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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살수다-112화 (112/150)

# 112

112화. 아길라(3).

“알겠습니다.”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하는 수련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무림에 비무가 왜 있겠는가.

서로 무공을 겨룸으로써 부족함을 메우고 나아가기 위함이다.

물론 고수와 하수가 명확한 상황이기에, 지도 대련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겠지만 그 안에서도 배울 바는 있을 것이다.

지루함의 반복을 달래는 유희이기도 하고.

“이곳은 비좁으니, 던전으로 갑시다.”

“좋습니다.”

아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련장이라고는 하나, SS급 헌터와 내가 자웅을 겨루기에는 비좁다.

내가 수위를 조절하면 되겠지만 상대방을 해하지 않고, 주변에 그 여파가 미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제법 귀찮은 일이다.

대련으로 인해 파괴된 수련장을 복구하는 데에도 시간이 오래 걸리고.

때문에 나는 협회에 요청해 C급 던전을 하나 구했다.

그 이하의 던전은 대련의 여파로 몬스터가 쓸려나가 공략이 완료될 우려가 있고, 그 이상은 몬스터가 귀찮게 들러붙을 지도 몰랐다.

던전의 특성상, 그 안에서는 서로 마음먹기에 따라, 혹은 실수로 상대방을 죽여도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나나 아길라 모두 그 일이 자신에게 일어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나와 아길라는 곧장 C급 던전으로 향했다.

나는 검 한 자루면 충분했고, 마법사인 아길라도 별다른 준비는 필요치 않았다.

그 와중에 원 길드의 박동석과 아길라 팀의 부팀장인 로한이 따라붙었다.

대련의 공증인이다.

둘 다 S급 헌터로, 충분히 나와 아길라의 대련의 여파를 견딜 수 있고, C급 던전에 위협을 느낄만한 수준도 아니었다.

특히, 박동석은 이제 단순히 S급 헌터라는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수준에 올랐다.

기존에 가진 힘이 S급일 뿐만 아니라, 뒤늦게 익힌 무공도 꽤나 성취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황실기사단의 검법과 무공의 상성이 좋기까지 했다.

적어도 같은 S급 헌터들 사이에서는 적수가 없고, SS급 헌터를 상대로도 쉽게 패하지 않을 정도는 되었다.

그 외에도 나와 아길라의 대련이 격화되었을 경우, 서로의 안전을 걱정해 S급 헌터를 공증인으로 세운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정말 걱정하는 일이 발생한다면, 박동석과 로한이 막을 수 없다는 것쯤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서로 상하지 않도록 주의해주시기 바랍니다.”

박동석이 나와 아길라를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리 생사결이 아닌, 대련이라 해도 SS급 이상의 헌터들이 맞붙는 일이다.

사소한 실수가 생사로 직결될 수 있고, 만약 그러한 일이 벌어진다면 피해를 입은 이는 물론이거니와 한국 헌터 계에도 큰 피해다.

최소 SS급 헌터를 잃는 일이니, 서로가 주의하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끄덕.

“물론입니다.”

나와 아길라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길라는 내가 강자라는 얘기에 호승심이 일었고, 나는 마나 제어법을 익힌 마법사를 상대해 보고 싶을 뿐이다.

둘 다 서로를 상하게 할 마음은 없었다.

“그럼 한 수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박동석과 로한이 멀찍이 자리를 잡고 나와 아길라의 비무가 시작됐다.

아길라는 언제 배웠는지, 어설프게 포권을 취해보였고, 나도 마주 포권으로 인사를 건넸다.

무림과 이 세계의 삶을 통틀어 비무 형식의 대련을 치르는 것은 손에 꼽을 정도였기에 제법 흥이 돋았다.

나는 검을, 아길라는 마법사들이 주로 사용하는 마나석이 박힌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지팡이에 박힌 마나석은 마법사의 마법을 증폭시키고, 마법사의 마나가 부족할 경우에 그 마나를 대체하기도 하는 소모품이다.

아길라의 지팡이에는 그의 재력을 증명하듯, 무려 S급 마나석이 박혀 있었다.

그에 반하면, 내 검이 초라하게 보일 정도.

그러나 나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내 경지에 이르면, 나뭇가지도 검으로 사용할 수 있다.

