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
98화. 충돌.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진 탓에 태양 길드원 전원을 추살하지는 못했다.
역습에 대비해 전력을 흩어 놓지 않은 탓에 서른 명 가량을 죽였을 뿐이다.
“칠십이라. 생각보다 많이 놓쳤군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사실 수뇌부를 제외한 일반 길드원들은 서로 명령에 의해서 싸웠을 뿐인데, 그들을 모두 죽이는 것은 과한 처사입니다.”
살막의 편에 섰기에 적이 되었지만 한 때는 함께 한국을 지키던 동료였다.
길드원들 간에 대부분 일면식이 있을 정도고, 친분을 유지하는 경우도 많았다.
처음에는 같은 길드원의 죽음에 눈이 돌아가 추살했지만 점차 정신을 차리면서 손속에 사정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김원철도 마찬가지. 이번 전투로 떠나간 길드원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굳이 추격에 열을 올리지 않았다.
“그래도 수뇌부 대부분을 잃은 이상, 태양 길드는 굳이 건드리지 않아도 빠르게 와해될 겁니다.”
김원철이 말했다.
절반 이상이 살아 도망쳤지만 상관은 없었다.
길드의 힘은 B급 이상의 상위 헌터들을 얼마나 많이 보유하고 있는가에서 나온다.
그 중에서도 길드장을 비롯한 수뇌부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대게 가장 강한 헌터가 맡는 게 일반적이니까.
그런 길드장과 부길드장을 포함해 수뇌부 대부분을 잃은 이상, 태양 길드는 끝났다고 봐도 무방했다.
가만히 놔둬도 일반 길드원들은 그들이 약화되기만을 기다려온 세력들에 이리저리 휩쓸려 절로 스러질 테니 말이다.
“일단 잔존세력은 최대한 저희 측에서 흡수할 생각입니다. 이번에 잃은 전력을 보충하는 의미도 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그들이 태백이나 살막에 이용되는 것은 막아야 하니까요.”
처음 그가 말했던 대로 일반 길드원 대부분은 길드장 혹은 수뇌부들의 지시에 따랐을 뿐이다.
앞서 전투만 돌이켜봐도 알 수 있다.
전장에서 목소리를 높였던 것은 이미 살막의 편에선 수뇌부들뿐이었다.
일반 길드원들은 전투 내내 적극적이지 않았다.
숫자만 무려 배 이상 차이나는 전력이었다.
피해를 감수하고 공세에 나섰다면, 절대 버틸 수 없는 싸움이었다.
대부분이 같은 한국의 헌터들끼리 싸우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전력을 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알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길드 간의 문제는 길드의 생리에 대해 무지한 내가 나설 부분이 아니었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뜻을 함께하는 동료지 않습니까. 동료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김원철은 처음부터 내 편에서 나를 지원해준 사람이다.
당시에는 내가 성장하는 게 한국의 안위에 도움이 될 거라는 의도가 있었지만 지금은 살막이라는 공통의 적을 두고 뜻을 함께하는 동료다.
그가 나를 믿고 따라주는 만큼, 나 또한 그를 믿어 줄 것이다.
***
피해가 적었다고는 하나 사상자가 발생한 전투다.
수습이 필요했고, 그 와중에 원 길드의 나머지 헌터들과 신의, 주작 길드의 헌터들이 도착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태백 길드의 습격이 있었습니다.”
그들도 원 길드와 마찬가지로 습격을 받았다.
태양 길드의 S급 헌터까지 포함된 전력이 그들의 앞길을 막아섰기에 제 때 지원을 오지 못한 것이다.
“다만, 놈들은 저희와 전투를 벌이기보다는 발을 묶어 놓고자 하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전투가 발생하긴 했지만 그들 또한 치열한 전투를 치른 것은 아니었다.
태백 길드는 그저 발을 묶고자 했을 뿐, 섬멸전을 원하지 않았다.
때문에 그들이 물러날 때까지 국지전의 형태로 양측 다 큰 피해 없이 전투가 마무리된 상황이었다.
“그들의 목적은 저 하나였을 겁니다.”
별채에서 있었던 폭발과 독, 그리고 자운을 비롯한 살수들까지.
모두 나를 향해 벌어진 일이다.
