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살수다-100화 (100/150)

# 100

100화. 충돌(3).

일전에 권왕과의 충돌에서 스치듯 지나간 작은 깨달음.

무인들이 보다 고수들 간의 비무와 생사결 등을 보기위해, 혹은 강한 무인과 싸우기 위해 목숨을 거는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이 닿지 못한 경지를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면서 깨달음을 얻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 깨달음의 크기가 작던, 크던 무인으로서 한 걸음 더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줄 테니 말이다.

나 또한 권왕과의 결전에서 작은 깨달음을 얻었다.

아무것도 담지 않았음에도 모든 것이 담겨 있던 권왕의 정권이었다.

그 것을 보고도 무언가를 느끼지 못했다면, 지금의 경지에 오르지도 못했을 것이다.

권왕이 굳이 나와 손속을 섞은 게, 어쩌면 조금이라도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때, 놓치지 않았더라면...’

사실, 당시에는 당장에라도 주저앉아 그 깨달음을 부여잡고 싶었다.

그러나 눈앞에서 여문휘가 내 목숨을 노려왔고, 나는 불현 듯 찾아왔다 다시 떠나가는 깨달음을 놓아 줄 수밖에 없었다.

모든 일이 마무리 된 뒤, 뒤늦게 몇날며칠을 명상으로 지새웠지만 한 번 사라진 깨달음은 대막의 신기루처럼 닿을 듯 말 듯 아른 거릴 뿐, 결국에는 닿지 않았다.

때문에 던전을 찾은 것이다.

던전의 기운은 머리를 맑게 해주고, 충만감을 불러 온다.

그 기운이라면, 복잡한 머릿속의 실타래를 풀고, 잃어버린 깨달음으로 비롯된 상실감을 채워줄 수 있을까 하는 기대였다.

그렇기에 여문휘라는 위험을 뿌리 뽑지 못한 상태임에도, 지구와의 단절을 감수하고 던전 공략에 나선 것이다.

깨달음이 아니었다면,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던전을 찾는 우를 범할 이유가 없었다.

‘후...’

그러나 이내 내 입에선 한숨이 흘러나왔다.

팀원들을 뒤로하고 명상에 잠겼지만 소용없었다.

사실, 한 번 놓친 깨달음을 잡는 다는 게, 깨달음을 얻는 것보다 힘들다는 건 알고 있었다.

미련을 버리지 못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찾은 던전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희미해지다 못해 완전히 사라져 버린 깨달음이었다.

정권을 내지르는 권왕의 모습을 수천수만 번 그려보았지만 이미 때를 놓친 깨달음은 다시 나를 찾아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깨달음을 갈구하는 마음이 집착이 되어, 복잡해진 머릿속에 번뇌가 찾아왔다.

더 이상의 집착은 무의미했다.

아니 무의미함을 넘어 자칫 심마에 들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포기하기 쉽지 않아, 거대한 파도와 같은 상실감이 밀려왔지만 애써 눌러내었다.

지금은 놓쳤지만 영영 놓친 것은 아니다.

깨달음은 언제고 다시 찾아 올 것이다.

아쉬워 할 필요 없었다.

“후...”

애써 자위해 봐도 한숨을 지워내지는 못했다.

***

던전 진입의 첫 번째 목적은 깨달음이었다.

원하는 바를 얻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모든 걸 포기한 채, 멍하니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곧장 팀원들을 불러 모았다.

팀원들 또한 각기 운기를 하거나, 수련을 하는 등, 한 치의 낭비 없이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방해하지 않기 위해 잠시간의 기다림이 필요했지만 무아지경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나를 앞에 둔 팀원들의 얼굴에 걱정이 서렸다.

결국 놓친 깨달음에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완전히 숨기진 못한 모양이었다.

나 스스로는 모르고 있었지만 팀원들 입장에서는 내가 와이번을 전부 처치하자마자 명상에 잠기는가 싶더니, 이제는 자신들을 불러 모은 채, 세상이 멸망하기라도 한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팀원들로서는 충분히 걱정할 만한 상황이었다.

“아니다. 이렇게 부른 건, 너희의 무공을 봐주기 위함이다.”

