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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살수다-96화 (96/150)

# 96

96화. 자운.

A급이 다수 섞여 있었지만 청와대 경호팀이기에 의심하지 못했다.

아니 청와대가 아닌, 별채에서 쏟아져 나온 이들은 전부 살수들이었다.

서로 안면이 없는 듯, 청와대 경호팀과 뒤섞여 있음에도 어색함이 감돌았었다.

독에 정신이 팔려 미처 눈치 채지 못했을 뿐.

“적이다!”

뒤늦게 대항하기 시작했지만 청와대 경호팀은 이미 대부분이 싸늘한 주검으로 변한 뒤였다.

독에 중독되긴 했지만 쓰러져 있는 정우람이 운이 좋은 편이었다.

그래도 한차례의 암습 뒤에는 김원철이 헌터들을 진두지휘하며 살수들을 맞섰다.

고작 스무 명 남짓의 살수들이다.

기습으로 상당한 이득을 보긴 했지만 당연하게도 기습에 한해서다.

급한 대로 끌고 온 탓에 오십밖에 되지 않았지만 전원이 원 길드의 정예.

원 길드의 정예는 살수와 정면 대결에서까지 밀릴 정도로 약하지 않았다.

문제는 멀찍이서 이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태양 길드의 길드원들이었다.

얼핏 봐도 백 명은 훌쩍 넘어 보였다.

살막에 포섭된 게 확실한 태양 길드는 명백한 적.

살수들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백 명에 달하는 태양 길드까지 마주한다면, 원 길드에 승산은 없었다.

“당장 지원 요청해!”

“길드장님! 통신이 먹통입니다.”

김원철이 다급히 소리쳤지만 이미 일대가 통신 교란 범위에 들어갔는지, 연락이 되는 곳이 없었다.

김원철의 얼굴이 굳어졌다.

당장 눈앞의 살수를 비롯해 백여 명의 태양 길드원들이 포위해오고 있는 상황이다.

뒤따라오고 있는 나머지 길드원들과 신의, 주작 길드의 헌터들도 있었지만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태백 길드가 마음에 걸렸다.

“방어에 집중하고 버티십시오. 금방 처리하고 돕겠습니다.”

살수들의 기습을 한 차례 막아낸 내가 외쳤다.

절정 넷과 초절정 하나.

평소의 나라면, 전혀 걱정할 필요 없는 전력이지만 아직까지도 독 기운이 진기의 수발을 방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볍게 볼 수 없었다.

물론 까다롭다 뿐이지, 상대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배 이상의 적을 상대하게 될, 김원철 보다는 상황이 나았다.

“알겠습니다. 살수들 최대한 척살하고 방어 태세에 돌입한다!”

김원철이 헌터들에게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태양 길드를 상대로 방어 태세에 돌입한다 해도, 살수들이 활개 치면 방어마저도 쉽지 않을 것이다.

태양 길드가 도착하기 전까지 스무 명 남짓한 살수들을 얼마나 줄여 놓을 수 있는가가 관건이었다.

헌터들은 김원철의 지시에 따라 살수들을 빠르게 척살했다.

살수들이 격렬하게 저항하긴 했지만 드러난 살수는 확실히 무기력했다.

눈 깜짝할 새에 절반이상의 살수들이 벌써 바닥에 놈을 뉘었다.

그러나 전부 처리하지는 못했다.

이제 일곱 정도만을 남겨 놓고 있을 때,

“김원철 협회장님. 아니 이제 길드장님이라 부르는 게 맞겠군요. 이렇게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태양 길드장 권혁준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김원철을 바라봤다.

그 뒤로는 어느새 사방을 포위한 태양 길드원들이 원 길드원들을 향해 무기를 겨누고 있었다.

“....”

김원철은 분노를 속으로 삼키며 말없이 검을 들어올렸다.

***

김원철이 태양 길드와 마주했을 때, 나 또한 다섯의 살수들과 치열한 전투를 지속하고 있었다.

“독에 중독됐음에도 이 정도라니. 역시 대단하구나. 무영살.”

“암영대인가.”

살막의 암영대는 여문휘를 죽였을 때, 마주한 자들은 아니다.

백살문의 문주와 함께 나를 죽일 천라지망을 획책한 자들이었다.

그들 또한 결국 내 손에 대부분이 죽음을 맞이했지만 암영대만 아니었다면, 나는 천라지망을 벗어날 수 있었을 지도 모를 정도로 상대하기 까다로운 자들이었다.

