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
107화. 태백 길드(3).
“비켜라.”
소란스러운 장내에 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안병희는 여전히 놀란 눈으로 바라봤고, 태백 길드원들은 최상층에서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주춤주춤 거렸다.
“대체 원하는 게 뭐냐?!”
“길드장님을 놓아줘라!”
태백 길드원들은 주춤주춤 물러나면서도 기세를 죽이지는 않았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 무기를 겨누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이상의 행동을 이어나가지는 못했다.
길드장 김형석의 안위 문제도 있지만 그보다는 부길드장을 비롯한 명령권자들이 아무도 나서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살막의 살수들도 어쩌지 못한 고수다. 어떻게 해야 하지.’
‘과연 저자를 막을 수 있을까,’
김형석은 혼자가 아니었다.
A급 헌터의 이목을 속이고 한순간에 숨통을 끊어 놓을 수 있는 살수가 셋이나 있었다.
그런데, 김형석만 제압된 채로 나왔다는 것은 그 세 명의 살수들이 당했음을 의미했다.
자신들이 경보를 듣고 도착한 고작 몇 분 사이에.
김형석을 떠나 자신의 목숨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섣불리 움직일 사람은 없었다.
“이걸 노렸던 겁니까?”
안병희가 원망스러운 눈으로 김원철을 바라봤다.
김형석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게 현실이 될 줄은 몰랐다.
김형석 혼자 숨 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살막의 살수들이 당했다는 것도 놀라웠다.
안병희 또한 살수들의 힘을 일부분이나마 보았고, 그들을 상대할 수 있는 헌터는 한국에 없다 생각했으니까.
“가죠.”
나는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고, 태백 길드원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어느새 김원철의 앞까지 당도했다.
수천의 헌터들이 나를 주시하고 있었지만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혹, 싸움이 발생해 헌터 전부가 달려든다 하더라도 나는 털끝도 상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김원철 등은 좀 위험해 질수도 있지만 눈에 띄는 몇 명만 처리하고 나면, 버티는 것쯤은 가능하다.
그 사실을 알기에 수십 배나 되는 수는 거느리고도 태백 길드가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부길드장님.”
나에 이어 백 명의 헌터들이 등을 돌리고 걸음을 옮겼다.
태백 길드의 헌터들이 부길드장을 바라봤지만 그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살막의 살수들조차 막지 못한 존재다.
죽음을 각오한다면 막아설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부길드장에게는 그 정도의 용기가 없었다.
***
사로잡은 김형석은 일전의 폐공장으로 옮겨왔다.
서울로 데려가 심문하기에는 멀기도 하거니와, 어차피 김형석 외에 살막과 연계된 헌터들을 뿌리 뽑아야 했다.
“으어?! 어어억!”
점혈을 당해 시체마냥 늘어져 있던 김형석은 점혈이 풀리자, 멍청한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뒤늦게 자신의 목에 닿은 서늘한 감촉을 느끼고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비명을 질렀고, 익숙지 않은 폐공장의 모습과 먼지 섞인 냄새에 서서히 현실을 자각해 갔다.
“김원철 협회장! 대체 제게 원하는 게 뭡니까?...”
“살막.”
“모릅니다. 정말 아무것도 몰라요. 으아악.”
살갗을 파고드는 검신에 김형석의 비명이 폐공장을 울렸다.
붉은 피 한 방울이 검신을 타고 흘러내렸다.
“모르면 죽는다.”
“그 자들이 찾아온 건 1년 전이었습니다.”
아무런 감정조차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시선에 담긴 살의를 느낀 김형석의 입이 빠르게 열렸다.
살막의 살수가 태백 길드를 찾은 것은 1년 전이었다.
소리 소문 없이 자신의 사무실을 찾은 살수의 존재에 김형석은 죽음을 느꼈다.
그러나 살수는 김형석을 해하지 않았다.
애초에 김형석을 죽일 생각이었다면, 그는 살수의 존재도 느끼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살막은 김형석에게 달콤한 미래를 제시했고, 그 날로 태백 길드의 한국 지부 격이 되었다.
사실, 크게 바뀐 것은 없었다.
김형석이 하는 일이라고는 살막에 한국 헌터 계의 동향 따위를 전해주고, 한국에서 활동하는 살수들의 신분 등을 돕는 게 전부였다.
