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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살수다-124화 (124/150)

# 124

124화. 여문휘(3).

일갈을 터트린 여문휘는 앞뒤 가리지 않고 곧장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초탈해 현인처럼 느껴질 만큼 정기 넘치던 눈은 온데간데없었다.

부동심이 사라지고 복수심만 남은 두 눈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쐐애액.

분노했지만 그 와중에도 사혈을 정확히 노릴 정도로 여문휘의 검은 날카로웠다.

우연히 현경의 경지에 발을 들인 깨달음을 얻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챙!

그러나 나는 찔러 들어오는 검을 정확히 쳐 올렸고, 여문휘의 검은 맥없이 튕겨져 나갔다.

“죽어라!”

머리 위까지 튕겨져 나갔던 검이 그대로 떨어져 내렸다.

반발력을 제대로 해소해내지도 못했을 텐데, 찌르기가 막힐 것쯤은 예상했다는 듯, 손에 힘을 주는 동작도 없이 그대로 내려치기로 이어졌다.

카카칵!

여문휘의 찌르기를 쳐냈던 검을 비스듬히 들어 올려 내려치기를 흘려보냈다.

검과 검, 강기와 강기가 긁혀나가는 기분 나쁜 소리가 귓가를 어지럽혔고, 검신을 타고 여문휘이 검이 미끄러져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도 잠시.

내가 손을 비틀자, 그 끝의 검은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일직선으로 곧게 뻗었다.

그리고 허공에는 강기의 흔적이 만들어낸 한 일자가 수놓아졌다,

이번엔 내 손끝에서 찌르기가 여문휘를 향해 뻗어나갔다.

스륵.

여문휘는 허리를 뒤로 접는 철판교의 수법으로 찌르기를 피해냈다.

앞섬이 살짝 잘려나가긴 했지만 핏물을 묻어나오지 않았다.

채채채챙!

수합의 공방이 눈 깜짝할 새에 오고갔다.

현경의 고수들이 만들어낸 생사결 치고는 찌르기, 베기 등 검법의 기본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 전부다.

그러나 그 기본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이 수백 년 무림에서 손꼽히는 어떠한 절세무공보다 강했다.

찌르기는 빛보다 빨랐고, 베기에 실린 힘은 강철을 종잇장으로 여길 정도로 파괴적이었다.

당연히 그 여파도 상상이상이었다.

쿠르릉. 콰쾅!

오랜 시간 제자리를 지켜왔던 동굴이 무너진 것도 모자라 절벽까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고, 그 주변 살막의 근거지는 화적떼라도 휩쓸고 간 듯, 폐허가 되었다.

그리고 그 파괴적인 여파는 여전히 실시간으로 진행 중이었다.

살수와 무풍대원들에게도 마찬가지.

“크악!”

운 좋게 동굴을 빠져나와 목숨을 부지했던 두 명의 무풍대원은 이미 힘의 여파에 휩쓸려 존재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게 된지 오래였고, 뒤늦게 도착한 살수들과 무풍대원들도 쉽사리 접근하지 못한 채, 의견이 갈려 우왕좌왕했다.

수세에 몰린 문주를 도와야 한다는 마음은 있었지만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절정 고수도 피를 토하며 절명해버리는 탓에 접근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목숨 걸고 문주님을 도와라!”

“물러서! 휩쓸리면 죽는다!”

충심과 본능 사이에서 그들은 갈등했고, 대부분은 본능을 택했다.

소수이긴 하지만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도 충심을 선택 한 부나방같은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여문휘에게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등 뒤에서 나를 노렸다.

여파로 몸이 갈려나가면서도 암기 하나, 혹은 자신의 무기를 집어던지면서까지 여문휘를 돕고자했다.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적인 충심이었다.

팅!

그러나 감동은 감동일 뿐, 그들의 목숨을 건 일격은 나에게 닿지 못했다.

고작 절정.

검기가 서린 암기와 무기들은 내 호신강기를 뚫어내지 못했다.

간혹 선천지기까지 끌어다 썼는지, 쥐어짜낸 강기가 실린 암기가 날아오기도 했지만 조금 걸리적거리는 수준에 불과했다.

그렇다고 그들이 희생이 완전히 헛된 것은 아니다.

그들이 방해라도 해준 덕분에 여문휘가 지금껏 버티고 있는 것이긴 했다.

“무영살...”

