직도 삼백이 넘는 살수들이 나를 포위한 상태로 몰려 있었다.

아무리 독공이 다수를 상대로 강력하긴 해도, 독괴의 경지로는 그들을 일거에 몰살 수 있을 정도의 독을 뿌려댈 수는 없다.

때문에 강력한 독 대신 녹색의 독무를 뿌려 퇴로를 막는 선에서 그쳤다.

살상력은 떨어지지만 내공을 흩어 버리는 산공의 효과에 몸을 마비시키는 효과가 더해진 독이었다.

“독이다!”

“피해!”

갑작스런 혈검과 독괴의 배신에 어리둥절해 있던 살수들과 무풍대원들은 자신들을 향해 쏟아지는 독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다행이라면, 그 독무가 자신들을 직접적으로 노려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흩뿌려진 독무는 독괴의 의도대로 살수와 무풍대원의 뒤에 자리 잡고 퇴로를 막았다.

“허둥대지 마라!”

“호흡을 멈추고, 자리를 지켜! 살상력을 갖춘 독이 아니다!”

몇몇 살수들이 독의 효과를 파악하고, 혼란을 수습하려 했다.

그러나 퇴로는 막혔고, 앞에는 감당하기 힘든 세 명의 고수가 살의를 숨기지 않고 있었다.

독무를 피했다고 안심하긴 일렀다.

“어째서...”

“크악!”

“끄아아악!”

상대는 삼백이 넘었지만 먼저 움직인 것은 내 쪽이었다.

내가 선두에 서있던 살수의 심장을 꿰뚫는 것을 시작으로, 혈검이 옆에 있던 무풍대원의 목을 베었고, 독괴가 또 다른 살수를 한 줌 독수로 녹여버렸다.

그 중, 독괴의 손에 당한 살수의 최후가 가장 끔찍했다.

온 몸이 천천히 녹아내리며 고통 속에 죽어가는 살수를 보니, 나와 혈검에게 죽은 자들은 그나마 운이 좋다 할 수 있었다.

“살려줘!”

“도망쳐!”

세 명의 절세 고수 앞에서 삼백이 넘는 수도 무의미했다.

백배가 넘는 인원이 고작 세 명으로 인해 늑대에게 쫓기는 양떼마냥 혼란에 빠졌다.

그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차례차례 휩쓸려나갔다.

내 검은커녕, 혈검과 독괴의 검과 독장도 제대로 막아내는 이가 드물었다.

어찌어찌 일합을 막아낸다 하더라도, 세합을 넘기지는 못했다.

초절정 고수와 절정 고수의 격차다.

진을 이루고, 대항해왔다면, 조금 나았을지 모르지만 여문휘라는 우두머리를 잃은 그들은 대항할 의지도 함께 잃어버렸다.

독을 뚫고 도망치려고 시도한 이들도 있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독을 이기지 못하고 사지를 부들부들 떨어대던 그들은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했다.

“제발...살려...컥!”

비굴하게 땅바닥을 기며 목숨을 구걸하던 자를 마지막으로, 삼백이 넘는 수가 전부 시체로 변하는데 삼십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시체가 산처럼 쌓였고, 흘린 피는 내가 되어 넘쳐흘렀다.

간혹 독괴에게 죽임을 당한 이들의 흔적으로 검게 물든 자리도 눈에 띄었다.

“후우...후우...”

삼백의 살수와 무풍대원을 참살한 혈검과 독괴가 거침 숨을 내뱉었다.

그 둘이 상대한 살수와 무풍대원이 백오십 가량.

내가 적당히 힘을 숨기기도 했고, 나에 비해 비교적 약한 그 둘을 뚫어내려는 시도가 많았기때문에 그들이 상대한 인원이 늘었다.

아무리 초절정 고수라 해도 절정, 혹은 일류 무인 백 명 넘게 상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체력뿐만 아니라, 내공도 대부분 소모됐다.

당장 운기가 필요한 정도는 아니지만 싸움을 더 지속된다면, 위험을 느낄 정도는 되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대도 고생하셨소.”

“아니오.

내 말에 혈검과 독괴가 고개를 저었다.

둘이 백오십 가량을 죽였지만 나는 홀로 그 이상을 죽였다.

무공의 고하가 있으니, 당연한 결과이긴 했지만 여기서 자신의 수고를 알아달라고 내색하는 것은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격이었다.

“그럼, 이제 편히 쉬어라.”

“무슨?...컥!”

갑작스러운 하대에 독괴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지만 이어진 고통이 그 표정을 가렸다.

잠시간 함께 싸웠다고 어설픈 전우애라도 생겼음인가.

경계심이 옅어진 독괴의 숨통을 끊어 놓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독괴에게 먼저 기습을 가한 것은 그저 그가 조금 더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다.

독공이 까다롭다고는 하나, 이미 만독불침에 가까운 나에게 독괴의 독은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한다.

“어째서...”

독괴의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 속에서 눈만이 억울함을 토로했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체내의 독을 통제하던 정신이 멀어지며 독괴의 몸도 자신의 독공에 당했던 적들과 같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끄아아....”

