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
109화. 마나 제어법(2).
사실, 비밀유지계약서는 형식적인 절차일 뿐이다.
일단 계약서 자체가 지니는 힘이 미약하다.
계약의 세세한 부분에 제약을 걸기 위해서는 그만큼 뛰어난 마법사가 필요한데, S급 마법사가 없는 한국에서는 A급 계약서가 한계다.
A급 마법사가 만든 계약서가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 건, 같은 A급 까지.
그 마저도 A급 헌터는 조금의 수고만 들이면, 계약서에 걸린 제약을 파훼할 수 있다.
때문에 상위 헌터들에게는 효율이 떨어지기에 형식적이라 여겨지는 것이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오십의 헌터 가운데, 계약서가 제대로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 헌터는 서른 가량.
이십은 A급으로, 계약서의 효력을 기대하기 힘들고, 나머지 헌터들 또한 마나 제어법을 통해 한층 능력을 강화하고 나면 절반가량은 파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계약서를 작성하는 이유는 계약이 헌터들 간의 무언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언제든 서로가 서로를 위협할 수 있는 힘을 가진 헌터들에게 계약서는 서로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였다.
물론, 음지에서 활동하는 헌터들은 계약서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지만 적어도 양지에서 활동하는 헌터 사이에서는 계약의 이행 여부가 그 헌터의 신뢰도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그럼, 바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오십 명의 헌터들에게 서명을 받은 이후는 앞서 길드의 헌터들을 가르쳤던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우우웅.
내 몸에서 흘러나온 기운이 오십 헌터들을 감싸 안았고,
익숙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기운에 헌터들은 몸을 잘게 떨었다.
다만, 협회의 헌터들은 동기화를 처리하거나, 헌터들 간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더 집중하는 탓에 길드 헌터들에 비해 던전 공략 경험이 적기 때문이지, 마나를 인지하는데 약간의 시간이 더 걸렸다.
“이게 마나?”
반응은 길드 헌터들과 똑같았다.
시간은 더 걸렸지만 몇 번이고 느껴보았던 기운을 몰라보지는 않았다.
인지의 단계는 끝났다.
이제 이해하고, 자신의 능력에 접목시키기만 하면 된다.
나는 길드 헌터들에게 보여주었던 것과 똑같이 협회 헌터들에게 시범을 보였고, 그 때와 마찬가지로 남은 것은 그들이 수련을 통해 체득하는 것뿐이었다.
***
협회의 헌터들이 마나 제어법을 익히고, 유인원은 언론에 그 사실을 알렸다.
원래 협회 내부부터 인원을 차차 늘려가려했지만 유인원은 외부의 헌터들을 포함해 동시에 진행하고자 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인류가 던전과 몬스터의 위협에서 벗어날 날에 한 발짝 가까워졌다며 추켜세우기도 했고, 협회의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 헌터들을 기만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난도 있었다.
그러나 원 길드를 비롯한 신의, 주작 등이 힘을 실어주고, 협회가 직접 전력 이상의 던전을 공략하는 모습을 선보이면서 비난의 목소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찬사로 바뀌었다.
국민은 한층 더 안전한 삶에 희망을 품었고, 헌터들은 더 높은 등급으로의 향상을 꿈꿨다.
“협회는 헌터들에게 조건부로 마나 제어법을 공개할 계획입니다.”
삼년.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무상에 가깝게 협회를 위해 봉사해야 했지만 그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수많은 헌터들의 협회의 문을 두드렸다.
특히, 일반인뿐만 아니라, 같은 헌터들에게도 괄시받던 E급 헌터들.
그들은 삼년이 아닌 오년, 십년이라도 상관없다며 마나 제어법을 배우고 싶다는 열의를 보였다.
“허허.”
유인원이 기쁘면서도 당혹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그 예상을 뛰어넘는 반응이었다.
협회 추산 한국의 헌터는 오만.