주변 환경을 바꿔버리고, 수십의 부나방들이 갈려나가는 무지막지한 충돌도 영원하지는 않았다.

나와 여문휘의 싸움은 끝을 보이고 있었다.

거침없이 쏟아내던 여문휘의 공격이 점차 힘을 잃었다.

동굴을 빠져나왔을 때부터 여문휘는 동공 안에서 나에게 입은 내상을 회복하지 못한 채, 동굴을 빠져나오느라 적지 않은 내공을 소모한 상태였다.

물론 내상의 정도는 미미하고, 소모된 내공도 전체에 비하면 하잘것없지만 고수 간의 대결에는 그 작은 차이가 메울 수 없는 차이가 되기도 한다.

자신의 상태를 알기에 빠르게 결판을 짓기 위해 말마저 아끼며 전력을 다했지만 여문휘의 검은 단 한 번도 나에게 닿지 못했다.

충심어린 수하들이 목숨 바쳐 여문휘를 돕고자 했지만 그 결과에는 변함이 없었고, 결국 시간의 흐름에 따라 더 지치고 열세에 처하게 된 것은 여문휘였다.

그 동안 태빈의 검은 착실히 여문휘의 살을 갉아먹었다.

수십 합의 공방을 주고받은 지금, 여문휘의 몸에는 생채기를 시작으로 치명상이라 부를 만한 상처 또한 두어 개 새겨져 있었다.

이미 옷가지는 넝마에 가깝고, 머리는 산발에 온몸에 피 칠갑을 한 여문휘는 마치 피에 미친 야차와 같았다.

“하루... 아니 반나절 차이인가.”

여문휘가 아쉬움을 담아 중얼거렸다.

동공 안에서부터 느끼고 있었다.

지금 눈앞의 무영살과 자신의 격차를.

반나절만 주어졌더라면 메울 수 있지 않았을까.

반나절의 시간만 더 있었더라면, 제대로 자웅을 겨뤄볼 수 있었을 텐데.

아니, 무영살과의 차이는 반수뿐만이 아니다.

오랜 시간 살행을 나서지 않았기 때문에 감각이 예리하게 벼려지지 않았고, 깨달음을 얻고 자만했다.

지금의 결과는 스스로 자초한 것이 다름없었다.

“...”

나는 여문휘의 독백과도 같은 중얼거림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아쉬운 일이지만 나에겐 잘 된 일이다.

그가 깨달음을 온전히 제 것으로 만들고 만반의 준비를 한 채 나를 기다렸다면, 내가 여문휘와 같은 상황에 쳐했을 수도 있었다.

촤아악.

여문휘의 어깨가 갈라지며 피분수가 튀었다.

상처투성이에 지칠 대로 지친 여문휘는 이제 내 검을 피하는 게 고작이었다.

아니 피하는 것도 못해 치명상을 면하는 정도다.

그럼에도 여문휘는 쓰러지지 않았다.

만신창이가 된 육체는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지만 여문휘의 정신만은 아직 견고했다.

여문휘는 살을 내주더라도 치명상은 피하며 반격의 때를 기다렸다.

촤아아아아악!

나는 쉴 새 없이 몰아쳤고, 다시 한 번 여문휘의 몸을 갈라냈다.

이미 승부의 추는 기운 상태이지만 나는 이 지루한 싸움을 한 시 빨리 끝내고 싶었다.

충돌의 여파가 가실 때마다 슬금슬금 발을 들이밀어 보는 살수들과 무풍대원은 문제 될 것 없지만 제갈민이 보낸 혈검과 독괴가 언제 도착할지 몰랐다.

물론 그 둘이라 해도 이미 기울어진 전세를 뒤집을 만한 영향을 끼치기는 힘들다.

그러나 여문휘의 의지가 이대로 무뎌지지 않는다면, 한 번쯤은 기회를 내주게 될 수도 있었다.

***

“크크...”

잔뜩 웅크린 채, 방어에 열중하던 여문휘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동시에 내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등 뒤에서 만만치 않은 기운 두 개가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하압!”

나는 혈검과 독괴가 합류하기 전에 여문휘를 죽이고자 더욱 거세게 몰아쳤다.

그러나 지금까지 제대로 뚫어내지 못한 방어를 이제 와서 갑자기 뚫어낼 수 있을 리 없었다.

“여문주!”

“합세하겠소!”

“놈!”

결국, 혈검과 독괴가 도착했고, 여문휘는 이때만을 기다려왔다는 듯 방어를 풀고 적극적으로 공격에 나섰다.

