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
99화. 충돌(2).
사라진 여문휘의 행방은 묘연했다.
중국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는 얘기만 있었을 뿐, 공식석상에는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때문에 사실은 여문휘 또한 테러에 휩쓸려 목숨을 잃었다는 등, 소문이 무성해졌다.
여문휘가 임시 국가주석의 자리에 오른 지 한 달.
슬슬 전국인민대표대회의 찬반을 통해 정식 여부를 정해야 하는 때에 이런 일이 생긴 탓에 중국 전체가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일단 급한 대로 제갈민이 빈자리를 채우고 있었지만 출신성분부터 직책까지도 불분명한 제갈민이다.
그 혼자 여문휘의 빈자리를 메울 수는 없었다.
그러한 사정 때문인지, 중국 측에서는 테러의 보상을 요구하는 것 외에는 특별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사실 이번에 잃은 삼백오십은 살막으로서도 상당한 타격이었기에 내실을 다지고 있는 것이지만, 그러한 내부적인 사정까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내일 전라도 지역의 A급 던전 두 개를 공략할 예정입니다.”
“그렇습니까?”
“예. 전라도 지역에 동기화가 걱정되는 던전 한둘이 아닙니다. 태양 길드가 와해된 탓에 A급 이상의 경우에는 마땅히 공략을 시도할 만한 길드도 없다고 하더군요.”
그 사이, 우리는 한동안 살막과의 마찰로 인해 신경 쓰지 못했던 국내의 던전을 정리하기 위해 움직였다.
서울 측은 태백과 태양 길드가 영향력을 넓히기 위해 부지런히 공략을 해 나간 덕에 신경 쓸 만한 던전은 없었다.
오히려 씨가 말랐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적어졌던 던전이 서서히 다른 지역과 비슷한 수를 회복하고 있는 중이었다.
반면, 전라도 지역에서는 태양 길드의 전력 절반이 빠져나가고, 이후에는 완전히 와해되어버리기까지 한 탓에 시급을 요하는 상위 던전이 몇 군데 있었다.
헌터의 존재가치는 던전과 몬스터로부터 나온다.
헌터들이 던전과 몬스터라는 위험에서 국민들을 보호해주기 때문에, 국민들이 헌터의 존재를 반기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국민은 자신들과 다른, 위협적인 무력을 지닌 헌터들을 배척했을 지도 몰랐다.
하물며 이번 테러가 헌터들과 연관이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민심이 흉흉해진 상황이다.
그런 여론을 가라앉히기 위해서도 이번 공략을 필요했다.
“그렇습니까? 그럼 저도 던전 하나를 맡도록 하겠습니다.”
A급 정도의 상위 던전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보통 사오십 가량의 헌터들이 필요하다,
A급 헌터 열에 삼사십 명 정도의 B급 헌터들.
반면, 나는 A급, 아니 그 이상의 던전이라 하더라도 혼자서 충분하다.
하물며 더 안전하고 빠르기까지.
수십의 헌터가 며칠을 걸릴 걸, 혼자 하루에 끝낼 수 있으니, 거들어 주는 게 당연했다.
“굳이 무리해서 나서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중국 헌터들과의 전투와 별채에서의 일로 적지 않은 부상을 입었던 태빈이다.
여문휘에게 어깨에 커다란 검상을 입었고, 별채에서는 독에 중독되기까지 했다.
물론 지금은 힐러 등의 치료로 말끔히 나은 상태이긴 했지만 불과 며칠 전의 일.
육체가 아닌 정신적인 휴식이 필요할 거라 여겼다.
“동기화가 우려되는 것도 있지만 사실, 이번 공략을 새로 흡수한 길드원들과 기존 길드원들 간의 융화의 기회로 삼으려 합니다. 저희 원 길드도 그렇고, 주작 길드도 아직은 서로가 서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지라...”
김원철이 덧붙였다.
내가 쉬기를 바라는 마음에 하는 변명임과 동시에 사실이기도 했다.
이번에 태양 길드가 와해되며 갈 곳 잃은 태양 길드원들을 원 길드와 주작 길드가 흡수했다.
그러나 새로이 합류한 헌터들과 기존의 헌터들 사이에는 냉기가 흐르고 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로 무기를 겨눴던 사이다.
