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
121화. 제갈민(2).
“막주가 죽으면, 저는 흉수로 타이탄을 지목할 생각입니다.”
구심점을 잃은 살막을 하나로 묶기 위해 제갈민이 선택한 계획은 외부의 적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내부가 혼란스러울 때, 외부로 시선을 돌리는 것은 오래전부터 애용되어 오던 방법이다.
내 생각에도 여문휘의 죽음으로 흔들릴 살수들을 결집시키는데 그 보다 좋은 방법은 없었다.
타이탄과는 일전에 한 번 부딪친 전적이 있다.
살수들을 납득시키기도 쉬울 테고, 과도한 흡수로 유럽과 같은 혼란을 겪고 있는 중국을 하나로 결집시킬 계기도 될 테니, 일석이조였다.
“그 뒤에는 제가 정식으로 국가주석의 자리에 오를 겁니다. 막주만 없어진다면, 당원 대부분이 저를 지지할 겁니다.”
제갈민은 스스로 국가주석에 오르기 위한 준비도 끝마친 상태였다.
현 권련의 정점이니, 그들의 마음을 얻는 일은 어렵지 않았고, 중국당원들도 폭군에 가까운 여문휘보다는 적당히 타협할 줄 아는 제갈민을 내심 반기고 있었다.
“살수들, 그리고 무풍대는 어떻게 할 셈이지?”
외부로 시선을 돌리고, 국가주석에 오른다 해도, 아직 부족했다.
살막이 살수들의 집단이라고는 해도, 근본적으로 무를 추구하는 단체다.
여문휘가 살막을 이 자리까지 이끌 수 있었던 것도 스스로의 경지가 화경에 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제갈민의 무위로는 살막의 막주가 될 수 없었다.
그리고 막주가 되지 못한 국가주석은 허울뿐인 자리였다.
제갈민은 살수와 무풍대에 대한 통제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
어떤 이라도, 자신보다 약한 이에게 고개 숙이기를 원하지는 않을 테니.
대부분이 독립하거나, 자신의 이상에 맞는 곳으로 대거 이탈할 가능성이 높았다.
한 명 한 명이 최소 S급인 수백의 살수들.
중국은 물론이고, 주변국까지 때 아닌 혼란을 맞이할게 될 수도 있었다.
“원래 권왕에게 맡기려 했지만 뭐,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해결해야 하는 법이지요. 혈검과 독괴에 대해서는 알고 계실 겁니다. 둘 다 초절정의 극에 닿아있는 고수들이죠. 그 둘이라면, 최대 걸림돌이 될 수도 있었던 무풍대주도 사라졌으니,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혈검과 독괴.
제갈민의 말대로 그 둘이면, 조금 부족하긴 하더라도 여문휘의 공백을 메울 수 있다.
그 둘을 어떻게 회유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권왕까지 염두 해뒀던 것으로 보아, 제갈민이 꽤나 오랜 시간 동안 이 일을 준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둘을 회유할 준비는 충분히 되어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내가 없었더라도 제갈민은 언제고 여문휘에게 반기를 들었을 지도 몰랐다.
“어떻습니까?”
모든 말을 끝마친 제갈민이 나를 보며 물었다.
탐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눈이었다.
나는 제갈민과 같은 눈을 가진 자들을 그리 싫어하지 않았다.
자신의 욕망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것이 속내를 애써 감추려고 하는 자들보다야 나았다.
물론,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않던, 역모의 대상인 여문휘와 확실한 적인 내 앞이기에 보일 수 있는 모습이었다.
“여문휘는 어디 있지?”
이 것으로 내 대답은 충분했다.
사실, 여문휘의 죽음 뒤에 발생한 일들은 내 알바 아니다.
그 불똥이 한국에까지 튀게 되지 않을까, 조금 걱정했을 뿐이다.
또한 여문휘를 죽이는 것을 시작으로 살막을 무너트릴 생각이긴 했지만 적이 뿔뿔이 흩어져 사방 천지에 숨어버리는 것을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향산에서 폐관에 들어 있습니다.”
제갈민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답했다.
‘향산이라.’
향산은 북경에 서쪽 교외에 위치한 산으로 높지는 않지만 제법 가파른 산이다.