이미 육체적으로 한계에 몰려 있는 탓에 처음과 같은 위력은 아니었지만 혈검과 독괴의 공세도 염두 해둬야 하는 탓에 꽤나 위협적이었다.

나는 선택을 해야 했다.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방어를 푼 여문휘와 끝장을 볼 것인지, 아니면 비교적 약한 혈검과 독괴를 먼저 처리한 다음에 여문휘를 마저 상대할지를.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였기에 고민은 길지 않았다.

‘여문휘를 먼저 죽인다.’

내 선택은 방어태세를 푼 여문휘였다.

나는 등 뒤를 내버려 둔 채, 여문휘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여문휘가 마지막 힘을 끌어올려 만들어낸 흰색 뱀이 내 검에 의해 무참히 찢겨 나갔다.

자신의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자, 결코 꺾이지 않을 것 같던 여문휘의 정신이 마침내 꺾였다.

가슴을 꿰뚫린 여문휘의 얼굴이 검게 물들었다.

지루한 싸움이 혈검과 독괴가 합류한 한순간에 결판났다.

“크크...”

여문휘가 실소를 흘렸다.

가슴을 관통한 태빈의 검 때문이 아니었다.

그 검에 찔리기 전, 자신을 노린 두 개의 공격.

혈검의 검과 독괴의 독장이 태빈의 등 뒤가 아닌, 자신을 향해 쏟아졌기 때문이다.

믿었던 수하.

아니, 적어도 같은 적을 두고 있는 동지라 여겼던 이들의 배신에 절로 실소가 흘러나왔다.

“막주 미안하게 됐소.”

“다 막주의 업이라고 생각하시오. 살수의 끝이 뭐 다 이런 거 아니겠소.”

혈검과 독괴가 죽어가는 여문휘를 보며 말했다.

혈검과 독괴는 살막의 살수가 아닌 회유된 자들.

제갈민 앞에서는 막주인 여문휘를 위하는 척 했지만 언제고 배신할 준비가 된 자들이었다.

지금 자신들이 누리는 것을 계속해서 누릴 수만 있다면, 여문휘의 생사는 중요치 않았다.

아니, 자신의 목줄을 움켜쥐고 있는 자였으니, 사라져 주는 편이 오히려 나았다.

마침 여문휘가 수세에 몰려 있는 상황.

여문휘를 공격하는 자의 정체는 알 수 없으나, 그를 돕는 쪽으로 빠르게 뜻을 모은 것이다.

[우리는 여문휘를 칠 것이오!]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들려온 혈검의 전음.

내가 여문휘를 먼저 공격한 이유였다.

둘의 말을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지만 등 뒤에 쏟아야할 신경을 조금 덜어냈다.

이어 그 둘을 약속을 지켰고, 나는 여문휘의 몸을 꿰뚫을 수 있었다.

마지막 순간에 몸을 비틀어 피해낸 탓에 심장은 부수지 못했지만 독괴의 독에 가슴에 뻥 뚫린 구멍은 결코 회복할 수 없을 정도의 치명상이었다.

“쿨럭!”

여문휘가 왈칵 피를 쏟아냈다.

그의 눈은 쏟아지는 피의 양과 비례해 생기를 잃어갔다.

믿었던 동지의 배신.

살수의 죽음으로는 퍽 어울렸지만 현경이라는 지고한 경지에 닿은 무인의 죽음이라고 하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긴, 무림 역사에 현경, 아니 그 이상의 경지에 오르고도 배신으로 목숨을 잃은 이가 한둘이던가.

“크크... 네 놈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자신의 마지막을 감지한 여문휘가 나를 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희열에서 실소로, 그리고 비웃음.

마지막에 와서 다양한 웃음을 흘려보이는 여문휘였다.

“무엇을 말이지?”

“이세계....우리가...되돌...이유...”

여문휘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나를 직시하던 두 눈은 그대로 부릅뜬 채였지만 고개가 더는 버티지 못하고 힘없이 꺾였다.

“무슨 뜻이냐?!”

“...”

급히 여문휘의 멱살을 부여잡았지만 이미 죽어버린 자에게 못 다한 얘기를 들을 수는 없었다.

“이 세계, 되돌아, 이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남긴 몇 마디 말을 곱씹는 것뿐이었다.

불구대천의 원수를 죽이고 승리했음에도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찜찜함이 남은 전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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