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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살수다-92화 (92/150)

# 92

92화. 도주.

타닥. 타닥.

세상을 집어 삼킬 것만 같던 불길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꺼져가는 불씨만 남았다.

불길과 함께 피어올랐던 독무도 이제는 그을려 검게 변한 대지에 사뿐 가라앉았다.

“허...”

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나와 김원철을 포함해 채 열 명도 알지 못하던 함정이었다.

폭발이 일고 나서야 내 마지막 안배의 존재를 알게 된 대부분의 헌터들은 여전히 충격이 가시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째서 숨긴 겁니까.”

차주한이 굳어진 표정으로 물었다.

주작 길드의 백현민 또한 화가 난 듯, 나와 김원철을 노려봤다.

자칫하면, 자신들까지 집어 삼켰을 폭발이었다.

죽음의 땅으로 변한 대지가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모르는 사이에 자신들의 목숨을 담보로 설치 된 함정을 보고도 평정심을 유지하기는 어려웠다.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이라 했습니다.”

김원철을 향한 물음이었지만 대답은 내 입에서 나왔다.

내가 계획한 일이다.

숨길 이유도, 피할 이유도 없었다.

“최소한 저희들에게는 말해주실 수 있지 않았습니까?”

“미안합니다. 하지만 비밀을 아는 사람이 많아지면 새어나갈 확률도 그만큼 높아지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나는 살짝 고개를 숙였을 뿐, 덤덤히 답했다.

함께 싸운 동료이기는 하나, 내 선택에는 그들의 포함되지 않았다.

다시 돌아간다 하더라도 저들에게 함정에 대해 말할 생각은 없었다.

아직 그들을 신뢰하기에는 그 관계가 그리 두텁지 못했다.

“크음.”

틀린 말은 아니기 때문인지, 차주한은 더 이상 나를 추궁하지 않았다.

1세대 길드 간에 간자가 존재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간자를 색출해내기 위해 항상 최선을 다하긴 하지만 완벽하다 자신할 수는 없다.

때문에 태백과 태양이 적임이 명확해진 상태에서 자신들에게 함정의 존재를 알렸다면, 그 비밀이 지켜지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또한 지금은 이미 지나간 일로 왈가왈부하기보다는 사후수습을 할 때였다.

서로 신뢰에 관련한 약간의 문제가 있긴 했지만 결과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

“1조. 시체 셋. 확인했습니다.”

“2조. 머리와 팔다리 등, 다섯 구. 확인됐습니다.”

백여 명의 헌터들이 불이 꺼진 대지를 헤집고 다니며 시체를 확인했다.

함정의 여파를 피해 물러났던 한국 헌터들이 준비를 갖추고 돌아온 것이다.

언제 준비했는지, 하나같이 방열복은 기본에 방독면까지 쓴 상태였다.

내가 준비한 해독제를 먹었음에도, 멀쩡하던 사람이 한 줌 독수로 녹아내리는 모습을 본 헌터들은 불안감을 지우지 못했다.

방독면을 쓴 뒤에야 간신히 죽음만이 남겨진 대지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중국 헌터들이 진형을 갖추고 있던 장소 인근에서 확인된 시체는 서른다섯 구뿐입니다. 확실히 폭발과 불로는 거의 피해를 입히지 못했습니다. 이제 주변으로 수색을 넓히도록 하겠습니다.”

김원철이 헌터들의 수색 현황을 설명했다.

지금까지 확인 된 것은 고작 서른다섯에 불과하지만 애초에 폭발과 불로 헌터들을 잡을 생각은 없었다.

발견된 시체도 이미 회생불능의 부상을 입은 상태였거나, 죽은 상태에서 불길에 휩쓸린 것들이 대부분이다.

기본적으로 마나를 다룰 수만 있다면, 화력은 큰 위협이 되지 못하니까.

그럼에도 폭발과 불을 사용한 것은 헌터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막는 벽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내가 준비한 함정의 진정한 힘은 독에 있었다.

무색도, 무취도 아니지만 폭발과 불길이라는 벽에 갇힌 헌터들이 도망칠 곳은 없었다.

“병장기 다섯. 확인.”

