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
119화. 중국행(4).
“공위. 물러나게. 자네가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네.”
S급 헌터의 뒤편.
한 중년인이 문을 열고 걸어 나왔다.
모든 이가 우러러보는 위치에서 절대강자로 살아온 S급 헌터는 중년인의 말에 자존심이 상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중년인의 뜻을 어기지는 않았다.
S급 헌터는 무기를 거두고 한 발 물러나며 더 이상 싸울 의지가 없음을 보였다.
“네가 흑사회의 보슨가.”
나 또한 상대가 적대적으로 나오지 않는다면, 무턱대고 살수를 쓸 생각은 없었다.
이미 싸늘하게 식은 열은 내게 무기를 겨눴기에 죽였을 뿐.
나는 S급 헌터를 향해있던 검을 아래로 늘어뜨렸고, 채 마르지 않은 피가 검신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렸다.
“그렇소. 허진이라 하오. 그대는 김태빈 헌터가 맞소? 흠... 그대인줄 알았다면 먼저 나와서 맞이했을 것을. 안타까운 생명이 덧없이 져버렸구려.”
흑사회 보스, 허진은 열 구의 시체를 보며 슬쩍 고개를 저었다.
생명에 대한 안타까움이 아닌, 아끼던 도구가 망가졌을 때의 아쉬움이 깃든 눈빛이었다.
B급 하나는 그렇다 쳐도, A급 헌터 아홉은 전 중국을 아우르는 범죄조직의 수장이라 해도, 분
명 아까운 전력이었으니.
“...”
“얼마 전, 제갈민 대행이 직접 나를 찾아와 명령 하나를 내렸소. 샤오화라는 여인을 미행하고 접촉해오는 이가 있다면, 능력을 파악해 자신들에게 알리라고 하더이다. 김태빈이라는 헌터를 찾고 있다고.
A급 헌터 아홉을 이토록 짧은 시간에 처리할 수 있는 강자가, 흔치는 않을 테니 그대가 정부가 찾고 있는 이가 맞는 듯 하오만,..”
시체에서 시선을 돌린 허진이 말을 이었다.
이미 앞서의 말로 나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고, 확신하고 있는 눈치였지만 확인 차 던져본 질문인 듯했다.
“맞다면 어떻게 할 건가?”
“알릴 것이오. 세간에는 나를 중국의 황제라 부르기도 하지만, 다 헛소리에 불과하오. 음지에서 세를 조금 불렸다고 하나, 고작 이 정도로는 현 중국 정부의 뜻을 거스를 순 없으니...
허나, 그대의 뜻도 거스르고 싶진 않구려.”
전 중국의 음지를 아우르는 흑사회의 보스 자리를 허투루 따낸 것은 아닌지, 한 눈에 태빈이 항거할 수 없는 강자라는 사실을 눈치 챘다.
여전히 옆자리에 어정쩡한 자세로 서있는 공위라고 불린 S급 헌터와는 사뭇 다른 반응이었다.
“그대는 나를, 그리고 흑사회를 어떻게 할 생각이오?”
“음...”
이은수에게 정체불명의 미행이 붙었다는 사실에, 그 이유를 알고자 흑사회를 찾았다.
범죄조직이라는 말에 어느 정도의 마찰을 예상했다.
그 예상은 어김이 없었고, 열을 죽였다.
그러나 이유를 알고 난 뒤의 일은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다.
고작 범죄조직 따위에 나에게 위해를 가할 존재가 있을 거라 생각지 않았으니, 딱히 계획을 세울 필요가 없었다.
“하루 뒤에 알리는 것으로 하면 어떻겠소?”
“하루 뒤?”
“나는 정부도, 그대에게도 거스르고 싶지 않소. 고래싸움에 괜히 새우등 터지고 싶지 않으니.
하루 정도 늦어졌다 해서 정부의 명령을 어겼다 할 수는 없을 것이오. 정보가 전해지고, 그 진위를 확인하는데 필요한 시간이 있으니.
그리고 그대도 하루 정도면 무언가를 준비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라고 생각하오.”
