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
91화. 결전(6).
“현경...?”
내 입에서 조심으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한 번의 격돌이었지만 그 안에서 나는 넘어설 수 없는 벽을 느꼈다.
겉으로 보기에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정권이었다.
아무런 기운도 기세도 담기지 않은.
그러나 그 정권은 내 강기를 부수고 내 내부를 헤집어 놓았다.
그리고 정확히 치명상을 피해 해소되었다.
“다시 눈을 떠보니, 단전과 근맥이 모두 멀쩡하더군. 5년이라는, 지금까지의 시간 또한 주어진 덕분에 최근에야 간신히 발을 들일 수 있었지.”
무심한 권왕의 표정과는 상반되는 놀라운 얘기였지만 나 또한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한낱 병사라고는 하나, 수만을 상대로 한 발 물러섬 없었던 권왕의 모습이 떠올랐다.
분명 같은 화경의 경지임에도 경외를 품게 했던 무인.
화경의 고수들 가운데서 수위에 꼽히던 인물임을 감안하면, 그가 5년의 시간 동안 현경에 올라선 것이 그리 놀라운 일만은 아니었다.
“손속에 사정을 둬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 내가 쓰러지지 않고 서있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뿐이다.
권왕이 손속에 사정을 뒀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말을 지켰다.
전생에 자신을 죽인 이의 무위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겠냐는.
정말 내 자격을 시험할 정도의 힘만 사용했고, 덕분에 나는 내부가 진탕되는 충격에도 쓰러지지 않을 수 있었다.
“아닐세. 내가 그대에게 진 빚을 생각하면, 과거의 목숨 값으로 다하긴 어렵겠지.”
권왕이 쓰게 웃으며 주먹을 거두었다.
화련의 이야기를 할 때, 나는 내가 한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권왕은 느꼈다.
태빈, 아니 과거의 무영살이 자신의 딸을 돌아봐 줬다는 것을.
“무운을 비네.”
물론 권왕의 배려는 딱 거기까지였다.
현경의 절대 고수가 갑자기 아군 편으로 돌아서 전황을 뒤집는다는가 하는 일은 없었다.
권왕은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
그 순간,
“큭!”
내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
!!!
권왕과 태빈의 격돌에 여문휘가 눈을 부릅떴다.
충돌의 여파로 대부분은 눈을 뜨지도 못하고 뒤로 물러나기 바빴지만 여문휘만은 제 자리에 꼿꼿이 선 채, 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결과는 신경 쓰지 않았다.
권왕이 이기는 게 최선이긴 하지만 양패구상만 되어도 상관없으니까.
여문휘는 권왕이 통제를 벗어난 순간부터, 둘 다 죽일 생각이었다.
권왕의 경우, 처리가 조금 일러지긴 했지만 원래 여문휘는 자신에게 위협이 될 만한 존재를 제거하면서 살막의 주인에 오른 자, 인재를 품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
둘의 충돌이 일고, 그 여파마저 희미해졌음에도 여문휘는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승패가 갈리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권왕이 우세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압도적인 결과가 나올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하물며 현경이라니.
충격에 몸이 덜덜 떨려올 지경이었다.
‘놈만이라도 죽인다.’
그렇다고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권왕은 이미 통제를 벗어났고, 대화의 내용으로 보아 다시 살막의 뜻대로 움직여 줄 것 같진 않았다.
어쩌면 적으로까지 돌아설지 모르는 존재가 되었지만 당장 현경의 고수를 어찌 할 수 있는 없었다.
현경의 고수는 과거의 살막이 총력을 기울여도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존재.
아니, 화경인 자신이 직접 나서고, 초절정에 달하는 수십의 특급 살수들을 미끼로 쓰더라도 실패할 가능성이 팔할 이상이다.
준비되지 않은 지금은 백이면 백 실패할 것이다.
그러나 자신과 같이 놀란 얼굴로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 태빈은 다르다.
같은 화경의 경지이긴 하나, 자신 혼자서도 충분히 노려볼 수 있는 상대다.
권왕과 충돌하는 순간, 토해낸 신음으로 보아 적지 않은 내상도 입었을 터.
지금이 놈의 숨통을 끊어 놓을 수 있는 적기였다.
