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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살수다-122화 (122/150)

# 122

122화. 여문휘.

내가 관저를 떠난 것은 혈검과 독괴를 확인한 뒤였다.

제갈민이 그 둘을 언급했을 때부터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

그 둘로 하여금 나를 노릴 것이라는 것을.

더 볼 것도 없었다.

나는 본연의 목적이었던 여문휘를 죽이기 위해 곧장 향산으로 향했다.

“휴... 김태빈 헌터...”

미리 약속된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은수가 나를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당장 죽을 것 같던 표정으로 봐서는 내가 관저에 잠입하는 순간, 도망이라도 칠 줄 알았는데, 이렇게 기다리고 있다니 조금은 의외였다.

목숨보다 명령을 우선시 하는 타입은 아니라고 봤는데.

“직접 확인해 보셨겠지만 철통같은 경비를 뚫고 제갈민을 만나는 건 쉽지 않아요.”

기다린 이유가 있었다.

이은수는 너무나 멀쩡한 내 모습에 결국 실패하고 몸을 빼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하긴, 관저 내에서도 무풍대주를 죽인 것 외에는 침입으로 인한 소란은 없다시피 했으니. 오해할 만했다.

“향산으로 갑시다.”

나는 그 오해를 굳이 정정해주지 않았다.

지금도 충분히 겁먹은 상태인데, 더 자극할 필요는 없었다.

처음 그녀를 필요로 한 건,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지만 지금은 길잡이 역할 만으로도 충분했다.

***

“여기서부터는 저 혼자 가겠습니다. 샤오화씨는 이만 돌아가셔도 됩니다.”

관저에서는 제법 가까운 거리까지 함께했지만 향산에서는 그럴 수 없다.

상대는 화경의, 어쩌면 그 이상의 경지에 닿아 있을지도 모를 고수.

아무리 은잠술이 뛰어나다 해도, 고작 A급 헌터의 접근을 눈치 채지 못할 리 없었다.

물론, 살막이 근거지로 사용하고 있는 산인만큼, 헌터가 오가는 게 이상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은수에게 조금 더 안내를 받고자 위험을 감수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알겠어요.”

이은수도 자신이 태빈에게 길잡이 이상의 도움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말없이 수긍했다.

내심 더 이상 태빈과 얽히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컸다.

나와 만나, 고작 몇 시간 만에 중국의 밤과 낮의 황제, 둘 모두와 얽혔다.

아무리 정보원이라고 해도, 고작 A급 헌터가 감당하기에는 힘든 일이었다.

“호텔에서 다시 만납시다.”

“예...”

내 말에 대한 이은수의 대답이 힘없이 느껴졌다.

다시 만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확실히 전해졌다.

그러나 여문휘를 코앞에 둔 지금은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쓸 데가 아니었다.

***

이은수를 떠나보내고 나는 홀로 향산을 올랐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나는 산을 오르내리는 평범한 사람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내 주위의 누구도 내 존재를 인지하지 못했다.

저들끼리는 가벼운 눈인사를 주고받기도 했지만 나를 향한 시선은 전혀 없었다.

내가 완전히 자연과 동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과거였다면, 일부러 모습을 감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조금 기감이 예민한 사람들은 나를 인지 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현경에 오른 지금은 아니었다.

굳이 은잠술을 펼치지 않더라도 평범한 사람들의 이목을 속이는 것은 숨쉬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그렇게 산을 오르던 나는 중간에 길이 아닌 곳으로 빠져, 길조차 나있지 않은 숲을 헤쳐나갔다.

아무리 살막이라도 근거지를 등산로에 버젓이 둘 수는 없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 혹 발을 잘 못 들였더라도 찾지 못하도록 숨겨져 있었다.

“산이 중턱에 진법이 펼쳐진 곳이 있을 겁니다.”

살막이 근거지를 감춘 방법은 간단했다.

진법.

이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마법과도 같은 진법은 살막의 근거지를 완벽히 숨겨주었다.

그리고 그 진법이 지금 바로 내 앞에 펼쳐져 있었다.

“환영진과 미로진이 섞였군.”

살막에는 일류 이하의 살수들도 있는 만큼, 진법의 수준은 그리 높지 않았다.

