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
113화. 아길라(4).
털썩.
포권을 취해 예를 갖추는 것으로 대련을 마무리하는 내 앞에 아길라가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그 의미를 알 수 없기에 나는 아길라의 행동을 그저 바라봤다.
“아길라 헌터!”
“아길라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나보다는 박동석과 로한이 더 놀랐다.
특히, 로한에게 아길라는 하늘과 같은 존재.
천하의 아길라가 누군가에게 무릎을 꿇다니.
대련에 패배했다고 하나,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아길라가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마나 제어법을 통해 한 걸음 나아갔다.
막혀있던 벽 너머를 어렴풋이 느꼈다.
그러나 그 벽을 넘어서진 못했다.
어렴풋이 느낀 벽은 막연하던 벽보다 더 높고 단단했다.
좌절하고 무너지지 않은 게 다행이라 여겨질 정도로.
그런데, 눈앞에 그 벽 너머에 서있는 사내가 나타났다.
벽을 허물 수 있다면 무릎을 꿇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당장 생각나는 말도 없었다.
강함을 추구하기 위해 국적마저 버릴 수 있는 사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나에게 가르침을 청해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SS급 헌터라면, 상대하지 못할 몬스터가 손에 꼽고, 대적할 자도 몇 없을 겁니다. 헌데, 어찌하여 그리 강함에 집착하는 겁니까?”
아길라와 내 눈이 마주쳤다.
아길라의 눈은 간절함을 담고 있었다.
SS급 헌터만 하더라도 세상에 적수를 찾기 힘들 정도의 강자다.
문득, 아길라와 같은 강자가 강해지고자 하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그의 눈은 단지 강해지고 싶어 하는 자의 눈이 아니었다.
“복수. 복수해야 할 상대가 있습니다.”
아길라는 복수라는 단어를 곱씹으며 까드득 이를 갈았다.
“복수?”
“예,”
SS급 헌터가 가진 힘으로도 복수할 수 없는 상대라.
“마룡, 체르노보그를 죽이기 위해선 지금보다 강대한 힘이 필요합니다.”
내가 묻기도 전에 아길라가 먼저 설명을 시작했다.
아길라는 러시아 극동 지구의 사하 공화국 최북단의 작은 마을에 살고 있었다.
그 마을이 러시아의 재앙인 마룡, 체르노보그에게 사라지기 전까지.
마룡의 등장에 러시아는 아길라의 마을뿐만 아니라, 사하 공화국 절반을 잃었다.
아니, 마룡이 다른 지역을 더 노렸다면 러시아 자체가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사하 공화국 절반을 폐허로 만든 마룡이 중간에 똬리를 틀고 진격을 멈췄기에 피해가 마무리 된 것이다.
마룡에 의해 광활한 영토를 잃었음에도 러시아는 잃어버린 땅을 수복하려 하지 않았다.
진격을 멈춘 마룡의 행보를 다행이라 여기며 남은 땅을 지키고자 했을 뿐.
헌터들도 마찬가지였다.
항거할 수 없는 힘을 가진 마룡을 쓰러트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겼다.
마룡을 죽이고자 하는 이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아길라는 그 극소수의 헌터들 중 하나였다.
가족을 잃고, 친우를 잃은 아길라는 그와 같이 복수를 꿈꾸는 헌터를 모았고, 마룡에 맞섰다.
그러나 SS급 헌터인 아길라의 힘도 마룡에게는 닿지 못했다.
마룡은 아길라의 불을 집어 삼켰고, 그와 함께한 수많은 헌터의 생명을 꺼트렸다.
아길라와 스무 명의 헌터만이 마룡과의 싸움에서 살아남았다.
그 스무 명의 헌터가 지금의 팀원들이었다.
아길라와 스무 명의 헌터들은 복수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만으로는 마룡을 상대할 수 없었기에 더욱 강해지고자, 러시아를 등지고 미국으로 향했다.
은연중에 행해지는 실험.
그 실험이 자신과 팀원들을 강해지게 해 줄 거라 믿었다.
그렇게 미국에서 보낸 시간은 삼 년.
몬스터와 죽은 헌터들의 시신을 가지고 갖가지 실험이 행해졌지만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다.