상대가 같은 경지의 고수라면, 무기의 고하가 승패를 결정지을 수도 있겠지만 아길라를 상대로라면, 무기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

“그럼 먼저 가겠습니다. 라바 필드.”

선후의 양보를 말할 것도 없이 아길라가 먼저 손을 썼다.

근접전에 약한 마법사다.

검을 든 나를 상대로 선공을 내어 줄 수는 없었다.

아길라의 몸에서 피어오른 붉은 기운이 지팡이를 타고 대지를 휩쓸었다.

라바 필드.

이름처럼 붉은 기운에 휩쓸린 대지가 용암과 같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땅이 녹아내리며 그 사이로 시뻘건 용암이 부글부글 끓어올랐고, 수증기가 피어올라 발을 디디는 것조차 힘들 정도의 열기가 느껴졌다.

타닷!

나는 곧바로 근처의 바위 위로 뛰어 올랐다.

땅에서 피어오른 열기는 한서불침의 경지에 오른 나조차도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물론, 견디기 힘든 정도일 뿐이다.

열기가 내 호신강기를 뚫고 피해를 입히는 일은 없었다.

쐐애액.

내 손을 떠난 비수가 아길라에게로 향했다.

강기를 머금은 한 자루 비수가 빛살처럼 쏘아졌다.

아길라가 먼저 마법을 선보였으니, 나도 한 번 공격을 취한 것이다.

“실드.”

화염의 마법사라는 호칭에 걸맞게 아길라의 전방에 불타는 방패가 생겨났다.

그러나 불타는 방패만으로는 강기가 서린 비수를 막아낼 수 없었다.

차창!

“파이어 볼!”

불타는 방패는 생겨난 것만큼이나 빠르게 깨어져 나갔다.

너무나 쉽게 깨어져 나간 실드에 아길라는 놀람을 숨기지 못했지만 당황해 흐트러질 정도는 아니었다.

아길라는 재빨리 불의 구체를 생성해 비수를 막아냈다.

콰왕!

비수와 화염의 구체가 맞닿으며 폭발을 일으켰다.

바로 눈앞에서 터진 불길이 아길라를 덮쳤지만 그는 자신을 뒤덮은 불길 속에서 터럭만큼의 피해도 입지 않았다.

화염은 그에게 숨을 쉬게 해주는 공기와도 같았다.

어떤 사람도 공기에 화를 당하지는 않는다.

나는 바위에 올라 선채, 아길라가 비수를 막아내는 과정을 지켜봤다.

생사결이었다면, 아길라가 비수를 막아내는 순간을 노렸겠지만 대련에서 그를 몰아붙일 이유는 없었다.

그의 마법이 왕인귀와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 비교해보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기에 나는 아길라가 전심전력을 쏟아낼 수 있도록 했다.

“파이어 월!”

“인페르노!”

라바 필드가 무용으로 돌아자가, 아길라는 갖가지 불의 마법을 쏟아냈다.

확실히 아길라는 일전에 상대했던 왕인귀와 같은 SS급 마법사임에도 한 층 더 수준이 높았다.

오랜 시간 강해지기 위해 자신의 힘을 고찰했기도 하고, 마나 제어법을 통해 마나를 이해하고 제어하는데 능숙해진 까닭이다.

전력을 다한 마법의 위력에는 그리 큰 차이가 없었으나, 마법을 사용함에 있어 상황에 따라 강약을 조절하며 알맞게 구사했다.

“이럴 수가...”

상대가 제법이라 느끼는 나와 달리, 아길라의 눈은 점차 경악으로 물들었다.

화염 마법사들의 가장 기본이라 할 수 있는 파이어 볼조차 자신의 것은 다른 마법사들과 그 궤를 달리한다.

마나 제어법을 익히고 그 강약을 조절할 수 있게 된 지금, 자신이 전력을 다한 파이어 볼은 조금 과정을 더하면 가히 헬파이어에 비할 정도다.

그럼에도 태빈에게는 자신의 화염이 털끝만큼도 닿지 않았다.

사실, 태빈이 중국의 SS급 헌터 왕인귀를 죽인, SS급 헌터보다 더 윗줄의 헌터라는 얘기를 듣고 비웃음을 흘렸던 왕인귀다.

