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
94화. 도주(3).
청와대로 돌아온 여문휘의 상태는 썩 좋지 않았다.
불에 탄 옷은 넝마나 다름없었고, 안색이 파리하게 질려 몸을 덜덜 떠는 것이 꼭 마약중독자처럼 보였다.
그로 인해 한국 정부는 발칵 뒤집어졌다.
국가주석과 수백의 헌터들이 갑자기 사라진 것만으로도 충분히 소란스러웠다.
알 만한 사람들은 이유를 알고 있긴 했지만 전부가 아는 것은 아니었고, 온갖 추측이 흘러나오는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 함께 사라졌던 삼백의 헌터들은 온데간데없고, 여문휘만 홀로 돌아온 것이다.
그것도 만신창이가 되어서.
중국의 국가주석이 한국에서 변고를 당한 것이 확실했으니, 정부 인사들 입장에서는 최악의 사태였다.
“다행히 독을 피하진 못한 모양이군요.”
그러나 나로서는 반가운 일이었다.
정황상, 독에 중독된 게 확실했다.
곧장 힐러 등에게 치료를 받을 수 있었던 나와는 달리, 홀로 추적을 피해 도망치느라 해독할 새도 없었던 모양이다.
물론 마음먹고 정양한다면, 오래지 않아 해독해낼 수 있겠지만 나는 그를 가만히 놔둘 생각이 없었다.
“바로 청와대로 가겠습니다. 여문휘의 동향을 주시해주시기 바랍니다.”
“예. 알겠습니다.”
나는 곧장 청와대로 향했다.
***
“방한단의 잔존 인력이 아예 접근을 불허한 채, 철통같이 지키고 있는 탓에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여문휘는 우측 별채에 머물고 있다고 합니다.”
김원철이 대강의 사정을 설명했다.
청와대에 도착한 여문휘는 곧장 별채에 틀어박혔다.
설명을 요하는 한국 정부 인사들은 물론, 자국의 누구와도 만나지 않은 채 두문분출 하고 있었다.
독 때문일 가능성이 높았다.
중독됐다면, 무엇보다 해독이 우선일 테니, 누군가를 만나고 할 겨를조차 없었을 것이다.
“제가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경비가 삼엄합니다. 발각되기라도 한다면, 국가 간의 문제로 번질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여문휘가 말도 없이 사라졌었다고는 하나, 국가주석이 타국에서 해를 입었다.
그것만으로도 중국과의 관계는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됐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청와대 내부에서 여문휘가 죽기라도 한다면, 상황은 더 심각해진다.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물론 중국 측은 이번 일로 헌터 전력에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중국의 군대까지 그 힘을 잃은 것은 아니다.
헌터들이 주요 인사를 암살하거나, 게릴라전에 특화되어 있기 때문에 중요한 전력으로 떠오르고 있긴 하나, 중국은 인구만큼이나 군사력이 막강한 나라다.
헌터들이 아무리 대단한 능력을 가졌다 해도, 인해전술로 밀고 내려오면 쉽지 않은 전투가 될 것임은 자명했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나는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로 작게 고개를 끄덕인 뒤, 별채로 향했다.
여문휘를 죽일 생각이긴 하지만 그 흔적이 남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미 한 번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던 여문휘다. 또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
별채 입구에는 몇몇 정부 인사들과 스무 명의 중국의 방한단이 뒤섞여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대기 중이었고, 방한단 측의 헌터로 보이는 십여 명의 인원이 별채를 에워싼 채, 경비를 서고 있었다.
그러나 고작 십여 명 뿐이었기 때문에 경비가 그리 촘촘하지는 않았다.
헌터 외에도 별채 자체에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는 듯했지만 이 또한 경계해야 할 수준은 아니었다.
‘문제는 여문휘겠지.’
나는 은밀하게 별채가 만들어낸 그림자 속으로 녹아들었다.
방한단의 수준은 그리 높지 않았지만 주의를 기울였다.
겉으로 드러나 있는 경계가 전부가 아닐 수도 있고, 어설프게 접근한다면 여문휘가 내 존재를 알아차릴 수도 있었다.
독을 얼마나 몰아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의 시간을 생각하면, 이미 다 해독해냈을 지도 몰랐다.