아길라 또한 서서히 복수를 잊고 안락함에 젖어가던 때였다.
그 때, 마나 제어법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한국의 마나 제어법을 익히면 더 강해질 수 있다는.
아길라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일년. 아니 반년만 지났다면, 복수를 포기했을 지도 모르겠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그렇게 한국에 와서 마나 제어법을 익혔고, 확실히 이전보다 강해졌다.
그러나 아직도 마룡을 이겨 낼 수 있다는 자신이 들지 않았다.
아길라의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는 마룡은 수백 헌터의 생명을 집어삼킨 재앙 그 자체였으니까.
“음...”
꽤나 길었던 아길라의 설명이 끝났다.
사정은 대충 이해했다.
내가 마주했던 드래곤은 혈귀와 비슷한 수준.
아니, 일전에 수백 헌터와 힘을 합치고도 실패한 것으로 보아, 기존의 드래곤보다 강한 개체라고 보는 게 옳다.
그렇다면, 확실히 SS급 헌터에게는 벅찬 상대다.
마나 제어법으로 한층 성장했다 하더라도 그와 고작 스물의 헌터로는 힘들다.
아니 S급 헌터가 더해졌다는 것을 고려하면, 충분히 해볼 만한 싸움이지만 절반의 죽음은 감수해야 했다.
“아길라 헌터와 저는 걷는 길이 다릅니다.”
사정을 이해했다 해도, 그를 가르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무인과 마법사.
걷고 있는 길이 다르다.
만류귀종이라 하니, 그 끝은 같을지 모르나, 무인인 나는 마법사인 그를 가르칠 방도를 알지 못했다.
“가르침만 주신다면, 평생 충심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러나 아길라는 포기하지 않았다.
마지막 희망을 잡는다는 심정으로 나를 올려봤다.
실제로 그에게 내가 마지막 희망이었다.
이미 미국에서도 안락함에 젖어가고 있지 않았던가.
이쯤하면, 충분하지 않냐고. 이제 그만 네 삶을 살아도 되지 않겠냐고.
하루에도 수백 번씩 이제 그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었다.
그 때마다 눈앞에서 죽어간 사람들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지만 이제 얼굴조차 기억 안 아는 이들이다.
가족조차 흐릿한 지경인데, 이대로 더 시간이 흐른다면, 자신은 복수를 잊을 지도 몰랐다.
“도움이 되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아길라가 내건 대가에 내 마음이 흔들렸다.
아길라 정도의 강자가 내 수하가 된다면, 훗날 살막과의 싸움에 유용할 테니 말이다.
그러나 그를 강해지게 할 수 있다는 확신은 없었다.
초절정과 화경의 경계.
아길라가 강해진 다는 것은 벽을 넘는 다는 뜻이다.
스스로의 깨달음이 필요한 단계이기에 내 가르침이 아길라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상관없습니다.”
아길라가 답했다.
정말 상관없었다.
실제로 강해지고, 강해지지 않고 보다 중요한 것은 복수를 잊지 않는 마음이었다.
***
나는 결국 아길라의 간곡함에 고개를 끄덕였다.
SS급 헌터를 수하로 둘 수 있으니, 결코 손해는 아니다.
그가 벽을 깬다면, 화경의 고수와 같은 마법사가 탄생할 테니 더더욱 이득이다.
물론 실패할 확률이 농후하지만 시도해보지도 않고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그럼 내일부터 오전에 수련장으로 찾아오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내일부터 가르치기로 하고 던전 공략을 마무리했다.
아길라가 제자를 자처하는 탓에 자연히 말을 놓게 됐다.
유희와도 같던 대련이었는데, 졸지에 스무 명의 수하가 생겨버렸다.
아길라가 내 수하를 자처했으니, 그를 따르는 스무 명의 팀원들도 내 밑이 된 것이다.
물론 직접적으로 사제관계를 맺은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아길라의 스승이고, 아길라는 팀원들의 주군이니, 관계가 그리 됐다.
아길라가 로한을 통해 팀원들에게 나를 자신과 같이, 아니 그 보다 윗사람을 대하듯 하라 신신당부하기도 했고.