대신 살막은 김형석의 눈에 거슬리는 이들을 조용히 치워주었고, 제법 어려운 던전의 공략을 돕기도 했다.
이미 경상도 지역에서는 명실 공히 최고의 길드였지만 살막의 지원은 그 입지를 더욱 공고히 해주었다.
“됐고, 태백 길드에서 너와 같이 살막에 포섭된 자가 몇이나 되지?”
살막과 태백 길드의 관계는 나에게 잡설에 불과했다.
둘의 연계보다 당장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이들이 살막에 가담했는가 하는 것이다.
“부길드장 이명기와 1공략팀장 안병희...”
한 번 열린 입은 숨김없이 정보를 술술 쏟아냈다.
김형석은 그게 자신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불러.”
“예? 예...”
김형석을 납치할 때와는 달리, 굳이 그들을 잡으러 갈 필요는 없었다.
길드장이 여기에 있다.
적당히 꾸며대기만 하면, 그들을 부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
“길드장님?”
“놈들은 어디가고?”
이명기와 안병희 등, 다섯이 폐공장 안으로 들어섰다.
폐공장 안에는 김형석만 홀로 덩그러니 놓여 있었을 뿐, 김형석을 납치한 태빈과 김원철 등의 헌터들은 온데간데없었다.
“와..왔나?”
김형석이 어색한 표정으로 그들을 맞이하며 눈알을 굴려댔다.
끼이익.. 쿵!
폐공장 문이 요란한 소음과 함께 닫혔다.
“왔나?”
경계심을 누그러트리기 위해 헌터들까지 대부분 물린 채였다.
이어 폐공장의 어둠 속에서 김원철과 십여 명의 헌터가 다섯을 포위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기척을 숨기고, 경계를 최대한 누그러트리기 위해 은신에 취약한 헌터들은 모두 배제한 상태였다.
“놈!”
닫힌 문과 내 존재에 다섯이 황급히 무기를 꺼내들었다.
김형석이 나와 김원철도 살막의 편에 서게 됐다고 약을 쳐놓긴 했지만 분위기상 그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아차릴 눈치가 있는 자들이었다.
“...미안하다.”
쭈뼛쭈뼛 뒤로 물러나는 김형석의 모습만 해도, 얘기한 것과는 전혀 달랐다.
스릉.
나 또한 검을 꺼내 들었다.
굳이 얘기는 필요치 않았다.
“이익! 죽여!”
일이 틀어졌음을 깨달은 다섯이 내게 달려들었지만 고작 절정, 초절정의 살수들에게도 겁먹을 정도의 실력을 지닌 자들이다.
내게는 일초지적도 되지 못했다.
폐공장 안에 다섯 생명이 꺼지고, 다섯 개의 시체가 생겨났다.
“히끅!”
내 시선이 이제 홀로 남은 김형석에게로 향했고, 그 시선을 마주한 김형석이 갑자기 딸국질을 해댔다.
“히...끅!”
김형석이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지만 한 치의 자비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잔혹한 손속에 놀란 마음은 쉬지 진정되질 않았다.
저벅.
내 발걸음이 김형석에게로 향했고,
“살려주신다 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애처로운 눈빛을 보내는 김형석을 향한 내 표정은 무심했다.
나는 살막에 대해 얘기하지 않으면, 모르면 죽인다 했을 뿐, 안다 해서 살려준다 하지 않았다.
“그...그건?”
김형석도 그 사실을 알아차렸는지, 뒤걸음질 치기 시작했지만 이미 늦었다.
내 검은 주인의 무심함 그대로 김형석의 심장을 찔렀다.
시체가 다섯에서 여섯으로 늘었다.
“끝났군요.”
다시 폐공장으로 돌아온 김원철이 내뱉은 감상이었다.
그 또한 시체를 바라보고 있음에도 별다른 감정의 변화 없이 덤덤했다.
“아, 유인원 헌터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내가 김형석 등을 죽이는 사이, 김원철을 통해서 유인원에게 연락이 와 있었다.
“고영이라는 자가 김태빈 헌터를 찾아왔다고 하더군요.”
“고영?”
고영이라는 자가 나를 찾아왔다는 내용이었다.
‘고영?’
적어도 지구에서는 들어보지 못한 낯선 이름이었다.