한국이 자신에게 꿀리고 싶지 않아 허언을 한다 생각했다.

마법사와 검사의 싸움.

상황에 따라 하수의 검사가 마법사를 죽일 수도 있는 일이다.

그렇기에 마나 제어법을 배우고 곧장 그에게 대련을 청했다.

마법을 실험하기 위한 것도 있지만 허언을 일삼는 한국 헌터들을 콧대를 눌러주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생각과 전혀 달랐다.

자신의 마법은 태빈에게 전혀 닿지 못했다.

태빈의 공격도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닿지 못했으나, 상대가 봐주고 있음은 아길라 스스로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태빈은 처음 비수를 날린 것 외에는 이렇다 할 공격을 시도하지도 않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다해보라는 듯이.

“마지막입니다.”

이미 승패는 난 것이나 다름없지만 아길라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마나를 그러모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전력을 쏟아내기 위함이다.

상대가 위험할 수도 있기에 저어했지만 태빈은 자신이 걱정해야 할 만한 수준의 헌터가 아니다.

지금 아길라는 그저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내고픈 마음뿐이었다.

“헬 파이어!”

아길라의 머리 위에서 생성된 마나의 구체가 무섭게 불타오르며 나를 향해 쏟아졌다.

앞서 말했듯, 한낱 파이어 볼조차 아길라의 손에서 펼쳐지면, 보통 마법사의 헬 파이어와 비슷할 정도다.

그런 아길라의 손에서 화염 마법 중, 최강이라 일컬어지는 헬 파이어가 펼쳐졌으니, 그 강함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구체는 순간, 하늘에 작은 태양이 생겨났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뜨거운 열기를 내뿜었다.

마치 세상 전체가 불타는 듯했다.

우웅!

헬파이어에 맞서 내가 기운을 끌어올리자, 검에서 검명이 일었다.

이번만큼은 아길라의 마법을 피할 생각을 버렸다.

상대가 전심전력을 다한 공격이다.

피해버리는 것만큼 허무한 것도 없었다.

물론 대련이기에 가능한 생각이었다.

그리고 막아내지 못할 거란 생각도 들지 않았다.

화아악!

이름처럼 지옥의 불길을 연상시킬 만큼 뜨거운 구체가 나를 덮쳐왔다.

아길라가 처음 선보였던 용암의 열기보다 뜨거운 기운이 내 전신을 찔러댔다.

이전에 경험한 드래곤 브레스보다 강력한 불길이다.

호신강기를 두르고 있음에도 마친 전신을 송곳으로 찌르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 고통에 아랑곳 않고 검을 들어올렸다.

정직하게 쏘아지는 공격에 초식은 필요치 않았다.

내 검이 정직하게 일직선을 그리며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이런...!”

헬 파이어가 태빈을 덮치고 아길라가 뒤늦게 자책어린 탄식을 흘렸다.

상대의 강함에 잠시 이성을 잃었다.

헬 파이어가 괜히 ‘지옥 불’이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이 붙은 마법이 아니었다.

태양보다 뜨거운 그 불길을 피했다면 모르겠지만 정면으로 마주한 이상, 태빈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살아날 가망은 없었다.

“...어찌...?!”

그러나 아길라의 눈이 부릅떠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작은 태양이 반으로 갈라졌다.

그 틈을 검붉은 빛 무리가 메웠다.

반으로 쪼개진 홍염의 불꽃은 검붉은 빛에 집어 삼켜지며 점차 힘을 잃어갔다.

그리고 그 뒤에는 태빈이 있었다.

아직 둘 다 멀쩡히 땅을 딛고 서있었지만 승패는 나눌 것도 없었다.

나와 아길라. 그리고 벌린 입을 다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숨을 죽이고 지켜보고 있던 박동석과 로한까지. 승자가 누구인지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졌습니다.”

“좋은 승부였습니다.”

아길라가 고개를 숙였다.

실수로 상대를 죽일 뻔했다 여겼지만 상대는 그 실수마저 이겨냈다.

자신이 아는 최강의 마법에, 전력을 다한 공격마저 막혔으니, 결과에 승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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