“막주님이 그런 몰골로 돌아오시다니, 대체 어떻게 된 일이래?”
“권왕이 배신이라도 한 게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대체 누가 막주님을 그렇게 만들 수 있겠어?”
“그래도 무사하셔서 다행이지.”
경비를 서는 헌터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문휘를 막주라 칭하는 걸로 보아, 살막의 살수들이다.
B급 헌터 수준으로, 중국 인사들의 경호를 위해 방한단에 섞여 있었던 듯했다.
헌터들은 얘기를 나누면서도 날카로운 눈으로 사방을 주시하고 있었지만 그들 정도의 수준으로는 나를 잡아 낼 수 없었다.
휘잉.
두 헌터들의 사각을 따라 움직인 나로 인해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왔다.
위화감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러운 바람이었다.
그 바람이 헌터들을 스쳐 지나갔을 때, 나는 별채 지붕 위에 올라서 있었다.
지붕을 타고 여문휘가 있음직한 곳으로 움직였다.
위치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헌터들이 사방을 에워싸고 있는 것과 달리, 별채 내부에는 단 한 명의 기척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기척은 별채 한 가운데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
“후욱... 후욱...”
태빈이 집어낸 기척이 있던 별채 내부에서 여문휘는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수하들이 녹아내리는 것을 보고 곧장 호흡을 차단한 채, 망설임 없이 몸을 빼냈기에 중독의 정도가 그리 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사지가 떨려올 정도로 강력한 독이었지만 도착하자마자 운기조식을 한 덕분에 지금에 와서는 독 기운 대부분을 몰아낼 수 있었다.
항상 품에 지니고 다닌, 영단의 도움이 컸다.
살막의 비전을 토대로 만들어진 영단은 내공과 힘을 합쳐 단숨에 독 기운을 제압해 몰아냈다.
까드득.
독 기운이 어느 정도 가시니, 태빈에게 당한 것을 떠올랐다.
절로 이가 갈렸다.
전생에 당한 것도 모자라, 이번 생에도 함정에 빠졌다.
자신은 살아남았지만 삼백이 넘는 수하를 잃었다.
수하들의 죽음을 확인한 것은 아니었으나. 자신마저 위험하게 느껴질 정도의 독이었다.
폭발과 불길까지 감안하면 살아남은 수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에 반해 자신이 입힌 피해는 미약하기 그지없었다.
왼팔에 큰 부상을 입히긴 했지만 이 세계에서 그 정도 부상은 힐러만 있으면 언제든 치료가 가능하니, 생채기나 다름없다.
지금쯤이면, 상처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을 것이다.
놈의 수하들 또한 고작 이삼십밖에 죽이지 못했다.
살막이 입은 피해를 생각하면, 피해를 입혔다고 말하기도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후...”
여문휘는 호흡을 길게 내쉬며 마음을 가다듬고 독을 해독하는데 마저 집중했다.
끝이 머지않았다고는 하나, 얼마나 지독한지 잠시 심란해진 틈을 타 되살아나려 난동을 부리는 독 기운이다.
지금은 복수를 생각하기 보다는 몸을 추스를 때였다.
치지직...
여문휘의 왼손 새끼손가락이 검게 물들었다.
한데 모인 독 기운이 새끼손가락을 통해 흘러 나와 땅을 적셨다.
바닥에 닿은 독 기운은 바닥을 태우듯, 녹이며 고약한 악취를 풍겼다.
동시에 파리했던 여문휘의 얼굴에 혈색이 돌았다.
체내의 독 기운을 완전히 방출해 냄으로써 해독은 끝났다.
영약의 기운을 빌린 덕분에 해독 과정에서 소모된 내공도 대부분 회복했다.
급한 불은 끈 셈이었다.
툭.
여문휘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 순간, 어둠이 여문휘를 덮쳐왔다.
***
“큭!”
일전에 암습을 당했던 나와 똑같이 왼쪽 어깨에 커다란 자상을 입은 여문휘가 신음을 토해냈다.
“여기 숨어있었군.”
“네 놈...”
내가 검을 겨누자, 여문휘 또한 마주 검을 들어 올렸다.
왼팔이 상한 탓에 자세가 불안정했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당해줄 생각은 없었다.