아무리 이제 같은 길드 소속이 되었다 하더라도, 곧장 서로를 믿고 신뢰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때문에 공략을 통해 기존의 길드원들과 새로운 길드원들이 자연스럽게 섞여 들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어차피 팀원들과 한 번 공략을 진행할 생각이었습니다. 저 또한 던전에 한 번 들어가야 할 이유도 있고.”
“아, 그렇습니까? 그럼, 군산의 던전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변명을 대가면서까지 거절하던 김원철이었지만 내가 필요하다고 하자, 이유도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쉬기를 바라는 마음에 만류했을 뿐이다.
던전은 지금도 계속해서 생겨나고 있고, 결국 누군가 처리해야 하는 문제기 때문에 내가 원한다면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군산의 던전은 와이번 둥지로, 비행 몬스터를 상대해야하기 때문에 까다로운 축에 속했다.
물론 다른 헌터들의 경우다.
드래곤과 삼십 미터 거체의 골렘도 상대해 본 경험이 있는 나에게 와이번은 조금 커다란 새 그이상도, 그이하도 아니었다.
***
나는 형이 포함되면서 다시 네 명으로 늘어난 팀원들과 함께 공략에 나섰다.
팀원들은 처음으로 상위 던전에 진입하는 것이지만 긴장한 기색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절정의 경지에 오르며 부쩍 자신감이 늘어난 팀원들이다.
등급은 여전히 F 등급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가진 힘은 A급 헌터를 넘어 섰다.
게다가 일전에 중국 헌터들과의 전투에서 A급 헌터들을 상대로 실전을 겪으며 자신이 강해졌음을 직접 확인하기까지 했다.
긴장보다는 이번 공략을 통해 다시 한 번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싶은 마음에 잔뜩 흥분한 상태였다.
“내가 A급 던전을 공략하는 날이 오다니.”
“와이번이라. 2급 몬스터였나? 1급 몬스터였나.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상위 등급 몬스터에 대해서도 공부를 해놓을 걸.”
“걱정 마. 1등급이건, 2등급이건 내가 도끼로 다 썰어 줄 테니까.”
김시연은 자신의 검을 매만지며 감격에 겨워했고, 김영기는 와이번을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 거렸다. 분명 며칠 전에 얘기해줬고, 와이번에 대해서는 달달 외웠을 텐데도 말이다.
마지막으로 장만식은 도끼를 휘두르며 호기롭게 가슴을 치며 덧붙였다.
정말 와이번을 단숨에 두 쪽으로 쪼개버릴 듯, 도끼에서 거센 파공음이 들려왔다.
“겁먹지 않은 것은 좋다만, 방심하지는 마라.”
나 또한 가벼운 마음으로 나선 공략이었기에 딱히 팀원들에게 주의를 주거나 하지는 않았다.
와이번은 팀원들이 상대하기에 적당한 몬스터다.
다수가 몰려온다거나, 실수를 한다면, 위험할 수도 있지만 그 정도로 흥분한 것 같지는 않았다.
말과 달리, 진입과 동시에 곧장 무기를 꺼내들고 사방을 경계하는 모습만 봐도 딱히 걱정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예상대로 공략은 순조로웠다.
“온다.”
창공을 유유히 주유하던 다섯 마리의 와이번 무리가 우리를 발견하고 활강해 왔다.
활강과 동시에 먹잇감을 낚아채기 위해 날카로운 발톱을 들이밀었었지만 팀원들은 곧장 사방으로 산개하며 어렵지 않게 피해냈다.
그리고
촤아악.
어느새 선명한 검기가 덧씌워진 무기들에 와이번의 날개가 종잇장마냥 잘려나갔다.
공격을 피한 와이번들은 다시 하늘로 솟구쳤지만 그러지 못한 와이번들은 육중한 소리를 내며 그대로 땅바닥에 처박혔다.
키익. 키익.
바닥에 처박힌 와이번들은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부리와 발톱을 휘둘렀다.
그러나 위협은커녕 애처로워 보일뿐이었다.
날개를 잃은 와이번들은 변변한 저항도 하지 못하고, 팀원들의 손에 목숨이 끊어졌다.
