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
97화. 자운(2).
반쪽짜리 화경이었던 혈귀와 비슷한 수준의 자운과 초절정에 육박한 네 명의 수하들.
선천지기를 끌어올렸기 때문에 이대로 시간만 끈다면, 스스로 자멸할 테지만 그럴 여유는 없었다.
“막아!”
“곧 지원이 도착한다! 조금만 더 버텨!”
지금까지 잘 버티던 원 길드원들 사이에 하나둘 사상자가 발생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상대측의 전력이 배 이상 강한 상황이다.
아무리 방어에 집중한다 해도 완벽할 수는 없었다.
“후.”
긴 호흡과 함께 내공을 힘껏 끌어 올렸다.
간신히 억눌러 놓았던 독 기운이 다시 날 뛸 빌미를 주게 되겠지만 독을 걱정하면서 상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검에 선명한 강기가 치솟았다.
억눌러놨던 독 기운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스멀스멀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촤아악.
네 개의 검이 목과 팔다리를 노리고 쏟아졌다.
절체절명의 순간이었지만 내 얼굴에는 오히려 미소가 어렸다.
어느새 왼손에 들려진 단검이 팔을 노리는 검을 쳐냈다.
단검에 의해 아래로 쳐내진 검이 다리를 향하던 검을 막아주었다.
왼손으로 두 개의 공격을 무력화시키고, 오른손의 검은 목을 향해 그대로 찔러 들어갔다.
살수의 검이 명검을 넘어 보물급이라면 모를까, 강기서린 검을 막아 낼 수 있을 리 없었다.
검 끝과 검 끝이 맞부딪치는 순간, 살수의 검이 산산조각 나며 비산한 조각들이 역으로 살수에게로 향했다.
마지막 심장을 노리던 하나는 몸을 비틀어 피한 뒤, 검을 부순 그대로 오른손을 내질렀다.
촤아아악.
그 사이, 자운의 검이 내 가슴팍을 길게 가르고 지나갔다.
비틀던 몸을 한층 더 비틀어 흘려내긴 했지만 이전과 같이 완벽하게 피하고자 하지 않았기에 핏물이 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갈라진 가슴에서 흘러나온 피가 앞섬을 축축하게 적셨다.
그러나 새겨진 상처가 결코 손해는 아니었다.
푸욱.
내질러진 내 검이 살수 하나의 심장을 정확히 꿰뚫었다.
가슴이라는 살을 내어준 대가로 나는 단순히 뼈를 잘라내는 정도가 아니라 심장까지 잘라냈다.
“크...어억.”
심장이 잘린 살수가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그대로 절명했다.
자운과 수하들은 동료의 죽음에도 아랑곳 않았다.
오히려 내 가슴에 새겨진 상흔에 의기양양한 표정이었다.
“넷.”
나 또한 마주 미소 지었다.
이제 넷이 남았다.
***
“크크... 목숨을 바쳐도 화경의 벽은 넘을 수 없는 건가...”
눈에서 귀기가 반쯤 사라진 자운이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자운의 곁에 서있던 네 명의 살수들 중, 더 이상 제 발로 서있는 살수는 없었다.
여태 살아있는 것은 오직 자운뿐이었다.
그러나 단지 살아있을 뿐, 그 또한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다.
왼팔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도 않았고, 갈라진 배에는 내장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오른손으로 내장이 흘러나오지 않도록 막고 있는 게 전부였다.
“상대가 나빴다.”
내 말 대로 상대가 나빴다.
평범한 화경의 무인이었다면, 그들의 공격이 통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게는 아니었다.
자운과 마찬가지로 나는 땅바닥에 구르는 나려타곤의 수를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일어나며 손에 쥔 모래를 뿌리는 것도 망설이지 않았다.
이에 자운 등은 입으로 핏물을 뱉어대고, 잘린 옷가지를 던져 시선을 가리기도 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치졸한 수도 서슴지 않는 싸움이었다.
강기와 검기만 제하고 본다면, 동네 왈패들이나 벌일 법한 개싸움.
그 안에서 목숨을 걸고 안 걸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물론 나 또한 마냥 멀쩡하지는 않았다.
처음 자운에게 당한 가슴팍의 자상에 이어 자잘한 부상 몇 개가 더 생겨나 있었다.