과거 살막도 지구의 향산과 같이 황제가 있는 황도 주변에 본거지를 두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심리를 이용한 것이다.
“폐관? 깨달음이라도 얻었던가.”
다만, 여문휘가 폐관에 들었다는 사실은 조금 놀라웠다.
많은 무인들이 절정, 혹은 초절정의 벽을 깰 때, 폐관수련을 택하고는 한다.
그러나 인외의 경지라 불리는 화경의 경지 이상부터는 폐관이 흔치 않은 일이었다.
화경은 이미 육체의 한계를 한 단계 넘어선 상태다.
때문에 깨달음이라는 계기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단순히 수련만으로는 다음 경지로 나아가기가 쉽지 않다.
물론, 수련만으로 벽을 넘기가 지난하다는 거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화경의 경지에 오른 이들은 하나 같이 문파의 문주거나, 단체의 수장.
폐관이라는 기약 없는 선택을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물론, 깨달음을 얻고, 이를 정리하기 위한 폐관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나 여문휘의 행방이 묘연해진지도 수 달.
단순히 깨달음을 정리하기 위한 폐관으로 보기에는 그 기간이 너무 길었다.
“말이 폐관이지, 사실은 두려움 때문입니다. 권왕과 얼마 전, 마주했던 타이탄의 수장, 요한. 그리고 무영살 당신까지. 예상치 못한 강자들이 튀어나오면서 다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생긴 것이지요.”
여문휘가 깨달음을 얻고 폐관에 든 것은 사실이었지만 제갈민은 이를 숨겼다.
과거, 태빈이 여문휘의 암살에 성공했다고는 하나, 여문휘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실을 알면, 발을 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 곧이곧대로 모든 것을 말해줄 이유가 없었다.
이 사실을 몰라 태빈이 암살에 실패한다 하더라도 자신은 지금의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고, 성공한다면, 자신은 여문휘와 이룩한 것들을 독차지 할 수 있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제갈민의 입장에서는 손해가 아니었다.
물론, 제갈민은 가능하다면 둘 모두 죽기를 바랐다.
누군가 한 사람이 살아남는다면, 후환이 남는다.
그렇기에 승패가 어찌됐든, 여문휘와 태빈이 양패구상에 가까운 피해를 입는 것이 최상의 결과다.
나머지는 혈검과 독괴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화경의 고수라고 하나, 서로 맞붙고 나면, 한 쪽도 멀쩡하지는 않을 터.
초절정의 극에 이른 고수 둘이면,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두려움이라.”
“한 번 죽어본 자만이 알 수 있는 감정이지요.”
“그런가.”
나 또한 죽어봤다.
허나, 나는 두려움보다는 분노가 더 컸다.
만약 문주가 이 세계에 있었다면, 나는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를 죽이고자 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를 향한 여문휘의 분노를 이해했고,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음을 알기에 먼저 손을 쓰려는 것이다.
그런데, 두려움 때문에 숨어있다니.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지만 실망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다시 오지.”
말과 함께 제갈민에게 살기를 한 번 쏘아 보냈다.
살기가 자신을 옥죄자, 제갈민의 안색이 파리해졌고, 전신이 땀으로 흥건해졌다.
허튼 수작 부리지 말라는 경고였다.
물론, 경고가 통하지 않을 거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이 정도 살기에 굴복할 자였다면, 여문휘에게 반기를 들 생각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제갈민은 내가 현경의 경지에 올랐다는 사실을 모르니, 양패구상을 노리거나, 뒤통수를 칠거라는 것쯤은 예상하고 있었다.
물론, 그 생각을 후회하게 되겠지만.
“그럼. 무운을 빕니다.”
속내를 숨긴 제갈민이 나를 향해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대도.”
나 또한 설핏 미소를 지으며 뚫고 내려왔던 지붕 위로 몸을 날렸다.
‘조금 지켜볼까.’
곧장 관저를 떠난 것은 아니었다.
제갈민의 흉계를 파악하기 위해 그를 조금 더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철저한 자인만큼, 빈틈을 찾기는 어렵겠지만 수 개월간 폐관에 들어 있던 여문휘가 하루아침에 폐관을 깨고 나올 가능성은 낮다.
시간은 충분했다.
***
내가 떠나고,
“쯧.”
제갈민은 다시 시선 속에 들어온 무풍대주의 시체에 혀를 찼다.