그러나 이내 그 이름의 주인을 떠올린 내 눈이 커졌다.
흔히 볼 수 없는 내 감정의 동요에 김원철이 무슨 일이냐며 걱정을 드러낼 정도였다.
권왕 고영.
고영은 권왕의 이름이었다.
“뒷일을 맡기겠습니다.”
나는 김원철에게 모든 일을 일임하고 곧장 협회로 향했다.
권왕이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만사를 제쳐두고 만날 가치가 있는 인물이었다.
***
“또 보는군.”
협회에 도착하니, 권왕은 협회장실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십 수 명의 협회 헌터들이 긴장한 채 그를 에워싸고 있었지만 권왕은 제 집처럼 편안한 얼굴이었다.
하긴 수천수만의 병사를 앞에 두고서도 홀로 평화로웠던 게 권왕이다.
서로 대치하고 있는 모습보다는 오히려 지금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저를 찾아오셨다 들었습니다.”
“싸울 생각은 없으니, 그리 긴장할 필요 없네.”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드러났나 보다.
권왕 정도의 고수를 눈앞에 두고 긴장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내 머릿속은 지금의 전력으로 과연 권왕을 막아설 수 있을지, 아니면 어떻게 도망쳐야 할지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일단 앉지. 괜찮겠나?”
권왕이 내게 자리를 권하며 유인원에게 물었다.
너무 자연스러워 모두가 잊고 있었다.
이 자리의 주인은 권왕이 아닌, 유인원이었다.
“물론입니다.”
나와 유인원은 권왕의 맞은편에 앉았다.
상석이 따로 있었지만 누가 하나 그 쪽으로는 시선도 돌리지 않았다.
“소개부터 하지. 내가 양녀로 삼은 아이네. 몬스터에 가족을 잃은 것은 내가 거두었지.”
그제야 권왕의 옆에 이 자리가 어색한 듯, 다소곳하게 앉아 있는 묘령의 여인이 보였다.
권왕의 덩치에 가려져 있던 것도 있지만 권왕의 존재가 고작 여인의 기척을 잡아내지 못하게 만들 정도로 나를 긴장하게 만든 것이다.
“아.”
내 입에서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묘령의 여인.
그녀는 권왕의 딸, 화련을 꼭 닮아있었다.
권왕이 어떤 마음으로 그녀를 양녀로 삼았는지 이해가 됐다.
“안녕하세요. 수아라 합니다.”
“반갑습니다. 김태빈이라 합니다.”
자신을 수아라 밝힌 여인이 어설픈 한국말로 인사하며 고개를 숙여왔다.
그녀의 어설픈 한국말에 문득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권왕도 제법 능숙하게 한국말을 사용하고 있었다.
권왕의 오성이라면, 언어를 익히는 게 어려운 일만은 아니겠지만 굳이 한국어를 배울 이유가 없었다.
“인사는 이만하면 됐고, 내가 자네를 찾아온 것은 한국에 우리 둘이 살만한 거처를 마련해줄 수 있을까해서네.”
“거처 말입니까?”
“그래. 사실, 내가 살막의 편에서 움직인 것은 그들이 수아와 내가 만나고, 가족이 되는 것을 도와줬기 때문이네. 하지만 이번 일로 살막과 틀어졌지.
나야 상관없지만 그들이 수아를 인질로 잡을 수도 있다 생각했기에 이곳, 한국으로 온 거네. 인근은 한국을 제외하곤 전부 살막의 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니.”
권왕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숨김없이 밝혔다.
권왕의 양녀인 만큼, 수아라는 여인도 마냥 약하지는 않았다.
일류 정도의 기세가 느껴졌다.
그러나 그 정도로는 살막의 살수를 막아낼 수는 없었다.
“그런 문제라면, 저희 측에서 도와드리겠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유인원이 말했다.
권왕은 고수다.
협회장으로서 고수를 잡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고맙지만 협회의 손을 빌리고 싶지는 않군.”
그러나 권왕은 유인원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과거에도 어딘가에 얽매이고 싶지 않아 했던 권왕이다.
고작 거처문제로 한국의 협회와 얽히려 할 리 없었다.
“알겠습니다.”
대신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 그대로 고작 거처문제다.
이 정도로 권왕과 관계를 호의적으로 만들 수 있다면 한참 남는 장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