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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살수다-117화 (117/150)

# 117

117화. 중국행(2).

거리가 먼 탓에 육지의 형상이 안개가 낀 것 마냥 흐릿하게 보였다.

나는 내 디딤돌이 되어주고 있는 크라켄 다리에서 내려와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어차피 육지가 보일 때쯤부터 수영을 해서 갈 생각이었기 때문에 고무보트가 망가진 것은 상관이 없었다.

백 번의 살행 대상 중에 장강수로채의 수적이 있었던 덕에, 수적들만큼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헤엄을 칠 줄은 알았다.

장강의 물살보다 바다의 파도가 더 거칠긴 했지만 그 때와는 비교 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해진 신체가 내 부족함을 보완해 주었다.

사실, 수십 킬로미터를 헤엄쳐야 하는 것보다 걱정해야 할 부분은 몬스터였다.

크라켄 때와 같이 고무보트나 놈의 다리에 발을 디딜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수공으로 상대해야 하는데, 내 수공으로는 기껏해야 초절정, 잘해야 화경의 기량밖에 발휘할 수 없다.

물론 그 정도의 기량으로도 웬만한 몬스터는 가볍게 요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해양 몬스터에 대해서는 밝혀진 게 거의 없는 만큼, 조심하는 편이 나았다.

다행히 내가 계속해서 살기를 내뿜고 있기도 했고. 이 주변은 방금 전 크라켄의 영역이었는지, 몬스터의 존재는 느껴지지 않았다.

멋모르는 물고기 떼만이 죽은 크라켄 몸뚱이를 뜯어먹기 위해 수면 아래를 유영하고 있을 뿐이었다.

걱정은 잠시 접어두고 나는 빠르게 물살을 가르며 나아갔다.

몬스터가 나타나면, 내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어차피 하나다.

맞서는 것.

바다 한가운데에서 놈들에게 도망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에 대한 걱정은 무의미했다.

“후우... 후우...”

크라켄을 제외하면 나는 아무런 사고 없이 육지에 닿았다.

어선을 타고 세 시간. 보트와 헤엄을 쳐 나머지 반을 건너오는데, 열 시간.

총 열세시간 가까이 걸렸다.

중간에 크라켄과의 전투도 있었고, 몇 시간 동안 쉬지 않고 헤엄을 쳐왔으니, 지칠 법도 했지만 나는 호흡을 몇 번 고르는 것으로 본래의 신색을 회복했다.

현경의 경지에 오른 나에게 크라켄은 몸 풀기 수준도 되지 않았고, 쉬지 않고 친 헤엄도 평소 수련 강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 보다,

투둑. 투둑.

내 얼굴이 뼈가 우그러지는 소리와 함께 변하기 시작했다.

역용술.

계속해서 살행을 나서야 하는 살수들이 필수적으로 익히는 용모를 바뀌는 무공이다.

변화가 끝났을 때,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어느 누구도 이 얼굴을 보면, 나를 떠올리지는 못할 것이다.

옷도 최대한 중국인과 가깝게 느껴지도록 미리 준비해둔 것으로 갈아입었다.

‘다행히 방향이 틀어지진 않았군.’

역용술로 완벽한 중국인의 모습으로 변한 뒤, 핸드폰을 열고 지도를 확인해보니, 예상했던 지점과 2km 남짓 떨어졌을 뿐, 큰 오차는 없었다.

내가 닿은 곳은 중국 산동성 위해시의 어느 바닷가.

크라켄과 싸우고, 육지만 보고 움직인 탓에 조금 걱정했는데, 지금까지는 계획대로 순조로웠다.

이제 북경으로 가, 제갈민을 사로잡아 여문휘의 행방을 캐고, 그의 목을 따는 일만 남았다.

‘일단 북경으로.’

준비를 끝마친 나는 곧장 경공을 펼쳤다.

교통수단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지만 중국은 한국과 다르게 일부지역의 교통로가 미처 처리되지 못한 몬스터 등으로 인해 원활하지 않은 상태다.

검문검색이 철저한 비행기를 이용할 수는 없으니, 내가 이용할 수 있는 건 버스와 택시 정도가 전부.

그러나 내가 마음먹고 펼치는 경공의 속도는 버스와 택시에 비할 바가 아니다.

게다가 이른 아침부터 출발한 덕에 지금은 저녁이 되었다.