태백과 태양 길드의 개입은 곁가지일 뿐이다.
애초에 모든 함정들이 헌터들을 노렸다면, 충분히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힐 수 있는 준비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헌터들을 노리지 않았다.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는 너무나도 명확했다.
“역시...”
대부분의 헌터들 또한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헌터들에게 행해졌던 태백과 태양 길드의 공격은 나를 돕기 위한 지원을 끊기 위함일 뿐이다.
때문에 일반 길드원들의 마음과 맞물려 전투가 치열하게 돌아가지 않은 것이다.
일전에 중국 헌터들과의 결전에서도 일부는 눈치 채고 있었다.
전투의 치열함에 가려져 있었을 뿐이지, 중국 헌터들이 한국의 헌터들을 보는 시선은 적이라기보다는 목적을 방해하는 걸림돌 정도로 여긴다는 게 피부로 느껴질 정도였다.
그들의 수장인 여문휘부터 시작해, 모든 살의가 오로지 태빈 한 명에게 쏠려 있었다.
“뭐야? 그런 거였어?”
“저 헌터 때문에 싸우지 않아도 될 싸움을 한 거야?”
사정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일부 길드원들 사이에 나를 보는 시선이 안 좋아졌다.
괜한 싸움에 끼어 애꿎을 피를 흘렸다는 의미가 담긴 시선이었다.
이 자리에 모인 헌터들 모두가 살막에 적의를 불태우는 것은 아니다.
태백이나 태양과 마찬가지로 단순히 길드장의 결정에 따르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 입장에서는 태빈 한 사람으로 인해 불필요한 피해를 입은 셈이었으니, 바라보는 시선이 마냥 고울 리 없었다.
“시선이 김태빈 헌터에게 집중된 덕분에 피해가 줄어 다행입니다.”
“살막은 언제고 부딪쳐야 할 적. 살막의 정예 삼백을 제거한데 이어, 태양 길드마저 격퇴시켰으니, 살막의 힘은 크게 꺾였을 겁니다.”
물론 모두가 그렇게 보는 것만은 아니었다.
살막에 굴복하지 않으려면, 결국 맞서야 하는 상황에서 A급 이상만 삼백이 넘는 전력을 제거했고, 한국 내에서 살막의 편으로 돌아선 두 개의 길드 중, 한 개 길드를 격퇴했다.
피할 수 있던 전투였을지는 몰라도, 얻은 성과는 태빈이 없었더라면, 결코 불가능했을 것이다.
중국 헌터와의 결전에서는 권왕이라는 자가 보여줬던 전율적인 무위와 SS급마저 뛰어넘은 태빈과 대등한 싸움을 벌였던 여문휘, 그리고 수 명의 S급 헌터들을 생각하면, 승리는커녕 전멸을 면했으면 다행일 정도다.
또한 두 명의 S급 헌터를 보유한 태백, 태양 길드는 아군 전력과 백중지세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적을 상대로 고작 수십 단위의 피해만 입었다는 것은 분명 유의미한 성과였다.
“그렇지만 철민이가...”
“민우가...”
나에게 부정적인 시선을 보내는 길드원들도 그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동료를 잃은 슬픔으로 인해 잠시 감정이 격해졌을 뿐이다.
그것을 모르지 않기에 나는 그들의 시선을 겸허히 받아들였다.
어쨌거나 내게 힘이 되어준 전력이다.
살막과 맞서기로 한 이상, 내가 안고 가야 할 책임이었다.
***
한국의 고위 관리 수십과 국가주석을 제외한 중국 방한단 전원이 테러로 규정된 사건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삼백오십 명의 방한단 중, 삼백이십 명은 우리 측과의 전투 때문에 죽었지만 양국 모두 테러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발표했다.
나와 뜻을 함께하는 헌터들은 진실을 알고 있었지만 밝힐 수 없는 진실이었다.
살막이 온 힘을 다해 한국을 침공하지 않은 것은 겉으로나마 한국 정부가 그들에게 고개 숙였기 때문이다.
내 존재로 인해 막주인 여문휘를 비롯해 정예 전력을 투입해 오긴 했지만 살막이 진정으로 마음먹고 한국을 집어삼키고자 한다면, 고작 수백이 아니라 수천수만의 헌터들이 넘어 올 것이다.