스르륵.
여문휘의 신형이 사라졌다.
상식 이상의 강자들의 격돌에 한 눈이 팔려있긴 했지만 바로 곁에 있던 중국 헌터들조차 그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모를 정도로 은밀한 움직임이었다.
***
“큭!”
권왕에게 너무 정신이 팔려있었다.
짧은 단도가 어깨를 뚫고 나왔다.
심장을 노리던 것을 마지막 순간에 간신히 몸을 돌려 피해냈다.
동시에 신체 강화를 사용하며 피해를 줄여보고자 했지만 어깨를 꿰뚫리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다.
이마저도 운이 좋았다.
권왕의 시선이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끝까지 눈치 채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아니 눈치 챘다 하더라도, 지금처럼 어깨를 내어주는 정도로 그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지금의 부상도 단도가 견갑골을 부수고 쇄골까지 잘라버린 탓에 왼팔을 아예 쓸 수 없을 정도다.
그러나 몸을 피하지 못했다면, 심장이 꿰뚫렸을 테고, 신체를 강화하는 게 조금만 늦었다면 어깨가 통째로 떨어져 나갔을 것이다.
어떤 결과든 지금이 백 번 나았다.
부웅!
어깨가 꿰뚫린 상태에서 곧바로 몸을 회전시키며 검을 휘둘렀지만 이미 몸을 빼낸 여문휘에게는 닿지 않았다.
“여문휘!”
권왕의 고성이 사방에 울려 퍼졌다.
사자후와 같은 내력이 실린 고성이었지만 화경의 고수에게 피해를 줄 정도는 아니었다.
애꿎은 헌터들만 인상을 쓰며 괴로워할 뿐이었다.
“권왕의 말대로 그대와 나의 약속은 이 자를 만나게 해주는 것 까지요. 지금부터는 살막의 일. 돕지 않을 거라면, 최소한 간섭은 하지 마시오.”
“크흠...”
여문휘의 말에 권왕이 침음을 흘렸다.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권왕을 제약하고 있는 듯했다.
“미안하네.”
권왕이 나를 보며 말했다.
권왕은 여문휘를 막진 못했지만 기세를 흘림으로써 잠시간 발을 묶어 두었다.
여문휘도 권왕의 눈치를 보는 듯, 첫 암습 이후로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있었고.
“아닙니다.”
내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권왕이었다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목을 베었을 것이다.
딸아이의 소식이 듣고 싶었다 해도, 소식을 듣자마자 살수를 썼을 테고.
내가 살아온 삶에서 신뢰는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보다 보잘것없는 감정이었으니까.
적으로 남지 않아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 지금입니다. ]
사과 후, 전장을 떠나가는 권왕을 향해 가볍게 포권을 취한 뒤, 김원철에게 전음을 보냈다.
권왕이 빠졌다고는 하나, 한쪽 어깨에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여문휘를 상대할 수는 없다.
약간의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마지막 계획을 실행하는 편이 나았다.
다행히 내가 권왕과 여문휘를 묶어 둔 사이, 한국 헌터들은 안전거리까지 물러났다.
적의 시선을 생각해 아직 영향 범위 내에 있긴 했지만 함정을 발동하고 피할 정도는 되었다.
“드디어 네 놈을 죽일 수 있겠구나.”
여문휘가 단도를 내려놓고 검을 들어올렸다.
검이 여문휘의 주 무기이도 했고, 부상을 입은 상대로 굳이 암습을 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겠지.”
나는 그런 여문휘를 향해 조소를 흘리며 방어태세를 갖췄다.
살수는 일격필살의 무공만 익히지 않는다.
암습에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도주, 혹은 다시 기회를 노리기 위한 것도 존재했다.
방어에 치중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일방적인 공세에 마음을 놓는 순간, 살수의 검은 상대의 숨통을 끊어 놓는다.
물론 여문휘 또한 나와 같은 살수이기에 쉬이 당해 줄 리는 없다.
그럼에도 방어태세를 취한 이유는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굳이 내 손으로 여문휘를 죽이지 않아도 되기에 무리할 이유가 없었다.
“놈! 나와 다시 만나게 된 것을 후회하게 해주마.”