사람의 시선을 피해야 한다는 번거로움이 있긴 하지만 달빛만이 희미하게 비춘 하늘 밑에서 마음먹고 경공을 펼치는 내 신형을 육안으로 살필 수 있는 이는 없었다.

***

부지런히 경공을 펼친 덕에 나는 고작 세 시간 만에 북경의 외곽 지역에 도착했다.

저녁을 지나 새벽 대에 접어들었음에도 멀지 않은 곳에서 도시가 만들어내는 빛이 눈에 들어왔다.

그 때부터 나는 속도를 늦춰 자연스럽게 걸으며,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스며들었다.

“실례합니다.”

깊은 밤이라 눈에 띄는 사람은 별로 없었지만 나는 지나가는 사내 하나를 불러 세웠다.

내 입에서는 자연스러운 중국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애초에 무림의 언어가 중국어와 유사했기 때문에 배우는 것은 어렵지 않았고, 배운 뒤에도 원어민과 똑같을 정도로 언어를 구사하는 게 가능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술에 조금 취한 듯, 얼굴이 불콰하게 달아오른 사내는 처음에는 나를 무시하려 했지만 힐끗거린 시선 속에 내 허리춤의 검을 보고는 발길을 멈춰 세웠다.

사내의 눈에 경계심이 떠올랐지만 외국인에 대한 경계는 아니었다.

헌터에 대한 두려움이 뒤섞인 눈빛이었다.

“근처에 하룻밤 묵을 만한 곳이 있습니까?”

한국에서 북경까지 오는데, 거의 하루.

날도 완전히 저물었고, 하루 종일 강행군을 해왔기에 피로를 풀 곳이 필요했다.

인근에서 노숙을 할 수도 있었지만 돈이 없는 것도 아니다.

편한 잠자리를 놔두고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여기서... 오 분만 걸어가면, 괜찮은 호텔이 있습니다. 가격이 좀 비싸긴 하지만 그대로 가다보면, 헌터분들이 애용하는 조금 저렴한 호텔도 몇 개 있고요.”

사내는 자신에게 시비를 거려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는 설명을 이어갔다.

처음 두려워하는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친절함까지 보이며 오 분 거리에 호텔이 있고, 혹시 모른다며 외지의 헌터들이 자주 이용하는 몇 곳을 더 알려주기까지 했다.

“감사합니다.”

“그 쪽도 협회에 가시는가 봐요? 요즘 헌터들이 북경으로 모인다던데, 참말이었는가 보네.”

사내의 도움으로 호텔 위치를 파악한 내가 가볍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이제 완전히 긴장이 풀렸는지, 사내가 편안 얼굴로 질문을 던지고는 중얼거렸다.

“아뇨. 저는 개인적인 일로. 그런데, 헌터들이 북경으로 모인다니, 무슨 말이죠?”

“엥? 헌터라면서 그것도 모르세요? 북경 협회에서 재능 있는 헌터들에게 무공을 가르친다고 하던데. 그 있잖아요. 무협지에서 나오는 산을 부수고, 바다를 가르는. 나는 헌터 길래 그 쪽도 그런 줄 알았죠.”

“아, 제가 세상 돌아가는데 좀 관심이 없어서. 그런 대단한 걸 배울 수 있다니, 저도 협회에 한 번 가봐야겠네요. 좋은 정보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중국, 아니 살막이 헌터들을 모아 무공을 가르치기 시작했다는 것은 확실히 내가 고개를 숙일 만큼 좋은 정보였다.

한국은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정보이기도 했고, 살막이 지금까지는 다른 행보를 보인다는 얘기였으니까.

“아유, 당신 같은 헌터들에게는 내가 더 고맙지.”

다시 한 번 감사 인사를 전하는 내게 사내가 손사래를 쳐보였다.

‘당신 같은’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사내가 처음 경계의 기색을 보였던 것은 아마 제 힘에 취해 제멋대로 하는 헌터들을 향한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그럼.”

사내와 헤어진 나는 곧바로 호텔에 방을 잡고 짐을 풀었다.

호텔 직원도 중국인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경계하는 눈빛을 보냈지만 예를 잃지않는 내 모습에 친절하게 다가왔다.

그 외에는 의심도 전혀 하지 않았다.