보통 사람이 발을 들였다면, 숲을 헤매다 원래 자리로 돌아왔겠지만 내게는 손짓 한 번이면, 진법 자체를 파훼할 수도 있을 정도의 수준 낮은 진법.

하지만 안에서 알아차릴 수도 있으니, 진법을 파훼하지는 않았다.

그저 걸음을 옮겼다.

진법의 수준자체가 너무 낮은 탓에 생문을 찾기 위해 고생할 필요도 없었다.

기운의 흐름이 가장 자연스러운 곳으로 향했고, 그 자리에 어김없이 생문이 있었다.

‘녹림의 산채 같군.’

진법 뒤에 숨겨져 있던 살막의 근거지는 녹림의 산채와 같았다.

입구인 정면을 제외한 사방을 절벽이 성벽마냥 둘러져 있었고, 그 안에 살수들이 머무는 집들이 일정한 규칙을 갖춰 모여 있었다.

진의 묘리를 따른 집들의 배열은 밖에서 보고 진입한다 하더라도, 막상 내부에서는 십중팔구 길을 잃고 헤매게 만들 것이다.

뒤로는 절벽 위로 사다리와 엘레베이터를 설치해 만약을 대비한 퇴로도 확보된 상태였다.

‘여문휘는 동굴에 있다 했지.’

눈앞에 보이는 수십 채의 집 가운데, 여문휘의 것은 없었다.

제갈민의 말에 따르면, 여문휘는 특이하게 동굴 내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했다.

폐관도 동굴 내에서 하고 있고.

무림에서는 궁궐과도 같은 전각을 썼었는데, 한 번의 죽음 뒤로 자신감이 많이 깎인 모양이었다.

‘가볼까.’

나는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산을 오를 때와 같이 산책하는 듯, 여유로운 걸음은 아니었다.

살막의 근거지에는 수백의 살수와 무풍대가 상주하고 있었고, 지금까지와 같은 방법으로 그들의 이목을 속이는 일은 불가능했다.

뚫어내고자 하면, 뚫어내지 못할 것도 없고, 마음먹고 은잠술을 펼치면 잠입이 어려운 것도 아니었지만 굳이 정면의 입구를 고집할 필요는 없었다.

타탓.

나는 곧장 절벽을 타고 올랐다.

향산은 애초에 해발 550m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때문에 근거지를 둘러싼 절벽도 그리 높지 않았다.

고작 수십 미터.

보통 사람도 도구와 시간만 갖춰지면 충분히 오를 수 있는 높이였고, 나는 고작 몇 번의 도약만으로 절벽의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일급 살수가 열.’

높이가 낮은 절벽인 만큼, 위로부터의 침입도 예상은 했는지, 둘씩 다섯 개 조가 경계를 서고 있었다.

좌우로 각기 두 개 조, 후방에 한 개조.

수는 고작 열밖에 되지 않았지만 하나같이 절정에 오른, 일급 살수들이 완전히 몸을 숨긴 채, 숲 속에 녹아 있었다.

물론 내가 보기에는 어린 아이 수준에 불과한 은잠술이다.

나는 고작 주변을 한 번 둘러보는 것으로 열 모두 찾아낼 수 있었다.

아무리 수풀 등의 지형지물을 이용해 몸을 숨기고, 호흡을 옅게 해도 인간 본연의 기운은 완전히 감추지 못했다.

반면, 나는 그들처럼 굳이 모습을 감추려 애쓰지 않았다.

이미 자연과 동화된 상태다.

나무의 그림자나 바위 뒤에 몸을 숨기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이번엔 무풍대인가.’

내 존재조차 눈치 채지 못한 열 명의 살수들을 뒤로 하고, 나는 근거지 뒤편 절벽에 뚫려 있는 동굴 위에 섰다.

주변을 살수들이 경계하고 있었다면, 동굴 앞은 무풍대원들이 막아서고 있었다.

살수와 무풍대를 구분할 수 있는 건, 무풍대원에게서 나는 피 냄새가 훨씬 옅었기 때문이다.

물론, 실제 피 냄새가 아니라 풍기는 기운을 빗댄 말이다.