“그 때와 상황이 같군.”
첫 기습에 여문휘가 부상을 입고, 나와 대치하고 있는 상황.
부상의 위치가 다르긴 했지만 과거 내가 여문휘를 죽일 때와 같았다.
그 때도 나는 여문휘를 죽였고, 이번에도 그는 죽게 될 것이다.
“무슨 개소리냐?!”
그런데, 여문휘의 반응이 조금 이상했다.
과거 자신의 죽음을 떠올리기는커녕, 기억조차 못하는 듯했다.
“네 놈...?!”
“닥치고 죽어라!”
불신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나를 향해 여문휘가 벼락과도 같이 검을 내질렀다.
아니, 여문휘가 아닌, 여문휘의 탈을 쓴 다른 자다.
확실히 그의 검은 화경의 고수라고 보기에는 부족했다.
잘 쳐줘봐야 초절정.
챙!
“네 놈은 누구냐?!”
단 일합 만에 검을 쳐낸 내 검이 상대의 목에 닿았다.
초절정에 오른 강자였지만 화경과의 격차는 닿을 수 없을 정도로 컸다.
“무영살!”
자신의 목숨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 상대는 제 목에 검이 닿아 있음에도 아랑곳 않고 검을 휘둘렀다.
서걱.
대답을 기대할 수 없는 상대에게 더 이상의 자비는 없었다.
내 검은 망설임 없이 상대의 목을 베어냈다.
툭.
머리를 잃은 몸이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나는 바닥을 구르는 머리를 들어 올렸다.
분명 여문휘인 줄로만 여겼다.
머리를 다시 봐도 얼굴을 변용시키는 역용술의 흔적은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벌컥. 벌컥.
그 순간, 별채의 문이 열리며 십여 명의 헌터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별채를 지키던 경비 인력이었다.
고작 B급 수준에 불과한 헌터들로, 내게 위협이 될 만한 존재들은 아니었지만.
“주석님!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중국의 국가주석을 살해하다니!!”
별채에 들어선 이들은 헌터들뿐만이 아니었다.
밖에서 대기하던 정부 인사들과 중국 측 방한단까지 갑자기 일어난 소란에 몰려들었다.
그리고,
콰콰쾅!!
별채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었다.
***
갑자기 시야를 가리고 나타난 어둠에 여문휘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준비가 끝났습니다.”
흑의부터 복면까지 온몸을 가린 채, 눈앞에 나타난 자는 살막의 암영대주 자운과 그의 수하들이었다.
정보를 담당하는 암영대를 맡고 있기에 누구보다 빠르게 여문휘의 변고를 접한 자운은 여문휘를 청와대로 인도했고, 탈출 계획까지 세워 놓았다.
“놈에게 똑같이 되돌려 줄 것이다.”
“예. 준비한 대역입니다.”
자운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고, 자운의 뒤에서는 여문휘와 똑같이 생긴 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부터 여문휘의 대역으로 키운 살수였다.
살막의 살수들 중, 가장 닮은 자를 뽑아 5년 간 조금씩 얼굴을 바꾸었다.
이 세계의 성형은 놀라울 정도로 정교했고, 역용술 따위가 필요치 않았다.
경지 또한 초절정에 올랐을 정도이니, 쉽게 의심을 살 리도 없었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정말 대단하군.”
자신과 똑 닮은 자는 여문휘의 감탄을 자아냈다.
“놈이라 해도 알아차리지 못할 겁니다.”
직접 대역을 만들어낸 자운조차 헷갈릴 정도다.
처음부터 둘이 함께 있었다면, 결코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전생에서부터 수십 년간 여문휘를 모신 자신이 그럴 진데, 상대가 알아차릴 가능성은 없었다.
“이곳은 저희가 맡은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놈에게 백배 천배로 되갚아 주겠습니다.”
끄덕.
자운의 말에 여문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문휘는 암영대의 연락을 받고, 단순히 탈출만을 생각하지 않았다.
폭탄과 독이라는 똑같은 방법의 복수를 준비했다.
이제 얼마 남지 않는 살막의 정예인 암영대 일부가 희생되긴 하겠지만 놈을 죽일 수 있다면 결코 아깝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