“크크. 그 때는 제대로 통성명도 못했군. 암영대주 자운이다. 네 놈도 이 세계에 있는 것을 보니, 결국 천라지망을 벗어나지 못한 모양이구나.”

“살막의 개들이 또 내 손에 죽고 싶어 나타났나 보군.”

“주인에 대한 충심으로 초개와 같이 목숨 바친 개가 주인에게 팽 당한 개새끼보다는 낫지 않겠나. 팽을 당했으면, 얌전히 솥에 들어갈 것이지.”

암영대주 자운이 비웃음을 흘렸다.

“그런 개새끼 하나를 상대로 몰려든 주제에 말이 많구나.”

나 또한 마주 비웃음 지으며 검을 들어올렸다.

자운은 나를 도발하려 한 말이겠지만 나 스스로도 내가 개새끼였음을 안다.

결국 쓸모가 다해 팽 당한 것도 부정할 수 없고.

“흥! 쳐라!”

도발이 통하지 않자, 자운은 더 이상 말로 하지 않았다.

곧장 나를 향해 몸을 날렸다.

나머지 수하들도 함께였다.

상대는 독에 중독된 상태.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암영대원들은 살수의 기본인 은잠술은 물론이고, 암기술과 기문진식 등에도 능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의 연수합격은 능히 한두 수 위의 고수를 위협할 만한 수준이었다.

채채챙!

검과 검들이 부딪쳤다.

사방을 압박해 오던 네 개의 검은 내 검에 맥없이 튕겨져 나갔다.

독 때문에 온전치 않다고는 하나, 강기가 서린 검을 고작 검기로 이겨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앞선 네 개의 공격은 단 하나의 공격을 숨기기 위한 허초에 가까웠다.

자운의 검이 그 뒤에 숨어 찔러 들어오고 있었다.

서걱.

나는 허리를 뒤로 접는 철판교의 수법으로 흘려보냈다.

옷 앞섬이 살짝 잘려 나갔지만 이미 헤진 옷이다.

좀 더 상한다 해도 상관은 없었다.

촤아악.

내가 뒤로 젖혔진 몸을 일으켜 세우며 검을 크게 휘둘렀다.

튕겨져 나간 네 개의 검이 재차 나를 노려오고 있었지만 내 검이 더 빨랐다.

좌측 두 개의 검을 쳐내며 수하 하나의 가슴팍을 갈라낸 내 검은 도중에 경로를 바꿔 곧장 자운을 향했다.

“네 놈은 개가 아니라 당나귀였구나.”

검을 회수하는 순간 가해진 공격이었기에 피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자운은 땅바닥을 굴렀고, 이는 바닥을 구르는 게으른 당나귀를 연상시켜 모든 무인들이 수치로 여기는 나려타곤이었다.

“흥!”

무인이라면, 차라리 죽음을 택할 정도로 부끄러운 수였지만 자운은 개의치 않았다.

상대를 죽일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존재가 살수다.

똥통에 처박혀 삼박사일을 숨어 지내는 일이 다반산데, 고작 나려타곤 정도로 수치심을 느낄 리 없었다.

바닥을 구르는 자운을 향해 검을 내지르고 강기를 뿌렸지만 자운은 몇 번이고 바닥을 굴러 위기를 모면했다.

그로 인해 애꿎은 땅만 꿰뚫리고 파여 나갔다.

“대주!”

내가 자운을 집중적으로 노리자, 수하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고작 절정에 이른 이들이었지만 사방에서 동시에 쏟아지는 공격은 꽤나 매서웠다.

그로 인해 자운에 대한 공격을 계속 이어 갈 수는 없었다.

“네 놈이 언제까지 그리 여유로울 수 있을까.”

내가 한 차례 방어에 집중하는 사이, 자운이 자세를 바로 잡았다.

계속해서 바닥을 구른 탓에 먼지투성이였지만 자존심을 버린 대신 몸은 멀쩡했다.

앞서 가슴팍이 잘린 수하 또한 애초에 자운이 목표였기에 무력화 시킬 정도로 깊게 베진 못했다.

“후우... 후우...”

몇 차례의 공방이 오고갔다.

놈들은 내가 독에 중독됐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크게 무리하지 않았고, 그들의 노림수대로 나는 잠깐 사이에 호흡이 상당히 거칠어졌다.