다음 날,
아길라는 이른 새벽부터 수련장을 찾았다.
오전이라 말하고 정확한 시간을 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전이라 할 만한 시간이 되자, 해가 채 뜨지 않았음에도 부리나케 찾아온 것이다.
강해지고자 함은 무인이나 마법사나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음부터는 여덟시에 보는 걸로 하지.”
“예.”
명상을 위해 밖으로 나오던 차에 도착한 아길라의 모습에 내가 정확한 시간을 정해줬다.
그를 가르치기 위해서 내 수련이 방해 받는 다면, 이는 주객전도다.
아길라도 자신이 너무 이른 시간부터 찾아왔다는 사실을 알기에 군말 없이 수긍했다.
“우선 마법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내가 아길라보다 강자이기는 하나, 마법에 대해서는 아주 기초적인 지식만 있을 뿐, 문외한이나 다름없다.
아길라를 가르치기 위해선 그에 앞서 내가 마법의 체계에 대해 배울 필요가 있었다.
“예. 마법은 마나에 깃든 속성의 힘을 바탕으로 발현되는 힘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법은 마나에 깃든 불, 물, 바람, 땅 등 원소의 속성을 끄집어내는 것으로 시작한다.
한 명의 마법사는 한 개의 속성만을 끄집어 낼 수 있다.
아길라가 화염 마법사 불리는 이유는 마나 속에서 불 속성의 힘을 꺼내 세상에 발현시키기 때문이다.
간혹, 두 개의 속성 마법을 사용하는 마법사도 있었지만 SS급 헌터인 아길라도 그 방법은 알지 못했다.
“마법사의 마나는 심장에 고리 형태를 이뤄 머물러 있습니다. 마법사마다 다른데 제 마나는 일곱 개의 고리를 이루고 있습니다.”
마법을 발현하는 데에는 심장의 마나가 필요하다.
무인이 단전의 내공을 근간으로 한다면, 마법사는 심장에 마나가 힘의 원천인 것이다.
다른 점은 무인이 단전의 크기를 키워 내공의 양을 들려 간다면, 마법사는 고리를 늘림으로써 마나를 늘려간다는 점이다.
SS급인 아길라는 심장에 마나로 된 일곱 개의 고리를, S급 마법사는 여섯 개의 고리를,.. E급은 한 개의 고리를 가지고 있다.
마나량 또한 고리가 늘어날수록 배에 가깝게 늘어 가는데, 일곱 개의 고리를 가지고 있는 아길라는 E급 헌터보다 육십 배가 넘는 마나를 지니고 있는 셈이었다.
물론, 계속해서 내공을 쌓아가는 무인들과 달리, 아길라와 같은 헌터들은 어느 순간 부여 받은 심장의 고리에 담긴 마나를 사용할 수만 있을 뿐, 고리를 늘리거나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대신 심장의 고리에 담긴 마나는 소모한 뒤에 운기를 하지 않더라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천천히 회복된다.
“화염 마법사의 파괴력이 제일이고, 대지 마법사는 방어력이 뛰어납니다. 물과 바람은 공방이 조화롭고요.”
강해지기 위해 마법에 대해 수년 간 고찰해온 아길라의 지식은 깊고 넓었다.
“음. 그만.”
그와 별개로 아길라는 말이 많은 편이었다.
한 번 시작한 설명은 도저히 멈출 기색이 없었다.
때문에 나는 불가피하게 그의 입을 막아야 했다.
“또한 마법은... 예...”
아직 못 다한 말이 많았는지, 아길라가 아쉽다는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필요한 말은 다 들었다.
기와 마나라는 호칭만 다를 뿐, 자연지기를 이용한다는 점부터, 그 힘을 내부에서 외부로 발현시키기까지.
마법은 무공과 다른 점만큼이나 유사한 점도 많았다.
덕분에 나는 마법에 대해 어렵지 않게 이해 할 수 있었다.
자연지기라는 근간이 다르지 않았기에.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마법을 이해했다 해도, 하루아침에 화경의 벽을 허물 수 있는 가르침을 내릴 수는 없는 법이다.
아길라에게도, 내게도 시간이 더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