그 사이, 다시 살아남은 와이번들이 공격을 시도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후에도 몇 차례 와이번 무리를 조우했지만 같은 수의 공격으로는 팀원들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전투의 횟수가 거듭될수록 전리품의 무게만 더해질 뿐이었다.
그리고 절벽에 붙어있는 수십 개의 와이번 둥지가 눈에 보일 정도가 되었을 때, 창공을 뒤덮은 수십 마리의 와이번 떼가 나타났다.
개중에는 드래곤이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커다란 놈도 하나 있었다.
와이번 로드.
이 던전의 보스 몬스터였다.
“놈은 내가 맡겠다.”
와이번 로드는 1급 이상의 몬스터.
놈 한 마리라면 모를까, 수십 마리의 와이번까지 있는 상황이다.
팀원들만으로는 무리였다.
“예.”
팀원들은 간결하게 답한 후, 멀찍이 뒤로 물러났다.
만약을 대비해서라거나, 혹시 도움이 될까 싶다거나 하는 마음으로 어설프게 주변에 얼쩡거려봤자, 방해밖에 되지 않는 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키이익!!!
와이번 로드의 울음소리가 창공을 뒤덮으며 넓게 울려 퍼졌다.
앞서 죽어나간 와이번들에 대한 슬픔과 그들을 죽인 대상을 향한 분노 섞인 울음.
살을 에는 살기가 담긴 울음에 절정의 경지에 오른 팀원들의 몸에 소름이 돋아날 정도였지만 나는 한 점 미동도 없이 놈을 바라봤다.
수백 미터, 아니 수 킬로미터는 떨어져 있음에도 놈과 나의 눈이 맞닿았다.
커다란 눈을 통해 놈의 살의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반면, 내 눈에는 아무런 감정도 일지 않았다.
곧 죽음을 맞이하게 될 몬스터를 바라보는 내 시선은 무심할 뿐이었다.
곧이어 와이번 로드가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대지를 집어삼킬 기세로 떨어져 내리는 놈의 거체에 대기가 찢어발겨지는 듯 했다.
그러나 놈의 공격은 다른 와이번과 큰 차이가 없었다.
부리와 발톱이 몇 배는 크고, 날개는 하늘을 가릴 정도라는 것뿐.
촤아아악.
수십 마리의 와이번을 이끄는 놈이었지만 와이번 로드는 새로운 몬스터가 아니다.
공격 방법이 다르지 않은 만큼, 사냥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수 미터 높이로 솟아오른 강기가 와이번 로드의 날개를 잘라냈다.
절정의 검기와 A급 헌터의 마법으로도 고작 생채기만 만들어 낼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하고 질긴 날개였지만 강기에는 허망하게 느껴질 정도로 손쉽게 잘려나갔다.
콰쾅!
집채만 한 몸뚱이가 엄청난 속도로 땅에 처박혔지만 놈은 크게 충격을 받지 않았다.
와이번 로드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인지하지 못한 채, 커다란 눈알을 데굴 굴렸다.
그도 잠시.
와이번 로드의 괴성이 터져 나왔다.
뒤늦게 육체의 고통은 느끼지 못했지만 균형이 잡히지 않는, 다시 하늘로 떠오르지 못하는 육체에 날개가 잘려나갔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그 괴성도 길지는 않았다.
목이 잘린 상태에서는 더 이상 괴성을 내지를 수 없으니 말이다.
와이번 로드가 드래곤과 견줄 만큼, 강한 몬스터라고는 하나, 그뿐.
내 앞에서는 그저 한 마리 몬스터에 지나지 않았다.
키익. 키익.
로드의 죽음에 수십 마리의 와이번들이 혼란에 빠졌다.
이내 절반은 복수를 꿈꾸며 날아들었고, 나머지 절반은 둥지로 도망쳤다.
날아든 와이번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로드와 같은 신세가 되었다.
날개가 잘리고 몸뚱이만 남은 와이번의 시체가 차곡차곡 쌓였다.
수십 마리에 이르던 와이번은 이제 둥지로 피한 스무 마리밖에 남지 않았다.
놈들을 굳이 죽이지 않아도 공략은 가능했다.
보스 몬스터도 죽었고, 핵만 파괴하면 던전은 사라질 테니.
그러나 나는 남은 와이번들을 모두 죽이는 것을 택했다.
단순히 공략이나 하자고 던전에 들어온 게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