나는 한 번 고개를 저어 안색을 고친 뒤, 팀원들을 바라봤다.

던전 공략의 두 번째 목적은 팀원들의 무공을 점검하기 위함이었다.

팀원들이 절정의 경지의 경지에 올랐다는 것은 확인했다.

중국 헌터들을 상대로 한 번, 던전에서 와이번을 상대로 한 번, 두 번의 실전까지 거쳤다.

그러나 내가 직접 그들을 살핀 적은 없었다.

여러 가지 일로 바쁘기도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여전히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번씩 생각은 하면서도 차일피일 미루다보니, 지금까지 오게 됐다.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절정의 경지부터는 자신만의 길을 걸을 시기다.

지금 어긋난 부분을 바로잡지 못한다면, 더 이상은 기회가 없었다.

“예.”

팀원들이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마치 과거 정식 살수 시험을 앞에 둔 예비 살수들을 보는 듯했다.

나도 그 예비 살수들 중 하나였다.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 살수가 되는 일이기에 단 한 번의 실수로 십 년의 세월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는 시험이었다.

물론 지금은 그 때와 다르다.

정식 살수 시험은 통과하지 못하면, 죽음뿐이었으니.

그럼에도 팀원들 사이에 감도는 긴장감은 그 시험을 떠오르게 했다.

제대로 인정받고 싶은 것이다.

자신들에게 가르침을 내려준 내게.

그렇기에 팀원들은 생사가 걸린 듯, 긴장하고 집중했다.

“우선 김시연과 김영기. 육합검법과 현운검법을 차례로 펼쳐 보아라.”

내 호명에 둘이 앞으로 나섰다.

검을 쓰는 김시연과 김영기는 육합검법으로 기초를 다지고, 일류에 오른 뒤에는 현운검법을 익혔다.

“알겠습니다.”

적당히 거리를 벌린 두 사람이 육합검법의 여섯 가지 초식을 선보이며 검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실, 육합검법은 베기, 찌르기 등의 기본적인 동작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을 뿐인, 검법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검법이다.

그럼에도 수많은 무인들이 삼재검법 다음으로 많이 익히는 검법이 바로 육합검법이다.

이유는 두 검법이 무엇보다 기초를 중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경지에 올라섰다 해도 기초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때문에 둘은 상승검법인 현운검법을 익혔음에도 여전히 육합검법을 놓지 않고 있었다.

육합검법의 여섯 초식이 끝나고, 이어 현운검법이 펼쳐졌다.

현운검법은 검로의 신묘함이 마치 구름과 같다하여 이름 지어진 검법으로, 대성하면 능히 초절정 이상을 넘볼 수 있을 검법이다.

그러한 사실을 증명하듯, 단순히 초식을 펼치는 것일 뿐임에도, 웅혼한 기운이 검을 타고 흘러나왔다.

“잘 봤다. 확실히 요행으로 절정의 경지에 오른 건 아니었군.”

지켜본 바, 김시연은 팔성, 김영기는 그에 조금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십이성, 대성은 아직 멀었지만 보통의 무인이 십 수 년의 시간을 수련해야 오를 수 있는 경지다.

영약의 도움을 받았다고는 하나, 단기간에 이뤄낸 성취치고는 훌륭했다.

“허나.”

그러나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약간의 어긋남이 보였다.

육합검법으로 기초를 소홀히 하지 않도록 하긴 했지만 단기간에 가파르게 경지가 상승한 탓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나는 직접 초식을 선보이며 그런 부분들을 하나하나 바로잡아 주었다.

직접 현운검법을 익힌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익힌 무명검법은 현운검법보다 한 수 위의 검법이다.

현운검법의 어긋난 부분을 바로잡아 주는 것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다음, 장만식.”

이어 차례로 풍랑부법을 익힌 장만식과 참혼도법을 익힌 형, 태성의 무공을 봐주었다.

장만식은 부법이라는 특이점 때문인지, 중(重)에 치중하는 편이었다.

허나, 풍랑부법은 바람 풍과 이리 랑 자를 쓰는 이름처럼, 한 마리 늑대가 일으키는 바람과 같은 쾌속한 부법이다.