능숙한 중국어에 길에서 만난 사내와 같이 그저 외지에서 온 헌터로 인식할 뿐이었다.

***

내가 잡은 호텔은 확실히 헌터들이 이용하는 근처의 호텔보다 값이 비싼 만큼, 시설은 훌륭했다.

푹신한 침대와 푸근한 이불은 거친 바다와 하룻밤의 경공으로 쌓인 여독을 풀어내기에 충분했다.

새벽부터 운기조식까지 하고나니, 몸 상태는 최상이었다.

암습이라면 백이면 백, 정면대결로도 여문휘 정도는 십초 내에 죽일 수 있다 자신할 정도로.

그러나 나는 곧장 제갈민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중난하이가 아닌, 북경 외곽에 그대로 머물렀다.

만날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9시. xx카페.’

나는 약속된 장소인 호텔 인근에 있는 xx카페에서 커피를 시키고 중국 신문을 펼쳤다.

약속된 시간은 아직 이십 분가량이 남아있었고, 신문은 급변하는 중국의 동향을 살피기 좋은 매체였다.

내가 집어든 신문 1면에는 어제부로 캄보디아가 중국과 한 나라가 되었다는 내용이 실려 있었다.

캄보디아의 흡수가 중국에 가져올 이익과 늘어난 헌터 전력 등.

“왕진씨?”

한참 신문을 읽고 있는 와중에 한 여인이 나에게 다가왔다.

카페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기척을 통해 A급 헌터라는 사실을 느꼈기에 주시하던 여인이었다.

헌터들이 주로 묵는 호텔이 근처에 있다 해도, A급 헌터는 흔히 볼 수 없는 수준의 헌터가 아니었다.

끄덕.

왕진은 중국에서 활동하는 동안, 내가 사용할 이름이다.

어디에 살막의 눈과 귀가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김태빈이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는 없으니.

“반가워요. 샤오화라고 해요.”

자신을 샤오화라 밝힌 여인이 가벼운 인사와 함께 내 맞은편에 앉았다.

처음 이름을 물어보고, 자신의 이름을 밝히며 앉는 모습은 마치 남녀가 첫 만남을 가지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샤오화의 본명은 이은수.

중국에서 활동하는 협회 소속 정보원들의 총책임자였다.

“친구 분에게 얘기는 들었어요.”

이은수는 ‘협회’등의 단어는 일체 언급하지 않고 짤막하게 뜻을 전했다.

한국에서도 정보를 전해 듣긴 했지만 현지의 것과는 다르다.

자세한 정보보다는 중요한 정보를 축약해 확인했을 뿐이다.

때문에 김원철에게 현지에서 활동하는 헌터를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고, 그게 이은수였다.

“아침 안 드셨으면 나가서 아침이라도 같이 하실래요? 제가 잘 아는 곳이 있는데.”

주변을 스윽 둘러보며 하는 이은수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에 눈과 귀가 많으니, 일단 자리부터 옮기자는 의미였다.

***

호텔 카페에서 나온 이은수는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이은수는 대로변을 걷기도 하고, 좁은 골목을 이리저리 헤매다 다시 돌아 나오기도 했다.

그 행동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었기에 나는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요즘 미행이 붙었어요. 이해 좀 해주세요.”

골목에서 사방을 살피던 이은수가 주변이 조용하단 걸 확인하고는 말했다.

“어느 쪽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저희와 같은 정보조직인 것 같아요. 뭐 수준이 그렇게 높지는 않은 덕분에 매번 이런 식으로 따돌리긴 하지만요.”

이은수는 미행을 따돌렸다는 생각에 안심하고 듯했다.

그러나 그녀가 미처 감지하지 못한 시선 하나가 남아있었다.

카페에서 우리에게 따라붙은 것은 셋.

둘은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만으로 떨쳐냈지만 한 명은 아니었다.

여전히 몸을 숨긴 채, 나와 이은수를 뒤따르고 있었다.

수준은 이은수와 같은 A급 헌터.

“잠시.”

이은수가 대답하기 전에 내 신형이 잠깐 흔들린다 싶더니, 금세 제 자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다시 나타난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컥...커억...”

내 손에는 목을 붙잡힌 사내 하나가 신음을 토하고 있었다.

“아는 자입니까?”

절레절레.

내 물음에 이은수는 눈을 똥그랗게 뜬 채로 고개를 저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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