그 오만의 헌터들 가운데 무려 일만이 넘는, 절반가량의 헌터들이 마나 제어법을 배우기 위해 애타게 협회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부분이 E급, D급의 하위 헌터들이지만 B급 이상의 상위 헌터들도 제법 되었다.
개중에는 제법 유명한 길드의 길드장이 길드장의 자리를 내어 놓으면서까지 찾아온 헌터도 있었다.
협회가 직접 던전을 공략해내는 모습을 선보이며 의심을 불식시키긴 했지만 아직 미심쩍은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적지 않다.
때문에 적게는 천에서 많게는 삼천 정도의 헌터가 지원하지 않을까 했는데, 그 보다 배이상 많은 헌터가 자원했다.
얼마나 많은 헌터들이 성장에 목말라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우선 백 명을 선발해 가르쳐보려 합니다.”
유인원은 나에게 협회의 결정을 전해왔다.
마나 제어법 자체가 내 것이나 다름없으니, 그 과정을 공유하는 것이다.
“지원자가 만 명이 넘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백 명.
만 명이 넘는 지원자를 생각하면, 턱없이 부족한 수다.
고작 1%.
선발되지 않은 헌터들의 반발이 있을 수도 있었다.
“처음이기도 하고, 그 이상은 협회가 통제하기 어려울 수도 있기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협회 내부 인력이 늘어나는 대로, 선발인원도 늘려갈 예정입니다.”
헌터를 가르치면 끝이 아니다.
계약에 따라, 협회에 새로운 인력이 생기는 셈이다.
삼 년이라는 기간이 정해진 계약이라고 해도, 갑자기 수백, 수천 명이 늘어나면, 통제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말 그대로 어쩔 수 없었다.
“헌데, 외국은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의외로 외국의 반응은 잠잠했다.
물론 아시아의 경우에 무공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살막이 있으니, 고작 마나 제어법에 움직일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 외의 국가들까지 이토록 무관심한 것은 분명 예상 외였다.
타이탄이 있는 유럽이야 그렇다 쳐도, 던전의 수에 비해 헌터의 수가 부족한 아프리카나 남미 등은 분명 관심을 보여야 정상이었다.
“유일하게 미국만 관심을 보였습니다.”
의외의 반응 속에서 유일하게 관심을 보인 것은 미국뿐이었다.
지금껏 자국 내의 일 외에는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미국만이 무거운 엉덩이를 떼고 움직였다.
“미국 측에서 아길라를 대표로 한 방한단을 보내겠다는 의사를 내비친 상태입니다.”
미국은 자국 최고의 헌터인 화염 마법사 아길라를 포함한 방한 의사를 보였다.
SS급 헌터 아길라의 방한은 타국의 무관심한 반응에 드는 의아함을 날려버리기에 충분했다.
SS급 헌터는 전 세계에 셋 뿐인 최강의 헌터들이다.
중국의 SS급 헌터 왕인귀가 내 손에 죽음으로써 국내에서는 그들의 위상이 많이 퇴색되긴 했지만 그 강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SS급 헌터는 여전히 모든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킬 만한 존재였다.
“사실 미국의 입장이라기보다는 아길라 개인이 마나 제어법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한국이 미국의 방한을 거절한다면, 혼자서라도 꼭 한국을 찾고 싶다고 전해왔습니다.”
사실, 소속이 미국이라 할지라도 SS급 헌터는 국가가 명령을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핵과 비견될 정도의 힘을 가진 존재가 SS급 헌터다.
한국을 찾는 것은 아길라의 의지.
아길라는 마나 제어법에 대한 관심을 숨기지 않았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가만히 듣고 있던 김원철이 내 의사를 물어왔다.
정부가 비협조적이기도 했지만 미국은 과거 한국의 요청에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결국, 도움 없이 자력으로 살막의 위협을 극복해내긴 했지만 그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이제 와서 헌터 전력을 높일 수 있는 마나 제어법에 눈독을 들이며 방한 의사를 내비치는 모습이 좋게 보일 리는 없었다.
“개인적으로는 미국의 방한을 거절하고, 아길라 개인을 초청하는 편이 좋다 생각됩니다. 마나 제어법이라면, 충분히 그를 포섭할 수 있을 겁니다.”