내가 그들의 처우에 대해 생각에 잠겨 있자, 허진이 먼저 제안을 해왔다.
확실히 그는 괜한 일에 끼고 싶지 않은 듯했다.
“그 전에 하나 묻지. 제갈민이 나를 찾는 이유를 알고 있나?”
“미안하지만 그것은 나도 모르오. 다만, 내 보잘 것 없는 안목에 적의는 보이지 않았던 것 같소.”
허진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뒤에 붙은 말은 꽤나 중요했다.
제갈민뿐만 아니라, 살막의 살수들에게 나는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원수다.
비록 환생? 비슷하게 무림의 기억을 가지고 지구에서 새 삶을 살게 됐지만 하나 같이 나로 인해 죽음을 맞이한 이들이니까.
그런데, 적의가 보이지 않았다?
허진의 말을 믿을 수는 없지만 거짓이 아니라면, 제갈민은 정말 나에게 적의가 없을 지도 모른다.
한 눈에 내가 자신과 흑사회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아봤다는 것으로 허진은 자신의 안목이 낮지 않음을 증명하고 있었으니.
A급 헌터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직접 보고도 상황파악을 하지 못하던 공위에 비하면 확실히 믿을만한 눈이었다.
물론 그의 말이 사실일 때의 얘기지만.
“그렇게 하지.”
나는 허진의 제안을 수락했다.
허진을 신뢰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당장 내가 떠나는 순간, 제갈민에게 내 존재를 고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를 죽인다 해도, 제갈민에게 소식이 전해지기까지 벌 수 있는 시간은 고작해야 한두 시간.
당장 알려지나 한두 시간 뒤에 알려지나 큰 차이가 없다.
그 보다는 오히려 허진이 제안한 하루의 시간에 모험을 걸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럼 내일 정오에 알리는 것으로 하겠소. 살펴가시오.”
원하는 대답을 모두 들은 나는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렸고, 뒤에서 허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지는 목소리 또한.
“공위. 미안하네.”
허진은 자신의 호위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공위의 등을 찔러 살인멸구(殺人滅口)함으로써 나와의 거래에 대해 아는 존재를 다 한 명도 남기지 않았다.
확실히 내 앞에서는 사람 좋은 중년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범죄조직의 수장다운 결단력과 잔혹함이었다.
***
“당신...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다시 호텔 로비로 내려오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이은수가 말했다.
정보를 다루면서 소문은 부풀려지기 마련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믿지 않았다.
그러나 직접 확인한 태빈은 A급 헌터 아홉을 눈 깜짝할 새에 처리하며 자신의 실력을 선보였고, 흑사회의 보스를 포함한 S급 헌터 둘이 두려움을 느낄 정도의 존재였다.
이은수는 뒤늦게 소문이 사실이었음을 깨달았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죠?”
“제갈민을 만나러 갈 겁니다.”
“대행을요?!”
이은수의 눈이 커졌다.
제갈민의 현재 위치는 국가주석의 대행.
아무나 만날 수 있는 자리도 아니거니와, 설사 만날 수 있다 하더라도 눈앞의 사내가 정식절차를 거쳐 그를 만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행여 허진을 만날 때와 같은 방법을 택할까, 이은수의 눈에 벌써부터 두려움이 서렸다.
“그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알고는 있지만...”
이은수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과연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태빈에게 말해도 될까 고민스러웠다.
동시에 이런 시한폭탄과 같은 사내를 보낸 김원철과 유인원이 원망스러워졌다.
태빈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아득히 넘어선 존재였다.
“제갈민은 지금 중난하이의 국가주석 관저에 있어요. 하지만 조만간 캄보디아로 갈 거예요. 국가를 흡수하고 나면, 그 국가에 꼭 한 번씩은 들려보고 있거든요. 어제 합병 소식이 전해졌으니, 적어도 이삼일 내에 움직일 거예요.”
결국 그녀는 협회 소속.
그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지만 이은수는 결국 태빈에게 제갈민의 위치를 알려줄 수밖에 없었다.