일반인에 비해 커다란 몸에 외공까지 익힌 탓에 자연히 자신의 장점에 집중하게 된 것이지만 중에만 치중해서는 결코 대성할 수 없었다.

때문에 이를 확실히 인지 시켰다.

“김태성. 지금부터 내가 선보이는 것이 참혼도법의 후반부 삼초식이다. 잘 보도록.”

마지막으로 형에게는 참혼도법의 후반부 삼식을 가르쳐주었다.

기존 팀원들과의 괴리감을 없애기 위해, 형이라 해도 명령조로 대했다.

형이 익힌 참혼도법은 가장 기본에 충실한 도법이긴 하나, 후반부는 전반부와 확연히 다르다.

혼마저 베어버린다는 이름이 허명이 아님을 증명하듯, 날카롭고 파괴적이다.

그 힘은 보통의 무인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다.

때문에 처음 참혼도법을 전할 때는 우선 전반부 삼식만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절정에 오른 지금이라면, 후반부 삼식을 익힐 자격이 있었다.

“이제 차례로 나와 비무를 할 것이다. 내가 말한 것을 생각하며 비무에 임하도록 하라.”

초식의 부족함을 잡아준 뒤에는 비무를 벌였다.

고수가 하수에게 가르침을 내리는 지도 비무였다.

지도 비무였지만 나는 살기를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갑작스레 쏟아진 살기에 순간, 팀원들의 몸이 굳어졌다.

이번 비무는 팀원들의 부족한 부분을 메우는 것이 첫째지만 실전 감각을 키워주기 위함도 있었다.

지난 몇 달 간 수련에만 집중한 탓에 실전 경험이 턱없이 부족한 팀원들이다.

숨통을 조여 오는 살기는 팀원들로 하여금 이 비무를 실전과도같이 느끼게 해주었다.

***

유럽의 반발 세력을 격파하고 동쪽으로 향했던 요한은 카자흐스탄에 들어섰다.

사이에 러시아 땅이 있었지만 대통령과 협회장을 동시에 잃고, 여전히 혼란을 수습하지 못한 러시아였기에 요한 등 기사들은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고 조용히 지날 수 있었다.

점령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요한은 포교활동도 뒤로 미뤄둔 채, 중국을 향한 강행군을 지시했다.

지나온 모든 땅을 티탄의 성역으로 만들었던 지금까지와 확연히 다른 행보였지만 의문을 가지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티탄교의 교인들에게 교황인 요한의 말은 신, 타이탄의 뜻과 같기 때문이다.

요한을 제외한 교인들에게는 의문도, 생각도 필요치 않았다.

모든 결정은 요한이 내리고, 교인은 그저 따를 뿐이었다.

“여문휘는 여전히 안가에 틀어박힌 채,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합니다.”

기사 하나가 여문휘의 소식을 전해왔다.

한국의 정보력으로는 파악조차 못하고 있던 여문휘의 행방이다.

그러나 소식을 전하는 타이탄의 기사는 크게 중요하지 않은 정보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전했다.

“어지간히 충격이 컸던 모양이군.”

요한이 답했다.

그도 마찬가지.

여문휘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 없다는 얼굴이다.

실제로 요한은 더 이상 여문휘에게 관심이 없었다.

한 때는 자신과 같은 존재로 여겼을 때는 호적수라고까지 생각하며 경계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자신과 같은 존재였다면, 수하를 잃고 구차하게 도망쳤을 리 없다.

아니 애초에 누군가에게 패한다는 게 말이 되질 않았다.

자신과 같은 존재가 아닌 이상, 요한에게 여문휘는 조금 큰 세력의 우두머리일 뿐, 정화의 대상에 불과했다.

“중국만 정화하면, 아시아 전체를 얻을 수 있다 했던가.”

“예, 지금 중국의 영향력이 아시아를 넘어 중동에까지 미치고 있습니다. 압도적인 힘에서 비롯된 공포에 의한 지배. 저희가 더 강력한 힘을 선보인다면, 알아서 머리를 조아려 올 겁니다.”

요한의 시선은 이제 여문휘 개인이 아닌, 아시아 전체를 향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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