특히 살점이 한 움큼 떨어져 나간 허리춤은 혈도를 집었음에도 지혈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을 정도였다.
“그렇군.”
자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잊고 있었다.
눈앞의 태빈은 그런 자라는 것을.
화경이라는 지고지순한 경지에 올라섰음에도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과거에도 살왕이라 거론되기까지 했던 자가 막주에게 처음 암습을 행한 곳이 측간이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그런 그를 무인으로 가정하고, 상대하려 했으니.
저벅 저벅.
자운이 비척거리며 나에게로 다가왔다.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기에 나 또한 검을 들어올렸다.
이미 소생이 불가능한 부상을 입은 상태라고는 하나, 방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운은 수 미터 앞까지 다가온 상태에서도 공격할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의 몸이 급속도로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이런.’
나는 재빨리 몸을 뒤로 물렸다.
자운에게서 보이는 증상은 폭렬공의 전조였다.
한 대의 대주인 자운까지도 폭렬공을 익히고 있다니, 살막의 잔악함에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콰콰쾅!!
곧이어 자운의 육신이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며 터져나갔다.
터지기 직전 자운의 입 꼬리가 슬쩍 말려 올라갔다.
내가 피하지 못할 거라 생각한 것이다.
확실히 초절정 고수가 펼치는 폭렬공은 일류 무인들의 폭렬공과는 파괴력부터가 달랐다.
수천수백 조각의 살점과 뼛조각이 암기가 되어 비처럼 쏟아졌고, 일대가 터져나가며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겨났다.
그 여파로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는 대지에 수백 미터는 떨어져있던 원 길드와 태양 길드 간의 전투가 일순 멈출 정도였다.
“큭!”
내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이미 적지 않은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독 기운으로 인해 진기마저 원활하지 않은 탓에 폭렬공의 범위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다행히 그 영향이 크진 않았다.
앞서 폭렬공을 경험해봤기에 망정이지, 눈치 채는 게 조금만 늦었다면 위험할 뻔했다.
털썩.
나는 쓰러지는 척, 그 자리에 그대로 누워버렸다.
부상에 이어 폭렬공의 핏물까지 잔뜩 뒤집어쓴 탓에 기감이 예리한 자가 아니라면, 영락없이 죽었다고 착각할 모양새였다.
“김태빈 헌터!”
A급 헌터인 김원철 마저 속았을 정도이니.
물론 아군인 그에게는 전음으로라도 말해 줄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보다 상태를 회복하는 게 급했다.
나는 엎드린 상태에서 와공으로 운기를 시작했다.
좌공에 비해 효율이 떨어지긴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편히 운기를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곧장 다시 날뛰기 시작한 독 기운을 완전히 몰아내는데 주력했다.
급한 대로 억눌러 놨던 게 자운 등과 싸우는 사이, 전신에 퍼져 몸을 무력하게 만들고 있었다.
독뿐만 아니라, 부상도 심각하긴 했지만 당장 목숨이 위험할 정도는 아니었다.
투투둑.
전신에 퍼져 진기를 갉아 먹던 독 기운은 거대한 내력에 금세 힘을 잃었다.
지금까지는 전투와 병행해야 했기 때문에 독 기운에 집중하지 못했을 뿐이다.
독곡의 칠보추혼산이나 당문에 전설로 내려오는 무형지독 정도라면 모를까, 내 내력은 내공을 흩어버리는 산공독의 상위호환 정도에 불과한 지금의 독 기운이 버텨낼 수준이 아니었다.
나는 힘을 잃은 독을 한데 모아 그대로 체외로 방출시켰다.
뚝.
고작 한 호흡도 되지 않게 들이 마신 독이었다.
한 방울도 채 안 되는 독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 뒤, 내공을 일주천하며 몸을 가다듬었다.
고작 일주천 한 번으로 완전히 회복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지만 급한 불을 끌 정도는 되었다.
그리고 그 정도면, 당장의 상황을 정리하기에는 충분했다.
***
자리를 털고 일어난 나는 곧장 원 길드와 태양 길드 간에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폭렬공으로 인해 잠시 멈췄던 전투가 다시 치열해진 상황이었기 때문에 내 접근을 눈치 챈 이는 없었다.