내 조소에 인상을 굳힌 여문휘가 곧장 달려들었다.
고작 수십 미터의 거리를 좁혀오는 그 짧은 순간에도 자연과 동화된 여문휘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곧이어 거리를 좁힌 여문휘의 검이 내 목을 물어뜯기 위해 휘둘러졌고, 사특한 기운의 강기들이 내 전신을 옥죄여왔다.
여문휘의 환(幻)검이 만들어낸 강기는 마치 뱀과 같았다.
백사(百蛇).
여문휘가 살수로 활동하던 시절, 한 자루 검이 백 마리의 독사와 같다하여 붙여진 살명(殺名)이다.
그의 강기가 흰색 뱀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살수로 활동하던 시설 백 명이 넘는 이를 죽였다는 중의적 의미도 담겨 있었다.
채채채챙!
물론 온 신 경을 집중하고 있던 나는 그 것을 놓치지 않았다.
왼팔의 부상으로 균형을 잡는 게 여의치만은 않았지만 강화된 육체가 더 강하고, 빠르게 반응해주었다.
찰나의 순간에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수차례 이어졌다.
“제법이구나.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보자.”
방어에 급급한 내 모습을 비웃듯, 여문휘의 검이 점차 빨라졌다.
서너 마리에 불과하던 뱀이 다섯으로, 여덟으로, 십 수 마리로. 순식간에 수십 마리로 불어났다.
백사(百蛇)라는 살명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듯, 세상이 온통 백사(白蛇)들로 물들었다.
그 때,
쿵!
어디선가 작은 폭음이 일었다.
원래 한 번에 터져야 하는 폭탄이지만 김원철이 일부러 나에게 신호를 보낸 것이다.
“여문휘!!!”
나는 기합을 내질러 폭음을 감추며 검을 내질렀다.
일점에 전력을 다한 찌르기가 수십 마리의 백사를 찢어발기며 여문휘를 향해 짓쳐 들어갔다.
그런다고 감춰질 소리는 아니었으나, 여문휘의 신경을 집중시키기에는 충분했다.
“흥!”
내 마지막 발악이라 여긴 여문휘가 코웃음 치며 검을 휘둘렀다.
수십 마리의 뱀들이 내 검에 달라붙어 진로를 늦췄고, 종내에는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여문휘는 내가 제 상태였다 해도 승패를 장담할 수 없는 상대다.
과거에도 암습으로 부상을 입히지 못했더라도 역으로 당했을 지도 몰랐다.
지금 역시, 전력을 다했다고는 하나, 부상당한 몸으로 여문휘의 검을 뚫어낼 수는 없었다.
타앗.
나는 여문휘의 검과 내 검이 부딪치며 생겨나 반발력을 이용해 뒤로 물러나며 그대로 등을 돌려 냅다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쿠콰콰쾅!!!
일대가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며 폭발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 폭발과 함께 불길이 치솟았고, 검붉은 독무가 일어났다.
폭발과 불길, 그리고 독무가 차례로 중국 헌터들을 집어 삼켰다.
“크악.”
“끄아아!”
폭발에 휩쓸리거나 몸에 불이 엉겨 붙은 헌터들의 입에서 비명이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아이스 필드!”
“윈드 스톰!”
일부가 불길을 잠재우고자 노력했지만 반경 수백 미터를 집어 삼키며 일어난 불길을 모두 잠재울 수는 없었다.
운 좋게 폭발을 피하고, 주변의 불길을 잠재워 시간을 벌었다 하더라도,
“컥...커억...”
독무를 피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처음 폭발에 휩쓸려 절명한 헌터들이 운이 좋은 편이었다.
온 몸이 타들어가는 불길과 더불어 칠공에서 피를 토하고, 온 몸이 녹아내리는 독이 주는 고통은 죽음이 기꺼울 정도였으니까.
“사...려줘...”
일대가 한순간에 지옥으로 변했다.
폭발에 찢겨나간 사지가 불타고 독수로 녹아내린 핏물이 땅을 적셨다.
“무영살!!!”
아비규환의 참상 속에서 여문휘의 피를 토하는 절규가 울려 퍼졌다.