“로브와 활 등 일곱 가량의 흔적, 확인했습니다.”

귀찮게도 대부분이 독에 녹아내려 시체조차 남기지 못한 탓에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병장기로 그 흔적을 추측해 내야했다.

그러나 무기를 쓰지 않는 헌터들도 있고, 혼자 여러 종류의 무기를 든 헌터들도 있다.

심지어 나무로 된 지팡이나 활 등, 무기마저 소실된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파악이 정확하지는 않았다.

“이백이십 가량의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오십 가량이 확인됐지 않았지만 이 정도면, 대부분은 피하지 못했다고 해도 무방할 듯합니다.”

그래도 함정은 계획대로 중국 헌터들을 모조리 집어 삼켰다.

흔적이 확인된 시체만 이백이십.

독의 위력을 생각하면, 나머지 팔십도 살아있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여문휘의 시체는 찾았습니까?”

“...아직 여문휘의 것으로 보이는 시체는 찾지 못했습니다.”

문제는 아직까지 여문휘의 시체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초절정만 되도 제자리에서 운기를 한다면, 독이 퍼지는 것은 억제 할 수 있는 수준의 독이었다.

폭발과 불길로 인해 독을 억제할 여유가 없어 대부분이 당하긴 했지만 화경의 고수가 시체도 남기지 못했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여문휘가 생을 포기하고, 내공으로 독을 억제하는 것을 멈췄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고서는 무조건 남아있어야 하는 시체였다.

수색 범위를 넓혀봤지만 결과는 마찬가지.

여문휘의 시체는커녕,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인근과 북쪽 경계, 공항까지 경계를 강화하라 지시를 해 놓았으니, 살아있다면, 흔적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아닙니다.”

김원철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여문휘 또한 살수.

아무리 경계를 강화한다 한들, 여문휘가 마음먹고 숨고자 하면, 그 흔적을 발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여문휘가 이대로 물러나지 않을지 모르니, 차라리 주변의 경계를 강화하는 편이 낫을 듯합니다.”

부상의 정도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여문휘 성정 상, 이대로 물러날 리는 없다.

괜히 불필요한 경계로 전력을 흩어놓았다가는 제대로 대응도 못한 채, 각개격파 당할 우려가 있었다.

차라리 한데 모여 대비하고 있는 편이 나았다.

“여문휘의 추적은 제가 맡겠습니다.”

물론 여문휘를 살려 보낼 생각은 없다.

복수를 위해 움직이지 않는 다면, 중국으로 돌아가기 위한 길을 모색할 가능성이 높다.

패배를 생각하지도 않았으니, 퇴로를 고민하지도 않았을 터.

이미 흔적은 소실됐지만 타국에서 여문휘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그리 많지 않았다.

***

수백, 아니 수천수만의 시체가 쌓인 들판에 피투성이가 된 사내가 갑옷을 입은 무리의 우악스러운 손에 무릎 꿇려졌다.

무릎 꿇린 사내의 앞에는 티탄교의 교황이자, 타이탄 기사단의 성기사인 요한이 서있었다.

주변의 기사들과 달리, 요한의 갑옷에는 단 한 점의 흙도, 핏물도 묻어있지 않았다.

검신에 채 마르지 않고 흘러내리는 핏물과 대조되는 순백의 갑옷이 태양빛을 받아 찬란이 빛났다.

“크윽... 미친 광신도 자식!”

사내는 눈에 독기를 품은 채, 요한을 바라보며 외쳤다.

수천의 동료가 모두 죽고, 홀로 살아남았다.

적에게 목숨을 구걸하고 싶지 않을뿐더러, 홀로 살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영국 왕실 길드 길드장, 로버트입니다.”

사내를 무릎 꿇렸던 기사가 말했다.

“하. 마지막인가.”

요한이 머리를 쓸어 올리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앞서 티탄교에 반하는 유럽 연합의 구심점 세 명 중, 독일의 프로이센, 프랑스의 루이 가렐을 죽였다.

그리고 눈앞에 무릎 꿇여 있는 사내가 마지막 영국의 로버트였다.

“티탄님의 은혜가 하해와 같거늘. 어리석은 이여.”

