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
110화. 아길라.
며칠 뒤,
아길라의 방한 일정이 삼일 뒤로 잡혔다.
조급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아길라의 강력한 요청이 있었다.
이마저도 일정을 조율하지 않았다면, 당장에라도 한국을 찾았을지도 몰랐다.
미국과의 외교 차원이 아닌, 아길라 개인의 방한이었다.
김원철과 유인원은 포섭한 정부 인사 등에게 국가 차원의 방문은 원하지 않는 다는 자신들의 의사를 전했고, 망설이는 이들에게는 마나 제어법을 더 이상 배포하지 않겠다는 협박까지 곁들였다.
결국, 정부는 협회의 의견을 받아들여 미국의 요청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마나 제어법의 배포가 묶인다면, 정부는 헌터들뿐만 아니라 국민의 지탄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냉담한 반응에 미국은 유감을 표했지만 그 뿐.
미국이 여전히 세계 제일의 강대국이라 하나, 그 영향력이 이전과 같진 않다.
몬스터의 존재로 국가 간의 외교가 소극적으로 변한 탓이다.
대규모 수출입은 꿈도 꿀 수 없는 세상.
대부분의 에너지원이 마나석으로 대체되고, 거의 모든 국가가 자급자족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이전처럼 미국에 굽실 거릴 이유가 없었다.
“삼일 후에 아길라와 그의 팀이 한국을 방문할 예정입니다. 김태빈 헌터께서 도움을 주실 수 없겠습니까?”
김원철에게 아길라의 방한에 대해 일임했음에도, 그는 내게 소식을 전하는 동시에 도움을 구했다.
만약, 얘기가 틀어져 아길라가 날뛰기라도 한다면, 한국에는 SS급 헌터를 통제할 힘이 없기 때문이다.
SS급 헌터를 통제할 수 있는 것은 나뿐이다.
아니 이제 나 외에도 권왕이라는 SS급 이상의 강자가 있긴 하지만 그는 나 조차도 어려운 존재다.
김원철 등은 그가 한국에 머무는데 필요한 서류 등에 대해서도 아직 말조차 꺼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에 신세를 지고 있는 셈이니, 권왕이 도움을 줄 수도 있지만 김원철은 그에게 무언가 부탁한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알겠습니다.”
아길라의 방한 얘기가 나왔을 때부터 예상했던 결과였다.
나는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감사합니다.”
부탁을 하는데 꽤나 망설였는지, 쉬운 승낙에 김원철이 멋쩍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하긴 지금까지 내가 주도적으로 움직인 때가 많았지, 그가 부탁을 해온 적은 별로 없었다.
부탁을 받더라도 나는 내가 관심을 가지거나, 이해득실을 따진 뒤에나 움직였다.
김원철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나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온 것은 서로가 그로 인해 얻는 것과 이로운 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원철이 어렵게 부탁했고, 이러한 반응을 보인 것이다.
나 또한 내가 많이 변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지금 아길라의 방한은 내가 관심을 없다 못 박은 일이다.
과거였다면, 절대 김원철의 부탁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 변화가 어색하거나 불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내가 드디어 사람다워졌다는 느낌이 들어 기껍기까지 했다.
“그럼, 삼일 뒤에 협회에서 뵙도록 하겠습니다.”
아길라가 한국을 찾기로 한 것은 삼일 뒤,
김원철 등은 공항으로 직접 마중을 나가겠지만 나까지 그럴 이유는 없었다.
협회에서 잠시 마주해 아길라가 경거망동하지 못하도록 하는 정도면 충분했다.
***
아길라가 오기 전, 삼일 동안은 가족에게 시간을 할애했다.
살막의 위협이 가시화 된 이후로는 대부분의 시간을 수련으로 보내고 있지만 그렇다고 가족들 간의 관계를 등한시한 것은 아니다.
틈틈이 가족들과 시간을 가졌고, 삼일의 여유가 생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태빈이 왔구나.”
“온다고 말이라도 하지... 밥이라도 해놨을 텐데.”
잦은 전투와 수련에 빠져 사느라 꽤나 오랜만에 마주한 부모님이다.
부모님은 이전보다 확실히 밝아진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아버지는 여전히 일을 하고 계시지만 나로 인해 금전적인 부담이 없어진 만큼,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그 여유로움이 몸까지 드러나, 한층 더 넉넉해진 배가 유독 도드라져 보였다.