지금 내게는 그들을 막을 힘이 없기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진실을 밝힌다 해도 믿을까 싶기도 하다.
살막이라는 거대한 단체가 중국을 집어 삼켰고, 그들이 한국을 복속시키기 위해 자신들의 뜻에 반하는 이들을 죽이기 위해 움직였다 역으로 실패했다?
음모론을 좋아하는 이들이나 솔깃할 내용이지, 현대 사람들이 믿을 만한 얘기는 아니었다.
믿는다 해도, 중국이라는 강대한 힘 앞에 한국 정부처럼 대항의 의지를 잃고, 고개 숙여버릴지도 몰랐다.
“중국이 이번 피해에 대한 보상을 요구해 왔다고 합니다.”
어쨌건, 중국은 한국에 이번 테러에 대한 책임을 물어왔다.
자신들이 일으킨 사건이었지만 세간에 알려진 바로는 한국에서 일어난 테러에 중국 방한단이 휩쓸렸다는 것뿐이다.
그들의 안위를 지키지 못한 건, 한국에 책임이 있었고, 보상을 요구하는 중국의 주장은 정당했다.
“한국 정부도 모종의 세력에 의한 테러임을 인정했으니. 보상을 해야 하긴 하겠지만 이 미친놈들이 아주 작정을 한 모양입니다.”
“허...”
그러나 중국 측의 요구를 확인한 나는 헛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중국 측의 요구는 정당했지만 김원철이 분노를 토하고, 내가 헛웃음을 흘릴 정도로 과했다.
금전적인 보상을 요구하진 않았다.
대신 중국은 이번 기회에 한국과 갈등이 있던 대부분의 문제들을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재정립하고자 했다.
변혁 이후로 바다 자원의 가치가 하락한 탓에 조금은 잠잠해지긴 했지만 계속해서 문제가 돼왔던 서해상의 영해문제부터, 동북공정 프로젝트의 인정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을 보상 운운하며 요구해 온 것이다.
한국 정부 또한 분명 중국이 벌인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진실을 드러낼 수 없다는 사실을 이용한 뻔뻔한 요구였다.
“정부는 뭐라고 합니까?”
“모르겠습니다. 아직 이렇다 할 대답을 내놓지 않고 있습니다. 단번에 거절해도 부족할 판에 뭐하자는 건지...”
김원철이 고개를 저으며 투덜거렸다.
아직 어떤 결정이 난 것은 아니었지만 대답을 유예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정부의 대응이 불만스럽지 않다는 투였다.
“과거나 미래보다 현재 자신의 안위가 중요한 자들이 아닙니까? 이미 한 번 굴복한 자들인데, 두 번, 세 번이라고 못하겠습니까.”
“그런 자들이 한 나라를 이끌어 간다니... 하...”
김원철이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그래도 이번 일로 마음을 돌린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저희가 그들의 정예를 상대로 대승을 거둔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별채에서 주저 없이 폭발을 일으킨 것으로 인해 살막이 자신들의 목숨을 지켜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까요.
물론 자신의 안위에 위협이 된다 싶으면 언제든 변심할 수 있는 박쥐같은 자들이긴 하지만 당장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겁니다.”
김원철의 말대로 언제든지 변심할 수 있는 자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한국 정부는 여전히 국민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 힘이 변혁 이후에도 정부가 유지되고 있는 이유다.
무지한 사람들은 정부의 영향 아래 협회와 길드들이 존재하고 있다고 알고 있는 정도니.
대부분이 여전히 정부가 자신들을 지켜주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정부가 가지는 힘을 마냥 무시할 수 없었다.
“태양 길드원의 포섭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절반 이상을 흡수한 상태입니다. 총 팔할 가량을 흡수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와해된 태양 길드는 원, 주작 길드가 흡수하는 중이었다.
신의 길드는 표면적으로 해체한 상태이기 때문에 그들을 포섭하는데 나설 수 없었다.
어쨌건, 팔할을 흡수하고 나면, 앞서의 전투로 잃었던 전력을 회복하는 것을 너머 약간 늘어나는 정도다.
나름 모든 게 순조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