독괴는 자신의 독공에 당한 이들과 같이 고통 속에 몸부림치다 한줌 독수로 사라졌다.

“이게... 무슨 짓이오?!”

그 모습을 지켜본 혈검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만이 가득했다.

나는 독괴와 합공을 해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상대다.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 독괴마저 죽어버렸으니, 승산은 없었다.

으쓱.

나는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곧 죽을 이에게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사실, 이유는 간단했다.

앞서 죽인 여문휘나, 살수와 무풍대원들과 같이 혈검과 독괴도 잠재적인 적이다.

나에게는 아니더라도, 내 주변에게는 꽤나 위험적인.

그런 자들을 기회가 왔는데, 굳이 살려둘 이유가 없었다.

“놈!”

피할 수 없음을 깨달은 혈검이 고성을 토하며 달려들었지만 무의미한 발악이었다.

그들의 검을 막아내지 못했던 살막의 무인들처럼, 그는 나와의 격차를 메우지 못했다.

몸을 비트는 것으로 가볍게 혈검의 검을 흘려보낸 내가 손을 뻗었고, 그 손에 들린 검은 그대로 혈검의 목을 베어냈다.

“제기...랄...”

욕설과 함께 몸과 분리된 혈검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몸뚱이에서 솟구친 피가 분수처럼 허공을 수놓았다.

“다 네놈들의 업이라고 생각해라.”

나는 혈검과 독괴가 죽어가는 여문휘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며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털어냈다.

***

“살려주십시오!”

“저희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살막의 근거지에 살수와 무풍대원만 있는 건 아니었다.

그들의 편의를 위해, 혹은 저열한 욕망을 해소하기 위한 도구로써의 사람들도 존재했다.

정당한 급여를 받고 일을 하러 왔건, 원치 않게 사로잡혀 왔건.

아주 멀리서 숨어져 지켜보던 이들은 전투가 끝나자 이렇게 나와 목숨을 빌었다.

전부가 나온 것은 아니었다.

어딘가에 틀어박혀 꽁꽁 숨어 있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내 앞에서 직접 빌건, 숨어 있건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내 자비를 바라는 것뿐이었다.

인외의 경지에 닿은 무인들을 싸움을 두 눈으로 직접 보았다.

빛이 번쩍하며 동굴이 무너지고, 나무가 터져 나갔다.

고작 셋이서 수백을 참살했다.

그런 자가 마음먹고 살수를 펼치면 피할 길은 없었다.

‘...’

그들에게는 안타깝지만 나는 정파의 협객이 아니었다.

그들을 돕거나 살려주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들을 죽여야 할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화르륵.

“살고 싶으면 알아서 도망쳐라.”

나는 내 앞에 무릎 꿇은 이들을 무시한 채, 살막의 근거지에 불을 놓았다.

시체를 거름 삼아 피어오른 불길은 삽시간에 근거지 전체로 번져갔다.

싸움으로 인한 파괴의 흔적에 불길이 더해지자, 살막의 근거지는 완전히 화적떼가 휩쓸고 간 마을의 모습으로 빠르게 변해갔다.

“으아악!”

“불이야!!”

나에게 목숨을 구걸하던 이들은 근거지를 덮쳐오는 불길을 보고 정신없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당장 도망치지 않으면, 불길에 휩싸일 판이었다.

내 검이 자신들에게 향하는지, 향하지 않는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불이야! 불이야!”

“다들 빨리 나와요!”

몇몇이 도망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댄 탓에 숨어 있던 이들도 무사히 빠져나와 근거지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입구 쪽에 경비를 서는 최소한의 병력이 남아 있었지만 그들은 불길을 잠재우려다, 혹은 도망치는 자들을 막아서다 내 손에 죽음을 맞이했다.

범인들은 안중에 두지 않았지만 무인은 아니었다.

삼류에 불과할지라도 결코 자비란 없었다.

나는 아주 작은 후환도 남겨두지 않았다.

“후...”

불길이 거세게 타오르는 근거지에서 내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제 발로 도망칠 수 있는 이들은 모조리 도망쳤다.

그러나 화마가 덮쳐가는 자리에 아직도 남아 있는 이들이 있었다.

제 목숨만을 건사하기 위해 먼저 도망친 이들이 나쁜 게 아니다.

일부는 도망치면서도 숨어있는 사람들을 위해 소리쳤고, 몇몇은 거동이 불편한 이들을 챙겨 함께 달아났다.

그럼에도 남아 있는 이들이 있는 이유는 도망친 이들 누구도 그들의 존재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콰직.

나는 아직 불길이 미치지 않은 근거지 구석 자리에 있는 집 바닥을 드러냈다.

그 안에는 십여 명의 아이들이 있었다.

남아도 있고, 여아도 있었다.

몸 상태로 보아, 무공을 가르치기 위해 데려온 아이들은 아니다.

대체 이곳에 왜 있는지도 모를 아이들이다.

아니, 이유는 알고 있다.

너무 더러워 생각으로도 담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살려...주세요...”

아이들은 하나같이 잔뜩 겁먹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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