향후 건강을 위해서 간단한 운기법과 호신공정도는 가르쳐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고는 있었지만 차일피일 미루다보니, 이제는 저 배가 터지진 않을까하는 걱정이 먼저 들 정도였다.
뭐, 아버지 개인적으로는 크게 불편한 점이 없는 모양이었기에 당장은 가볍게 의견을 묻는 정도에 그쳤다.
어머니 또한 건강을 되찾았다.
요즘은 동네 주부모임에도 나가는 등, 과거에는 하지 못했던 사교모임에도 힘쓰고 있었다.
아버지는 한 번 모임에 나갔다 오면, 나와 형 칭찬을 침이 마르도록 하고 의기양양해져 돌아오곤 한다며 조금은 민망해하셨다.
하긴, 두 아들 모두 위험하긴 하지만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인 헌터 일을 하고 있고, 이제 나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려진 참이니 자랑할 만큼 대단한 아들을 두긴 했다.
“이제 왔냐?”
팀원들과 함께 수련을 마치고 샤워를 한 형도 머리를 털며 인사를 건넸다.
형은 합숙 형식의 수련 때를 제외하면, 거의 집에서 출퇴근 식으로 생활하고 있었고, 팀원으로서는 상하관계를 철저히 해야 할 때와 달리, 집에서 만큼은 나를 동생으로 편히 대하는 형이었다.
“잠깐 시간 좀 돼? 아버지, 어머니 잠깐 태빈이 좀 빌릴게요.”
그래서 이렇게 은근슬쩍 수련 중에 막혔던 부분에 대해서 물어보기 위해 개인적으로 청하기도 했다.
평소 팀원들을 자주 돌아봐주지 않는 내게 가족이라는 관계를 이용해 가르침을 요구하는 것이다.
“알겠어.”
뻔히 보이는 수작이었지만 나는 매번 못이기는 척, 형의 물음을 받아주었다.
가족이기 때문이다.
처음 가져보는 가족이기에 정확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대신,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에서 노력하는 편이었다.
부모님에게는 금전적으로나마 편히 지내실 수 있게, 형에게는 무공을.
“후반 삼식 중에 오식에서 막혀서. 며칠 전부터 물어보고 싶었은데, 도통 만날 수가 있어야지.”
덕분에 가르침을 청할 때면, 팀원입장에서 엄격한 내 눈치를 보던 쭈뼛거리던 형도 이제는 농담처럼 말할 정도로 스스럼없어졌다.
“그래? 일단 제 사식부터 볼까.”
내가 형에게 전해준 참혼도법의 후반부 삼식은 살을 가르는 제 사식, 참부(斬膚)와 뼈를 끊는 제 오식, 참골(斬骨)을 거쳐 제 육식 참혼(斬魂)으로 이어진다.
녹림의 것이어서 그런지, 이름이 직설적이고 잔혹하다.
어쨌든, 형이 막혔다 말하는 부분은 ‘참골’부분이지만 봐주는 김에 앞부분도 봐주기로 했다.
“내공은 쓰지 말고. 일단 초식만”
마당으로 나온 형은 곧장 도를 꺼내들었다.
형이 호흡을 고르며 기수식을 취했다.
동생이기 이전에 무인으로서 가르침을 받는 자리다.
한순간 진지해진 형의 시선이 도 끝을 향했고, 이내 도가 초식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공을 쓰지 않음에도, 도는 상대의 살을 가르고 뼈를 끊기 위한 맹렬한 기세를 품었다.
이름만큼이나 패도적이지만 기본은 놓치지 않은 뛰어난 도법이다.
형의 성취도 칭찬할 만하고.
“도법이라 해서 중(重)에 치우치면 안 된다고.”
“도를 회수하는 순간에 균형이 흐트러지잖아.”
그러나 분명 미흡한 부분도 눈에 띄었다.
형이 부족함을 느낀 제 오식뿐만 아니라, 제 사식도 아직 완벽하다 말할 수 없었다.
시선의 차이다.
절정의 기준에서는 완벽에 가깝다 느껴질 수 있지만 화경의 눈에는 차지 않았다.
무공의 한계인 것도 있지만 나아질 수 있는 부분도 분명 있었다.