반기를 드는데, 최대의 걸림돌이 될 수도 있었지만 반대로 회유만 했다면, 좋은 장기 말이 됐을 인재였다.
뭐, 이미 지나간 일을 돌이킬 수는 없으니.
제갈민은 시체로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고,
푹푹푹.
어느새 꺼내든 검으로 무풍대주의 시체를 찔렀다.
날붙이로 고기 찌르는 소리가 몇 차례 이어졌다.
“큭...”
제갈민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몸에도 몇 개의 상처를 만들어 냈다.
허벅지와 허리.
과거라면, 치명상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꽤나 깊은 상처였지만 이 세계에서는 금방 치료할 수 있었다.
오랜 시간 군사의 자리에 있으면서 느껴보지 못한 지독한 고통이 들긴 했지만.
“습격이다!”
와장창!
이어 제갈민은 외침과 동시에 창문을 깨트렸다.
밖에서 대기하던 헌터들이 다급히 쏟아져 들어왔지만 그들이 볼 수 있는 건, 이미 싸늘하게 식어있는 무풍대주의 시체와 부상을 입고 쓰러진 제갈민뿐이었다.
“군사!”
“대주님이...”
“대체 무슨 일입니까?”
“어찌 그리 짧은 시간에...”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헌터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심각한 부상을 입은 제갈민을 놔두고 습격자를 쫓을 수 없을뿐더러, 쫓는다 해도 무풍대주를 죽인 습격자를 자신들만으로 어찌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뭣들 하느냐! 당장 힐러 부르고, 혈검과 독괴에게 소식을 전해라.”
“예!”
제갈민이 명령을 내린 뒤에야, 헌터들이 멍청하게 굳어있던 몸을 움직였다.
습격자가 다시 올 수도 있는 만큼, 제갈민을 지키며 무전을 통해 연락을 취해 힐러를 부르고, 혈검과 독괴에게 소식을 전했다.
어느 누구도 습격자가 한참 전에 떠났고, 지금의 광경은 제갈민이 꾸며낸 것이라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다.
“크윽. 무풍대주가 아니었으면, 나도 목숨을 보존치 못했을 거요.”
제갈민은 뒤늦게 소식을 듣고 달려온 혈검과 독괴에게 대강의 상황을 설명했다.
암살 시도가 있었고, 무풍대주가 아니었다면, 자신이 죽었을 거라는 내용이었다.
“타이탄이 아닐까 싶소.”
“타이탄에 무풍대주를 어찌 할 수 있을 정도의 강자가 있단 말이오?”
제갈민은 당연히 내 존재를 숨겼고, 혈검이 의문을 표했다.
무풍대주는 자신보다 못하긴 하지만 SS급 이상의 고수.
이 세계에 그를 상대할 수 있는 이는 손에 꼽았다.
밖의 호위들이 눈치 채지 못할 만큼, 짧은 시간에 처리하기란 더더욱 어렵고.
“타이탄의 교주가 직접 움직인 게 아닌가 싶소.”
“흐음...”
혈검이 침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얘기는 들었다.
타이탄에 막주인 여문휘조차 패퇴할 수밖에 없었던 요한이라는 강자가 있다고.
그가 직접 움직였다면, 무풍대주만으로는 막아낼 수 없었던 것도 이해가 됐다.
그러나 의문은 남았다.
무풍대주를 죽인 자가 고작 절정에 불과한 제갈민을 죽이지 못했다?
아무리 호위들이 들이닥쳤다 해도 이상한 일이다.
“운이 좋았소. 내가 막주의 군사라는 사실을 모르는 듯했소. 고작 S급 하나 정도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거 아니겠소. 그보다 놈이 막주를 노릴 수도 있으니, 두 분은 어서 향산으로 가주시오.”
제갈민은 혈검과 독괴의 의심이 깊어지기 전에 곧장 막주의 위험을 알렸다.
아직 둘의 충성의 대상은 막주다.
둘은 회유하는 것은 여문휘가 죽고 난 뒤의 일이었다.
“알겠소.”
“그러지.”
혈검과 독괴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군사의 안위보다는 막주가 중했다.
“후후.”
다급히 떠나는 혈검과 독괴를 보며 제갈민이 비릿한 미소를 지어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