계속해서 진기를 끊어먹는 독 기운 탓이다.

“전생에 이어 현생까지. 정말이지 질긴 인연이구나.”

그러나 자운의 상태도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옷은 넝마가 된지 오래였고, 드러난 몸은 온통 피 칠갑을 하고 있었다.

그의 수하들도 마찬가지.

나와 공방을 지속했다고는 하나, 화경이라는 벽을 넘어선 나와의 격차는 하늘과 땅차이다.

독의 힘을 빌려 간신히 지금까지 버텨낼 수 있었을 뿐이었다.

“이번에는 기필코 저승으로 보내주마.”

자운이 품에서 꺼낸 붉은 단약을 단숨에 집어삼켰다.

“으아아!!”

붉은 단약을 삼킨 자운이 괴성을 내질렀다.

단약의 영향인지 그의 몸이 살짝 부풀어 올랐고, 힘줄이 터질 듯 튀어나왔다.

붉게 변한 눈에서는 귀기가 흘렀다.

“크으으.”

목소리 또한 쇠를 가는 듯, 괴기스럽게 변했다.

“대주!”

수하 넷이 변한 자운의 모습을 보며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리고는 단전부터 시작해, 백회혈까지. 하나같이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사혈들을 차례로 집어 나갔다.

기이한 행동이었지만 나는 그 행동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자운의 수하들이 건드린 혈도들은 하나같이 선천지기를 자극하는 곳들이었다.

선천지기.

내공과 같이 후천적인 노력으로 쌓을 수 있는 기운이 아닌, 인간 본연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기운이다.

선천지기는 본래 살아가면서 천천히 소진되는 기운으로, 인간의 죽음은 선천지기가 다했음을 의미했다.

그런 선천지기를 사용한다는 것은 생명을 불태우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과연, 생명의 대가로 절정에 불과했던 수하들의 몸에서 초절정에 근접한 기운이 느껴졌다.

파앙!

순간, 자운이 땅을 뒤집으며 쏘아졌다.

제 자리에 흐릿한 잔상이 남을 정도였다.

이형환휘.

완벽하진 않지만 초절정의 무인이 보일 수 없는 경지다.

자운이 삼킨 붉은 단약도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수하들이 선천지기를 쓰는 것과 유사한 효과가 있는 듯했다.

본신의 힘을 몇 배로 끌어 올려주는.

콰앙.

전투의 양상이 방금 전과 사뭇 달라졌다.

수하들을 앞세운 채, 집요하게 빈틈을 노려오던 자운이 동귀어진도 불사한 듯 과감하 공격을 뿌려댔다.

순식간에 사혈을 노린 수차례의 검격과 품속에서 튀어나오는 암기들까지.

화경까지는 아니더라도, 붉은 단약을 복용한 자운은 혈귀보다 반 수 정도 강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그들이 단약을 섭취하고, 선천지기를 끌어올리는 동안 나라고 놀고 있던 것만은 아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들이 나타나기 전부터 독 기운을 몰아내기 위해 힘쓰고 있었다.

전투 중에도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지 못한 것은 절반 이상을 독 기운을 억누르는데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는 독 기운을 한데 뭉쳐 놓는 데는 성공했다.

아예 제거하지는 못했지만 더 이상 무공을 펼침에 있어 제약을 받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그도 잠시.

완전히 제거하지 않는 한, 독 기운은 다시 나 몸을 잠식해 나갈 것이다.

자운 등과 마찬가지로 나도 한 시 빨리 승부를 내야 했다.

“동귀어진이라도 할 셈인가.”

“화경의 고수와 함께라면, 그리 손해는 아니겠지.”

이미 반쯤 이성을 잃고 괴기스러운 울음 소리만 흘려대고 있는 자운을 대신해 수하 하나가 답했다.

선천지기를 끌어올렸기 때문인지, 그들 또한 단지 자운에게 틈을 만들어주기 위해 시선을 끌던 것과는 달리, 이미 생을 포기한 듯 방어를 도외시 한 채 공격일변도로 돌아섰다.

하나같이 육참골단 혹은 동귀어진의 수였다.

하긴 선천지기를 억지로 소모하기 시작하면, 살아남는다 해도 운이 좋아야 폐인이다.

살아도 산 게 아닌 삶밖에 남아있지 않는데, 굳이 몸을 아낄 이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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