“크윽! 더 이상 못 버텨!”
“보호 마법 빨리!”
원 길드원들이 무너져가는 방어를 어떻게든 유지하기 위해 애쓰고,
“얼마 안 남았다!”
“저 놈 흔들린다!!”
“화력 집중해!!”
태양 길드는 그 방어를 뚫어내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중이었다.
물론 모두가 두 눈을 부릅뜨고 나를 지켜보고 있는 와중이라 해도, 나는 그들의 시선을 속일 자신이 있었다.
내 은잠술은 절정에도 미치지 못하는 헌터들이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경지가 낮지 않았다.
적어도 초절정 정도는 되어야, 이상한 낌새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낌새를 느끼는 순간, 죽음을 맞이하겠지만 말이다.
스윽.
전장 속에 스며들었던 내 신형은 한 헌터의 뒤에서 드러났다.
권혁준.
아까 김원철과 마주했을 때, 봐두었던 태양 길드의 길드장이다.
권혁준의 그림자 속에서 솟아난 나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권혁준의 등을 찔렀다.
이미 살막의 편에 서서 자국의 헌터들에게 검 끝을 겨눈 자다.
살려 둘 이유가 없었다.
“컥... 누...”
불의의 기습을 당한 권혁준이 단말마의 비명을 토해냈다.
억지로 고개를 돌려 자신의 등을 찌른 자의 얼굴을 보고자 했지만 그에게 허락된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고개를 반쯤 돌리던 권혁준은 결국 내 모습을 보지 못한 채, 앞으로 꼬꾸라졌다.
“길드장님!”
권혁준이 갑작스레 쓰러지자, 근처에 있던 헌터들이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처음에는 단순히 과로? 따위로 쓰러진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가슴팍에서 흘러나오는 핏물은 권혁준이 단순히 쓰러지게 아니라, 숨이 끊어졌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길드장님이... 죽었...다.”
“대체 누가...?”
누군가 뒤늦게 맥박을 확인했지만 당연히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려 봐도 흉수 또한 찾을 수 없었다.
태양 길드 한 가운에서 발생한 길드장의 죽음에 혼란은 빠르게 번져갔다.
“정신 차려라!”
누군가 혼란에 빠진 헌터들을 수습하고자 나섰다.
태양 길드의 부길드장, 성중이었다.
그리고 성중은 내 다음 희생양이 되었다.
푸욱.
목소리를 높이며 혼란을 수습하던 성중의 미간에 어디선가 날아든 단도 하나가 틀어박혔다.
자신에게 날아든 빛살을 본 것이 성중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죽음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성중의 사위가 어둠속으로 물들었다.
“기습이다!”
“누구냐?!”
성중의 죽음으로 드러나지 않은 흉수가 자신들을 노리고 있음을 알게 된 헌터들이 바짝 경계하며 주변을 두리번댔다.
그러나 그 정도로 나를 찾을 수 있었다면, 권혁준과 성중이 나에게 당했을 리도 없었다.
그 둘은 태양 길드 내에서도 가장 실력이 뛰어난 이들이었다.
“히익...귀신이다!”
“으아아! 난 죽기 싫어.”
“도망쳐!”
그렇게 몇 차례 살행을 행하자, 헌터들의 혼란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격화됐다.
부길드장에 이어, 공략 대장들까지 줄줄이 죽어나가니, 누구하나 나설 생각을 하지 못했고, 자신의 목숨을 걱정하기 바빴다.
보이지 않는 흉수에 의해 죽어가는 헌터들의 수가 늘어나자, 겁에 질린 헌터들은 결국 뒤도 보지 않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놈들이 도망친다!”
“추격해 섬멸해라!”
정신없이 도망치는 태양 길드원의 모습에 사기충천한 원 길드원들이 방어 태세를 풀고, 거세게 추격했다.
오로지 방어에 치중하며 하나둘 죽어가는 동료들의 모습에 독이 잔뜩 올라 있던 원 길드원들이었다.
도망치는 태양 길드원들을 향한 그들의 손길에 자비란 없었다.
등 뒤를 공격당한 태양 길드원들은 힘없이 바닥에 고개를 처박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