“아길라를 포섭할 생각이십니까?”
“예. 아길라가 러시아 국적을 포기한데에는 많은 얘기가 있었습니다만, 가장 신빙성이 높은 소문이 미국의 실험을 통해 더 강해지기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몇몇 국가가 헌터 전력을 키우기 위해 실험을 하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고, 아길라의 힘에 대한 집착은 러시아에 있을 때도 유명했으니까요.
힘을 얻기 위해 러시아 국적을 버렸던 아길라이니 만큼, 미국 국적을 버리지 못할 이유는 없을 겁니다.”
유인원이 말을 보탰다.
SS급 헌터는 미국과의 관계 악화를 감수할 정도로 욕심이 나는 전력이다.
유인원은 그 욕심을 숨기지 않았다.
“SS급 헌터라. 그 부분은 김원철 길드장님과 상의해서 결정하시면 될 듯합니다.”
SS급 헌터는 굳이 따지자면, 초절정과 화경의 중간 단계에 있는 이들이다.
우연히 얻은 힘의 한계로, 기본이 결여되어 있는 상태이기에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가진 힘을 쓸 수 있을 뿐, 더 나아갈 수 없는 존재들.
물론, 마나 제어법을 익히면 자신의 힘에 대한 제어가 능숙해지는 만큼, 더 강해지긴 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관심을 가질 정도는 아니었다.
때문에 아길라에 관한 문제는 김원철과 유인원에게 일임한 채, 관심을 거두었다.
***
협회가 마나 제어법을 가르칠 헌터들을 선발하고, 미국에서 건너올 아길라를 맞이하기 위해 바삐 움직이는 동안, 나는 원 길드 등의 도움을 받아 살막과 타이탄의 동향에 집중했다.
“살막은 패퇴 이후, 다시 여문휘가 종적을 감춘 상태입니다. 다만, 제갈민이 이전과 다르게 전면으로 나서며 아시아를 규합하는데 힘쓰고 있습니다.”
예상대로 살막은 각국의 굴복을 받는 것에서 끝내지 않았다.
제갈민은 영향력 아래 있는 국가를 종속시키기 위해 움직였고, 그 끝이 흡수에 있다는 것을 파악하는 게 어렵진 않았다.
이미 인접 국가들은 종속을 넘어 흡수 단계에 들어서기도 했다.
“몇몇 국가가 이에 반하는 움직임을 보이긴 했지만...”
반발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몇몇 국가가 중국의 강압적인 행보에 반발하고, 저들끼리 세력을 규합해 맞설 조짐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반란의 주축이 되는 이들이 하루아침에 시신으로 발견되면서 조짐은 조짐에서 끝났다.
살막이 연이은 패배로 힘이 쇠했다고는 하나, 소수의 저항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약해지진 않았다.
반란 세력의 수뇌부 몇을 암살하는 것은 살막에게 일도 아니었다.
“타이탄은 승리 이후, 진격을 멈추고 내실을 다지는 듯합니다.”
거리가 먼 탓에 세부적인 정보를 얻기는 어려웠지만 타이탄 측은 이제 영역을 넓히기 보다는 점령한 땅의 안정화를 꾀하는 듯 보였다.
반란세력인 유럽 연합을 잠재우긴 했지만 그들은 말 그대로 타이탄에 반하는 세력이었을 뿐이다.
유럽만 해도 여전히 각 국가의 이름을 띄고 있긴 했지만 오래토록 갈라져있던 나라들이 한순간에 하나의 세력 밑에 통합됐다.
국가의 통합에 따른 혼란은 별개의 문제였고, 타이탄은 이를 가라앉히고자 했다.
또한 이번 살막과의 전투에서 잃은 기사와 성전사를 보충하는 동시에 그 규모 또한 키우고 있었다.
“숨고르기에 들어간 셈이군요.”
양측 다 당장 위협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미래에 더 큰 위협으로 다가오기 위한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