“이게 형이 초식을 펼치는 모습이야. 여기하고, 여기. 균형이 흐트러지는 게 보이지?”
나는 형의 자세를 하나하나 집어주기도 하고, 직접 시범을 보여 차이점을 스스로 느끼게도 했다.
언제 또 이렇게 시간을 낼 수 있을지 모른다.
팀원들을 가르칠 때도 그랬지만 나는 기회가 됐을 때, 최대한 신경 미흡한 점을 보완할 수 있도록 도왔다.
“후...”
한 시간 남짓.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온 신경을 집중한 탓에 온 몸이 다시 땀으로 축축해진 형이 가쁜 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시연이랑은 어때?”
“아직 모르겠다. 시연이는 무공에만 몰두하지 다른데 시선을 안두는 것 같아서. 게다가 만식이도 어느 정도 마음이 있는 눈치라서...”
형은 은연중에 김시연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같은 팀원 중 하나인 장만식도 마찬가지.
오랜 시간 함께하다 보니, 동료 간의 신뢰가 연모의 마음으로까지 발전한 것이다.
나는 그 사이에 끼진 않았지만 개인적으로는 형을 응원하는 편이었다.
내가 본 누군가를 지키고자 하는 이들은 모두가 강했다.
형도 곁에 누군가가 있다면, 더 강해질 동기가 될 것이다.
사실, 부모님의 잔소리 탓도 있다.
이전까지는 당장 먹고사는 걱정을 하다가, 생활이 안정된 탓인지 한 번씩 결혼 얘기를 꺼내시곤 했다.
나는 단언컨대 생각해보지 않은 일이다.
아니 누군가와 가정을 꾸린 내 모습 자체가 상상이 되질 않았다.
때문에 번번이 형 핑계를 대곤 했고, 형 이야기가 나오면 부모님이 한숨을 내쉬는 모습을 몇 번이고 볼 수 있었다.
형 나이 서른.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여전히 승급을 안 한 탓에 E급 헌터에, 내 밑에서 수련하느라 공략 횟수도 적어 벌이도 시원치 않다.
부족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헌터의 수입이라고 보기에는 민망한 수준이다.
부모님이 걱정하시는 것도 당연했다.
“아. 조만간 형이랑 팀원들 다 승급해.”
이참에 형 등급을 갱신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정.
A급 헌터 정도 되면, 꼭 김시연이 아니더라도, 신랑감으로는 손색이 없을 테니.
***
삼일 뒤,
예정대로 아길라가 한국을 찾았다.
자신의 팀원인 스무 명의 팀원과 함께.
보통 한 개의 공략 팀이 서른 명 전후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생각하면, 약간 적은 수였지만 헌터 한명 한명이 내뿜는 기세는 결코 만만치 않았다.
눈빛부터가 인간이라기보다는 맹수에 가까웠고, 숱한 사선을 거쳐 온 강자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누가 보면, 전쟁이라도 치르러 착각할 정도다.
“바로 협회로 가겠습니다.”
아길라는 공항에 준비된 환영식보다는 곧장 협회로 향하길 원했다.
머릿속에 온통 마나 제어법에 대한 생각만 가득한 상태다.
허례허식에 불과한 환영식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환영식이 준비되어 있어서... 최대한 짧게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대통령까지는 아니지만 정부 고위 인사들이 나온 자리다.
준비된 것도 있고, 아예 치르지 않을 수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아길라는 준비된 환영식을 거절 하지는 않았다.
한국이 마나 제어법을 손에 쥐고 있는 이상, 자신은 철저히 을의 입장이다.
물론 그 마나 제어법이 효과가 없다면, 아길라는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했다.
“그럼 협회로 모시겠습니다.”
“후.. 정말 간소..하군요.”
대충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주고받고, 사진을 찍는 등의 환영식이 끝났다.
손을 맞잡은 정부 인사는 왜 그렇게 말이 많은지, 사진은 도대체 몇 장이나 찍어 대는지 아길라의 미간에 막 내천 자가 그려지려던 참이었다.
아길라는 잘 참아냈다고 스스로를 칭찬하며 답답했던 마음을 지워내고 마나 제어법에 대한 기대를 다시 키웠다.
물론 협회에 가도 마나 제어법을 두고 지루한 협상과정이 남아있겠지만 어느 정도 선까지는 결심을 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의 발걸음은 무척이나 가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