“개소리! 퉷!”

로버트가 이를 갈며 요한을 향해 핏물 섞인 침을 내뱉었다.

그러나 침은 요한의 몸에 닫지 못했다.

보이지 않은 무언가에 가로막힌 듯, 허공에서 흘러 내렸다.

요한만이 전투의 흔적 없이 순백의 고고함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였다.

“죽여라.”

서걱. 푸악!

요한의 말에 기사의 검이 무심히 떨어져 내렸다.

로버트의 머리 또한 허망하게 떨어져 내려 바닥을 굴렀다.

머리를 잃은 몸에서는 핏물이 분수처럼 솟구치다 금세 잦아들었다.

“교황님.”

목이 잘린 로버트의 시신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던 요한이었다.

진정 티탄의 은혜를 받지 못한 로버트를 불쌍히 여기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기사의 부름에 요한의 시선이 곧장 로버트를 떠났다.

무섭도록 차갑게 식은 요한의 얼굴에선 더 이상 안타까움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살막의 여문휘가 한국의 헌터들에게 당해 생사가 불확실하다고 합니다.”

기사는 동쪽 머나먼 땅에서 일어난 소식을 전해왔다.

한국에서 일어난 불길이 막 잦아든 순간이었지만 소식은 벌써 유럽에까지 닿았다.

티탄이 살막을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을 통째로 집어삼키고 아시아 전역으로 그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던 살막이다.

유럽에 기반을 둔 자신들, 타이탄과 대적할 수 있을 만한 힘을 가진 단체.

전 세계를 목표로 하는 티탄이기에 살막을 수시할 수밖에 없었다.

“여문휘가?”

요한의 검미가 꿈틀댔다.

수천의 죽음 앞에서도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듯, 무표정하던 요한이었다.

고작 눈썹만 꿈틀댔을 뿐이지만 그 작은 변화는 요한이 얼마나 놀라고 있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예. 여문휘의 시신이 발견된 것은 아니지만 함께 있던 삼백 가량의 정예 대부분이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때문에 그 또한 살아남았다 해도 멀쩡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으음...”

요한이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감았다.

단체로서의 힘뿐만 아니라, 살막은 타이탄 대륙의 기억을 가진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무림이라 불리는 세계의 기억을 가진 자들이었다.

요한, 자신은 무지한 세계의 정화라는 티탄 신의 뜻에 따라 이 세계에 보내진 신의 사도.

때문에 여문휘 또한 비슷한 존재라 여겼다.

그런 이가 이름도 모를 작은 국가에서 패퇴해 생사조차 불확실 하다?

“고작 그 정도였다니. 여문휘는 나와 같은 존재가 아니었던가. 실망이군.”

요한이 작게 중얼거렸다.

자신과 비슷하기에 호적수가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티탄의 시련이라 여기기도 했다.

그러나 결론은 아니었다.

“차라리 잘됐군. 아난 기사단은 유럽을 책임지고 정화할 수 있도록 하고, 프긴 기사단은 나와 함께 지금 바로 아시아로 간다. 벨로루시와 우크라이나에 있는 마흘 기사단과 차디 기사단에게도 준비해두라고 전하라.”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린 요한은 곧장 말에 올랐다.

호적수라 여겼던 존재의 몰락에 조금은 허망한 감정이 들었지만 차라리 잘 되었다.

아시아를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단체의 수장이 사라졌다.

머리를 잃은 아시아는 무주공산이나 다름없을 터.

아직 유럽이 안정화 되지는 않았지만 티탄에 반하는 세력은 방금 로버트를 마지막으로 모조리 쳐 죽였다.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해야 B급 이하의 하위 헌터들과 민간세력 일부뿐이니, 백여 명의 아난 기사단만으로도 충분했다.

요한의 말 머리가 아시아가 있는 동쪽으로 향했다.

그 뒤를 수천의 기사와 헌터들이 뒤따랐다.

태양으로 인해 찬란하게 빛나는 갑옷은 진정 티탄 신이 그들을 비추고 있는 듯했다.

그렇게 유럽을 집어삼킨 타이탄의 다음 목표가 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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