5년 간, 수련에 매진하다 최근 활동을 시작한 무풍대는 기존 살막의 살수들에 비해 묻힌 피가 적었고, 자연히 그 냄새도 옅었다.

‘넷이라...’

동굴 입구를 지키고 있는 것은 무풍대원 넷이었다.

둘 정도는 사각을 이용해 완벽히 잠입할 수 있고, 셋도 위화감을 느끼는 정도에 그치겠지만 넷부터는 아니다.

이목을 속이는 것보다는 제압하고 들어가는 게 쉬울 정도다.

무풍대원을 처리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내부의 여문휘가 내 존재를 알아차릴 수도 있다는 사실이 신경 쓰였다.

뭐, 알아차린다고 해도 그를 죽이지 못할 것은 없지만 조금이라도 확실히 처리하고 싶은 마음에 신중을 기하게 됐다.

그 때,

‘식사?’

멀리서 두 명의 사내가 음식을 들고 다가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 세계는 무림과 달리, 벽곡단과 같은 폐관을 위한 음식이 없다.

아무리 화경의 고수라도, 며칠이라면 모를까, 수개월 동안 음식을 섭취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 끼니때마다 직접 음식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흐아암. 교대 언제 하냐.”

“저기 식사 오네. 이제 한 시간만 더 있으면 되겠다.”

경비 임무에 지루함만 느끼던 무풍대원들의 시선이 일순 음식을 나르는 사내들에게 쏠렸다.

그리고 그 찰나의 순간은 내가 동굴에 잠입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휘잉.

무풍대원들 사이로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왔다.

그러나 그들은 그 바람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산 속 분지라는 위치에 산바람이 불어오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지금은 산바람이 아닌, 내가 만들어낸 인위적인 바람이었지만 무풍대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

음식을 나르는 대원들 덕분에 무사히 동굴 안으로 들어온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동굴의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 어디쯤에 여문휘가 머물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막주님. 폐관은 언제 끝나시려나.”

“곧 끝나지 않을까? 며칠 전부터는 식사도 안 하시는 것 같던데. 무아에 빠져 계신 걸지도.”

뒤로 음식을 든 사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들을 먼저 앞으로 보냈다.

뒤에 변수를 두고 있는 것보다는 그들이 음식을 두고 나간 뒤, 일을 도모하는 게 나았다.

다행히 동굴은 그리 길지 않았다.

십분 정도 걸음을 옮기니, 동굴이 급격히 넓어지기 시작했고, 그 앞은 커다란 문으로 막혀 있었다.

사내들이 나아간 것은 거기까지였다.

“오늘도 안 드셨네.”

“벌써 열흘짼가.”

“상승의 경지일수록 오랜 시간 무아에 빠지는 게 흔하다고 하더라.”

사내들은 차갑게 식은, 그러나 전혀 손대지 않은 앞전 음식을 치우고 새로운 음식을 그 자리에 놓아두었다.

자신의 임무를 마친 사내들은 망설임 없이 왔던 길을 되돌아 나갔다.

자신들의 막주가 열흘이나 끼니를 거르고 있음에도, 문 너머를 확인해 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무아에 빠진 것 외에, 습격 등의 상황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모양새였다.

하긴, 어떤 식으로도 앞의 무풍대원의 경비를 뚫고 이 자리까지 왔다면, 사내들만으로는 손 쓸 방법이 없으니, 저 둘이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으음...’

사내들이 떠나고 나는 문부터 시작해 주변을 꼼꼼히 살폈다.

안타깝게도 여문휘가 있을 문 너머는 문을 통하지 않고는 들어갈 방법이 없었다.

여문휘, 혹은 이 문을 만드는 이가 신경을 쓴 태가 났다.

‘결국 문을 열고 가는 수밖에 없나.’

습격은 물 건너 간 셈이었다.

지금까지 심혈을 기울여 조심스럽게 접근 한 것이 허망했다.

어차피 나중에 다 죽여야 할 적들인데, 이럴 줄 알았다면, 그냥 다 죽이고 때려 부수면서 올 걸 그랬다.

쿠쿠쿠.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계획이 조금 틀어졌지만 자신이 없는 것은 아니니.

커다란 문이 거친 소리와 함께 밀려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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