사실, 태빈에 대한 약간의 두려움도 있었다.
자신에게는 시종일관 예의를 잃지 않고 있었지만 언제 흑사회의 헌터들을 학살할 때와 같은 야차의 모습으로 변할지 알 수 없으니.
이은수가 본 태빈은 감정이라고는 일체 느껴지지 않는 살인기계와 같았다.
그러니, 차라리 태빈이 필요한 정보를 얻고 떠나가기를 내심 바라기도 했다.
“이삼일이라...”
내가 작게 중얼거렸다.
이삼일이면 시간은 충분했다.
어차피 허진이 내게 제안한 시간은 하루.
나는 그 안에 제갈민을 만나볼 생각이었다.
“갑시다.”
“예?!”
자신이 거길 왜 가냐는 듯, 이은수의 눈이 다시 한 번 커졌다.
흑사회의 보스와 중국의 국가주석 대행을 만나는 일은 차원이 다르다.
둘 다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하다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제갈민의 위험성에 비하면, 허진은 그저 동네 건달과 동급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관저까지만 안내해주시면 됩니다. 제갈민은 혼자 만나볼 테니.”
내가 덧붙였다.
나 또한 이은수가 무엇 때문에 이리 놀라고, 주저하는지 알고 있었다.
아무리 명령이라고 해도 자신의 목숨이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흑사회 때야, 스스로 A급 헌터이니, 충분히 자신의 몸 정도는 빼낼 수 있다 생각했겠지만 국가주석의 관전에서는 요행으로라도 불가능할 테니.
“예...”
이은수가 결국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힘들게 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모습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와 같았다.
***
중난하이의 경비는 삼엄했지만 외곽은 A급 헌터도 무난히 뚫어낼 수 있는 수준이었다.
나는 말할 것도 없고.
그 덕에 나와 이은수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관저를 지켜보며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저기가 대행이 있는 관저에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집무실에 있을 거예요. 혹, 집무실에 없다면, 회의실에 있을 가능성이 높아요. 그것도 아니라면 저도 모르고요.
제갈민의 곁에는 S급 헌터 둘이 교대로 24시간 경호 중이고, 이번에 새롭게 창설된 무풍대의 대주와 대원들도 호위를 맡고 있다고 들었어요.
호위를 맡은 무풍대의 전력은 아직 정확히 드러난 바가 없어요. 일전에 타이탄과의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는 하지만 소문이 너무 허황돼서... 믿을 게 못돼요.
대주가 SS급, 대원 전원이 S급이거나, 그에 근접해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죠. 어쨌든, 제가 알려드릴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예요.”
이은수는 무풍대에 대해 말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것으로 말을 마쳤다.
이은수가 고개를 저었지만 나는 무풍대의 전력이 소문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SS급 초절정. S급은 절정.
오백 전원이 절정이라 해도, 무림일통을 목적으로 키워낸 무력집단이라면, 결코 과하지 않다.
이 세계에서야 믿기 힘들 정도로 강력한 집단일 수 있지만 오히려 무림이라면, 무림일통을 꿈꾸기에는 한 없이 부족한 전력이다.
하긴, 고작 오 년의 시간밖에 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시간에 비해 훌륭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무림에서도 보통 무풍대와 같은 무력집단을 하나 만들려면, 적어도 이십 년은 걸린다.
이미 각성한 헌터들을 이용했겠지만 그러한 집단을 오 년 만에 키워냈다는 것은 대단하다 할만 했다.
“감사했습니다.”
“예...뭐... 무사하시길 바라요.”
내가 포권을 취해보이자, 이은수가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그녀와 함께 할 수 없었다.
설령, 그녀가 생각을 바꿔 함께 한다 해도 이제는 내가 반대다.
아직 관저까지는 거리가 좀 있음에도 확실히 절정 이상의 무인들이 득실득실한 게 느껴졌다.
고작 일류. A급에 불과한 이은수는 관저에 도착하기도 전에 발각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나는 곧장 제갈민이 있는 관저를 향해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